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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70화 (71/171)
  • 제70화. 수상한 가면무도회 (3)

    하인 둘이 계단 옆을 지나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인 중 한 명의 옷이 차를 쏟은 듯 얼룩이 져 있었다.

    “어휴, 이게 무슨 난리냐.”

    “차 쏟은 걸로 끝났으면 양호한 거지. 오늘따라 주인님 심기가 한층 안 좋아 보이던데.”

    “오늘 감옥에서 소동이 벌어졌잖아? 덕분에 준비가 늦어져서 하마터면 파티 시작 시간을 못 맞출 뻔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귀한 분들 오시는 자리인데.”

    “야, 근데 그걸 한 번에 정리하는 걸 보니 오싹하더라. 역시 마법이겠지?”

    “쉿, 소리가 커.”

    뚜벅뚜벅 걸어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는 하인들을 확인한 뒤, 제라니아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어 하인들이 온 방향으로 걸어갔다. 아주 살짝 열려 있는 문의 틈새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문에 바짝 붙어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척 보기에도 무척 호화로운 방에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고민하던 제라니아는 소리 나지 않게 문을 살짝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붉은 가죽에 금장식을 단 소파와 벽에 걸린 그림들, 왼쪽 벽에 붙어 있는 벽난로에서는 불이 활활 타올랐다. 그 위로 박제한 사슴 머리가 장식되었다.

    바닥에는 양모로 만들어진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는 데다, 맞은편에는 커다란 창문이 자주색의 커튼을 제 몸에 반쯤 걸치고 있었다.

    왕궁 저리 가라 할 만큼 호화스러운 방을 두리번거리던 제라니아는 오른편에 자리한 방문을 발견했다. 그쪽으로 움직이려고 발을 내딛는 순간,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제라니아가 커튼을 붙잡고 그 뒤로 몸을 숨기자마자, 안쪽에 있는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파이프를 입에 물고 뻐끔거리며 남작이 말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귓가에 들려오는 공손한 존대에 제라니아는 가만히 눈을 깜빡거렸다.

    “늘 수고가 많군요. 그분께서도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그분?’

    “저희야말로 꾸준히 질 좋은 물품을 제공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분명 저택의 주인은 남작인데, 마치 사회자인 남자 쪽이 더 높은 신분인 양 대화가 오갔다.

    숨소리 하나 쉬이 내지 못한 채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제라니아는 조금 더 창문에 몸을 붙이려는 순간, 등에 닿은 무언가에 깜짝 놀랐다.

    커튼이 살며시 흔들렸다.

    “그나저나 폴린은 대체 어디로 갔나 모르겠군요. 변덕스러운 녀석 같으니라고.”

    투덜거리던 남작은 커튼을 뒤집어쓴 창문 쪽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남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검지를 입술에 댄 남자가 천천히 커튼 쪽으로 다가섰다. 어떻게 대응할 틈도 없이, 커다란 손이 제라니아의 입을 틀어막고 뒤로 잡아당겼다.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저항하려던 제라니아는 익숙한 느낌에 동작을 멈췄다. 그러는 사이, 제라니아를 붙든 이의 다른 쪽 손에서 복슬복슬한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커튼을 붙잡고 들추려던 남자는 제 발치에서 느껴지는 간지러운 감각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야옹.”

    털이 북슬북슬한 새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커튼 밑을 비집고 나와 그의 발치에 얼굴을 비볐다. 물끄러미 고양이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뒤에서 남작이 호들갑을 떨었다.

    “폴린! 이 녀석, 여기 있었던 게냐.”

    남자가 무릎을 굽히고 손을 내밀자, 고양이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그의 손 위로 올라섰다. 고롱거리는 고양이를 남작의 품에 안겨주며 남자는 차분하게 말했다.

    “고양이였나 보군요.”

    그 말을 끝으로, 둘은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야옹거리는 고양이 울음소리가 희미해질 즈음, 제라니아를 붙들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제라니아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입가를 가린 천을 살짝 내려 얼굴을 드러낸 상대를 마주 보며 제라니아는 나직이 탄성을 토해냈다.

    “…크리스!”

    크리스토퍼 휴스타인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왕명과 함께, 수호부와 제어구를 포함해 마법에 관련된 여러 도구들을 하사받은 여섯 명의 기사들은 곧장 아렌타로 출발했다. 그들은 용병인 척 길드와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으는 데 주력했다.

    그들이 하사받은 임무는 간단했다.

    낙인을 다루는 마법사의 존재 유무를 확인하고, 그와 얽혀 있는 이들을 알아낼 것.

    크레이츠 왕국에서 마법을 삿된 일에 사용하는 행위는 극형감인 만큼 흔적을 찾기란 어려웠으나, 끈질기게 파고들었다.

    영지를 다스리는 후작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편했겠지만 유착 관계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왕실에서 군대를 보내 조사를 명하는 게 아니라, 극비로 임무를 보낸 이유는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었다.

    심증이야 차고 넘쳤지만, 물증이 없는 이상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다.

    어쨌거나 정치는 정보전이었다. 마법을 쓰는 이가 한패라면 마법 도구를 이용한 연락망이 있을 것이고, 군대를 파견하기로 하자마자 소식을 듣고 증거를 인멸할 것이 분명했다.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충심을 의심받았다며 후작을 위시해 귀족들이 들고 일어날 테고, 그런 난리통에 조사는 더욱 늦어지고 결국 흐지부지될 것이다. 왕실에서 오래 근무한 기사들이 그 당연한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때문에 기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문제에 접근했다.

    사람이 하는 일인 이상 흔적이 아예 남지 않을 수는 없다. 장장 일주일간의 탐문 끝에 그들은 레터스 상단 지부에서 수상쩍은 움직임이 보이는 것을 포착했다.

    상단과 거래하는 귀족 중 한 명인 쉐링턴 남작의 저택으로 오가는 짐마차 안에, 노예로 추정되는 이들이 타고 있는 걸 목격한 이가 있었다. 사흘 뒤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에 상단이 거액의 예산을 투자했다는 소식 역시 전해 들었다.

    그들은 논의 끝에 파티가 열리는 날을 기준으로, 상단의 지부를 털어보기로 결정했다. 두 패로 나뉘어 넷은 상단 지부로, 둘은 저택으로 가 혹시 있을지 모르는 단서를 찾기로 했다.

    크리스토퍼가 저택으로 오게 된 이유는 별것 없었다.

    제비뽑기에서 저택을 뽑았기 때문이다.

    나는 운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크리스토퍼는 제 품에 안겨 있는 나비 가면을 쓴 여인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절대 여기서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상대를 마주하고 있으려니 현실감이 없었다.

    제라니아 역시 놀랐기는 마찬가지였다. 평소에 입던 기사복 대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옷차림을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분명 그였다. 푸른 눈동자가 황당하다는 듯 일그러졌다.

    “설마 싶었는데, 정말 너였어? 제라니아. 네가 여길 왜….”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 너야말로 어쩐 일이야?”

    “나도 사정이 있어서.”

    커튼을 걷어내자 꽉 닫혀 있는 문이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걸어 나온 제라니아가 크리스토퍼를 돌아보았다.

    “고양이는 어떻게 된 거야?”

    “아까 커튼에 숨을 때,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더라고. 혹시 싶어서 데리고 있었어.”

    덕분에 들킬 위기를 넘겼으니 다행이었다. 제라니아는 크리스토퍼의 차림새를 시선으로 훑었다.

    “아무리 봐도 손님으로 온 것 같지는 않네.”

    “…너는 손님으로 온 것 같은데, 왜 여기 있었어?”

    “사정이라니까.”

    “이 저택은 위험해. 당장 이곳을 떠나.”

    제라니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연히 그럴 거지만, 지금은 아니야. 찾아야 할 게 있어.”

    “그게 뭔데?”

    “아마 네가 찾는 거랑 같은 거.”

    크리스토퍼는 침묵했고, 곧 말도 안 된다는 듯 조용히 내뱉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나 혼자 가겠어. 너는 어서 돌아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잖아. 나는 아직 돌아갈 생각 없어.”

    “위험하다고 하잖아. 여기가 어딘지 정말 몰라서 그래?”

    “귀족답지 않은, 아니, 사람 같지 않은 이들이 모여서 끔찍한 짓들을 유희랍시고 즐기는 자리지. 충분히 잘 알고 있어.”

    “그런데 여기 더 있겠다고? 방금도 하마터면 들킬 뻔했잖아!”

    답답하다는 듯이 말하는 크리스토퍼에게 제라니아는 조용히 대꾸했다.

    “들키기 전에 나가면 돼. 그리고 위험한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나는 들켜도 어떻게든 할 수 있어. 하지만 넌….”

    “날 혼자 보내기 걱정된다면 같이 가면 되잖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는 제라니아를 보며 크리스토퍼는 말끝을 흐렸고, 곧 손을 뻗어 제라니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크리스!”

    “…밖까지 데려다줄게.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야 하겠다.”

    나가자는 듯이 자신을 이끌려는 커다란 손을 제라니아는 세차게 뿌리쳤다. 짝, 손과 손이 떨어지며 단절을 선언했다.

    벽난로에서 타닥타닥, 나무가 타들어가는 소리만이 침묵을 비집고 들어왔다.

    “크리스토퍼 휴스타인.”

    차분하지만 서늘한 목소리가 제라니아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차가운 음성이 다시금 손을 뻗으려던 크리스토퍼를 멈칫하게 했다.

    제라니아가 제 이름을 성까지 붙여서 부르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그것도 저렇게 냉정하게, 마치 타인인 것처럼.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제 얼굴을 응시하는 크리스토퍼를 제라니아는 지그시 바라보았다. 튀어나오려는 감정들을 혀로 짓눌렀다. 싸울 시간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필요한 말만을 입에 담았다.

    “왜 내 문제를 네가 해결하겠다고 하는데?”

    “그건….”

    “날 걱정해주는 거 알아. 아는데.”

    제라니아는 심호흡을 한 뒤 내뱉었다. 가면 아래로 보이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난 보호받기만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야, 크리스.”

    “…….”

    “넌 언제나 나를 지켜주려고 해. 널 알아온 이후로 계속 그랬던 것 같아. 정말 고마운데, 그런데 가끔, 너한테 내 의견이 중요하긴 한 건지 의문이 들 때가 있어.”

    사람이 사람에게 호의를 가지는 일이 어찌 쉬울까. 그래서 그만큼, 맹목적이다 싶을 정도로 호의를 내보이는 크리스의 태도가 신기하기도 했다. 자신을 걱정하기 때문에, 그래서 하는 말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조심스러웠다. 그런 그에게, 나를 내버려둬 달라고 말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날 만만하게 보는 게 싫다고 했지. 그러는 너는 어떤데? 내가 네 비호 아래서 언제까지고 보호만 받았으면 좋겠어?”

    이미 너부터가, 나를 독립적인 인간으로 여기고 있지 않잖아.

    그렇게 말하는 대신, 제라니아는 천천히 손을 뻗어 크리스토퍼의 손을 맞잡았다. 악수를 하듯 꼭 붙잡은 손마디가 단단했다.

    “같이 가.”

    “…….”

    “위험한 짓 안 해. 조심할 거야. 네 말대로 시간 없는 거 알잖아. 찾을 것만 찾고 나가자.”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하며 제라니아는 크리스토퍼의 대답을 기다렸다. 시간이 없다는 말에 반응한 건지, 흐려졌던 그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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