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71화 (72/171)

제71화. 수상한 가면무도회 (4)

복도 끝에 자리한 문을 열자 집무실로 보이는 넓은 방이 드러났다. 등불이 없어 제법 어두웠다. 안으로 들어온 뒤 문을 닫는 크리스토퍼를 뒤로한 채 제라니아는 빠르게 책상으로 다가가 서랍을 열기 시작했다.

함께 행동하기로 합의를 마친 뒤, 그들은 곧장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제라니아가 입을 열었다.

‘완벽히 독창적인 건물은 있을 수 없어. 저택의 외관을 생각하면 대략적인 구조는 훤히 보이거든.’

저택의 외양은 제각기 다르더라도 주인의 방이라든가, 집무실을 두는 위치는 대체로 비슷했다. 그리고 사람은 보통 중요한 물건이 있다면 가급적 제 근처에 둔다.

‘이쪽 복도에는 하인조차 거의 없는 걸 보아, 저택의 주인은 경계심이 많고 사람을 믿지 않는 자야.’

소중한 것을 보관할 때, 경계심이 많은 이의 행동은 두 종류로 나뉜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바로 근처까지 사람을 두어 감시하거나, 아예 타인을 믿지 않아 물건 근처에 누구도 얼씬조차 하지 못하게 하거나.

저택 바깥에는 병사가 깔려 있고, 들어오는 입구 역시 지키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유독 이쪽에만 이렇게 사람이 없다는 건 아마도.

‘아마 우리가 찾는 건, 이 복도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

‘…사실 남작의 집무실로 짐작 가는 장소를 아까 찾았는데, 눈에 띄는 건 없었어. 그래서 좀 더 둘러보고 있었던 건데…. 일단 저기도 한번 들어가 보자.’

작은 방에서는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크리스토퍼 역시 집무실을 한번 뒤져봤지만, 눈에 띄는 건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집무실에 직접 온 건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서였다. 가져온 등불을 한 손에 들고, 제라니아는 방을 구석구석 살폈다.

“아까도 생각했지만, 경비가 생각보다 허술하네.”

“그러게.”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반증일지도.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제라니아는 책상 서랍을 뒤적거렸다. 크리스토퍼는 벽에 붙어 있는 책장들을 살폈다.

서랍을 다 살피고 물건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은 뒤, 책장으로 움직이려던 제라니아는 바닥을 보고 멈칫했다. 나무 바닥 위에 깔려 있는 동그란 카펫 밖으로 삐죽 선이 튀어나와 있었다.

카펫을 들춰보자, 기하학적 무늬가 바닥을 수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잘은 모르지만, 이건.

“마법진…. 같은데.”

무릎을 굽히고 카펫의 모서리를 들춰내던 제라니아는 문양의 일부를 책장 하나가 가리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크리스토퍼가 책장을 옮겨보려 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책장에는 각양각색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유심히 책장을 살피던 제라니아는 저보다 손가락 한 뼘쯤 컸던 남작의 키를 떠올리고, 살짝 손을 올려 그가 손을 뻗기 가장 쉬운 칸을 짚었다.

서재의 주인은 남작이니, 무언가가 있다면 그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제라니아는 망설임 없이 칸의 가운데에 꽂혀 있던, 책등에 금장식이 새겨진 책을 뽑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온갖 보석과 상아 조각, 금장식을 붙이고 있어 겉이 우둘투둘한 책들과 달리, 이 책만은 표지에 아무것도 없이 밋밋했기 때문이었다.

제라니아가 책을 꺼내자마자 책장이 옆으로 움직이면서, 온전한 형태가 된 마법진이 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책장이 있던 벽에 작은 문 하나가 나타났다. 금색 나비에 감싸여진 녹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찾았다.”

그렇게 말한 순간 제라니아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크리스토퍼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제리!”

그가 다가오기도 전, 억센 손이 제라니아의 목을 틀어쥐었다. 제라니아의 손에 들려 있던 책과 등불이 툭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그의 머리 위에서 들렸다.

“생각보다 머리를 굴릴 줄 아는군요.”

붙잡힌 채로 제라니아는 아주 살짝 고개를 위로 올렸다. 아까 파티장에서 사회자를 맡았던, 새하얀 가면을 쓴 남자. 까무잡잡한 피부가 순백의 가면과 대조되었다.

목소리의 울림이 얼얼하게 머릿속에 번졌지만, 견딜 만했다.

“쥐새끼들이 숨어들었을 줄이야. 설마 여기까지 찾아낼 줄은 몰랐습니다만.”

별다른 반응 없이 검을 뽑아 그에게로 겨누는 크리스토퍼를 향해 남자는 조소했다.

“그런 고철덩어리로 날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남자가 손바닥을 펼치자, 그 위에서 푸른 불꽃이 피어났다. 깜짝 놀랄 틈도 없이, 남자가 손가락을 크리스토퍼가 있는 쪽으로 뻗었다. 손가락 끝으로 옮겨붙은 불꽃들이 그대로 화살을 쏘듯 크리스토퍼에게로 날아들었다.

크리스토퍼는 침착하게 들고 있던 검으로 불꽃을 전부 쳐냈다. 검에 닿자마자 불꽃들은 전부 허공에서 흩어졌다. 그걸 본 남자의 가면 너머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잔재주를 부리는군요. 하지만 반항해도 되겠습니까?”

그가 제라니아의 목을 더욱 조르자, 크리스토퍼는 움찔했다. 그가 제라니아의 몸을 살짝 공중으로 띄웠다. 발꿈치를 든 채 한 손으로 남자의 손목을 붙잡고 버티는 제라니아의 모습에, 크리스토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장 검을 내려놓으세요. 눈앞에서 이 여인이 목 졸려 죽는 걸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더없이 잔인한 내용을 여상하게 읊는 남자를 노려보다가, 크리스토퍼는 검을 바닥에 내던졌다. 카펫 위로 떨어진 검을 힐끔 본 남자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남자의 주변으로 불꽃 몇 개가 나타나더니 화려하게 타올랐다. 남자의 손짓을 따라 불꽃들이 전부 크리스토퍼에게로 달려든다 싶더니, 그대로 바스러졌다.

“…아니?”

그와 동시에 찰칵, 소리가 들렸다. 손목에서 차가운 감촉을 느낀 남자의 등을 싸한 예감이 훑고 지나갔다.

천천히 눈알을 아래로 굴린 그의 시야에 제 손목을 붙들고 있는 제라니아의 손과, 손목을 감싼 동그란 은색의 제어구가 보였다. 목을 졸린 채로도 제라니아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집무실에 오기 전, 크리스토퍼로부터 받은 물건이었다.

‘이거 가지고 있어.’

‘그게 뭔데?’

‘마법 제어구. 이걸 마법사의 손목에 채우면 마력을 차단해 준다고 하더라.’

‘네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마법사를 마주칠 가능성이 있잖아. 상대적으로 노리기 쉬운 건 너니까. 단검이 있다고 한들, 너는 제대로 쓰지도 못할걸.’

남자의 손에서 피어난 불꽃을 보자마자, 제라니아는 크리스토퍼를 쳐다보았다. 그도 같은 생각을 떠올렸는지 표정이 굳은 와중에도 제게 눈짓했다.

크리스토퍼가 남자의 시선을 끄는 동안 제라니아는 발버둥을 치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조심조심 드레스 자락 밑에 숨겨두었던 제어구를 꺼냈다. 채우는 법을 미리 익히기는 했지만, 긴장이 되었다.

기회는 한 번뿐, 실패하면 안 된다.

남자가 크리스토퍼를 공격하려고 집중하는 순간, 제라니아는 남자의 손목을 와락 붙잡고 제어구를 채웠다. 틈 없이 맞물린 은색 팔찌를 보자마자 제라니아는 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성공이다!

“아악!”

제어구를 보자마자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제라니아를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바닥에 쓰러진 제라니아가 목을 붙잡고 콜록거렸다. 가차 없이 부딪힌 팔다리가 욱신거렸지만, 호흡을 들이마시는 게 먼저였다. 나비 가면의 한 귀퉁이가 살짝 비틀렸다.

크리스토퍼가 재빠르게 다가와 제라니아를 부축했다.

“괜찮아?”

“어, 그것보다 검!”

크리스토퍼가 한쪽에 떨어져 있는 제 검을 돌아본 찰나, 제어구가 채워진 제 손목을 미친 듯이 손톱으로 긁던 남자가 그들을 노려보았다.

“열쇠를 내놔!”

남자가 제라니아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가 제라니아를 붙들려는 순간, 남자의 팔을 붙잡은 크리스토퍼가 남자를 곧장 바닥으로 내동댕이친 뒤 그의 등 위에 올라탔다. 무자비하게 돌려 꺾인 팔이 아픈지 남자가 앓는 소리를 냈다.

“항복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큭…. 커헉….”

그런데, 남자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저 팔을 꺾어 제압했을 뿐인데 남자는 다 죽어가는 것처럼 몸을 뒤틀었다. 바르작거리는 그의 입가에서 침이 줄줄 흘렀다.

제라니아와 크리스토퍼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크리스토퍼가 손을 떼었음에도 남자는 발작하듯이 몸을 덜덜 떨고만 있었다. 남자의 눈이 까뒤집히고 흰자가 드러났다.

“정신 차려요!”

제라니아의 외침에도 반응 없이 손목을 쥐어뜯던 남자의 목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무런 미동도 없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라니아가 조심스럽게 남자의 목에 손가락을 대어 맥을 짚었다.

“…죽었어.”

나지막한 선언과 함께 두 사람은 남자가 죽기 전까지 집착하던 손목을 쳐다보았다. 핏빛의 손톱자국이 만연한 손목에 채워져 있는 제어구가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제라니아가 작게 속삭였다.

“설마, 이것 때문에?”

크리스토퍼가 열쇠를 꺼내 남자의 팔에서 제어구를 풀어냈다. 심란한 얼굴을 애써 감추는 제라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토퍼가 등불을 제라니아에게 건네며 조용히 요청했다.

“이자의 몸은 내가 수색해볼 테니, 너는 저 문을 열어봐.”

“알았어.”

남자의 시체에서 억지로 눈을 떼어낸 제라니아는 벽에 나타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책상과 책장 하나씩이 존재했는데, 책장에는 가죽으로 된 갈색의 표지를 가진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하나를 빼 들고 안을 확인했다.

“이건….”

파티에서 노예를 사 간 이들의 이름과 서명이 종이를 수놓았다. 제라니아는 재빨리 책들을 휘리릭 펼쳐, 속독하기 시작했다.

절반 넘는 책을 확인했지만 마법을 쓰는 노예에 관한 단서는 없었다. 위에 있는 책들을 내버려둔 채 제라니아는 책상에 붙어 있는 서랍을 확인했다.

하나, 둘, 셋.

맨 마지막에 있는 서랍만이 열리지 않았다. 달그락거리는 서랍을 보고 있던 제라니아가 크리스토퍼를 불렀다. 서랍의 고리를 그가 조금 힘주어 잡아당기자 서랍이 뽑혀 나왔다.

“이건가.”

두꺼운 책 한 권이 안에 들어 있었다.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제라니아는 그것을 꼭 끌어안았다.

마법 능력을 타고난 노예의 매매를 기록한 장부. 상단의 상징인 방울 문양이 첫 장에 표기되어 있었다. 가문을 상징하는 도장이 찍혀 있으니 증거로 삼기에 부족함은 없을 듯했다.

“그리고 이거.”

크리스토퍼가 그 마법사의 품에서 찾았다며 둥그런 고리에 매달려 있는 열쇠꾸러미를 내밀었다. 어떤 용도의 열쇠인지는 바로 짐작이 갔다.

“감옥 열쇠!”

“그런 것 같네.”

“지하에 감옥이 있댔어. 아이들이 갇혀 있을 거야.”

눈을 빛내는 제라니아를 마주한 크리스토퍼는 불길함에 휩싸였다.

“잠깐만, 제리. 설마 그들까지 구하자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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