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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69화 (70/171)
  • 제69화. 수상한 가면무도회 (2)

    까마귀 날개를 닮은 새까만 가면을 쓴 리암이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제라니아가 리암에게 조금 더 바짝 다가섰다. 마치 춤을 추는 듯이 밀착된 자세였다.

    “어디 갔었어?”

    “탐문을 좀. 저쪽에 문 하나가 있더라고.”

    리암이 홀의 건너편을 눈짓했다. 그가 들어왔을 통로 옆에 제법 큰 문 하나가 붙어 있었다. 제라니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물었다.

    “상의도 없이?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나 혼자 붙잡혀 들어가는 거지 뭐. 확실하게 정보를 얻어낼 거면, 좀 대범하게 찔러봐야지. 너도 비슷한 생각으로 왔잖아?”

    리암이 다 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제라니아는 시선을 피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서, 뭐 수확은 있었어?”

    “복도 하나가 이어지고 왼쪽은 창문, 오른쪽은 벽이야. 방이 되게 많았어. 대부분 열려 있었는데 아무도 없더라고. 복도도 꽤 어두웠어. 창문이 있는데도 말이야.”

    “하인들은?”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데? 그래서 마음 편하게 조사하다가, 갑자기 복도에서 누가 오는 것 같길래 재빨리 다시 돌아왔어.”

    “…이상하네.”

    “이상하지.”

    들어오는 길에도 병사들이 감시하듯 서 있던 것을 생각하면, 복도에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건 묘했다. 귀족이 주로 쓰는 통로인가. 묘사를 들어보면 휴게실인 것 같기도 했다.

    “주최자는 누구인 것 같아?”

    “저기 저 사람.”

    제라니아가 부채를 접는 시늉을 하며 부채 끝으로 저 멀리 서 있는 가면 쓴 남자를 가리켰다. 드레스와 정장을 입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푸짐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체형을 가진 남자를 보며 리암이 말했다.

    “저자가 쉐링턴 남작인가? 그냥 보기엔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그렇지? 사실 내가 신경 쓰이는 건 저쪽이야.”

    제라니아의 부채가 아주 살짝 옆으로 미끄러졌다. 남작의 뒤에 서 있는 키가 큰 남자의 코끝에 새하얀 가면이 걸려 있었다. 동상처럼 가만히 서서, 뒷짐을 진 채 그린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를 유심히 살피는 리암의 눈이 날카로웠다.

    “이유가 뭔데?”

    “그게….”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짝짝,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팡이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는 남작의 옆으로 제라니아가 가리켰던 남자가 나섰다. 말이 없는 줄 알았는데, 과장되었다 싶을 정도로 쾌활한 음성이 홀을 가득 메웠다.

    머릿속을 휘젓는 것 같은 느낌에 제라니아는 살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어떻게 견딜 만은 했다.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터지는 것과 동시에, 홀의 양옆으로 나 있던 통로에서 가면을 쓴 하인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제라니아가 방금 전 보았던 향로와 똑같이 생긴 항아리들이 그 뒤를 따랐다. 향로에서 피어나는 향이 하늘하늘 공중을 수놓았다.

    분홍빛의 연기가 홀 안을 느릿하게 채우기 시작했다. 그새 구석에 있는 향로 역시 가져와 향을 피우고, 딱 하나의 문을 제외한 모든 문을 닫는 동작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충격적인 건 그다음이었다.

    리암이 들어가 봤다던 문이 열리고, 하인들의 손에 이끌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대략 여덟 살에서 열두 살 사이로 추정되었는데, 남녀 가리지 않고 웃통을 벗고 있었다. 제법 예쁘장한 얼굴을 한 아이들이 멍한 눈으로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남자가 손을 튕기자, 등불이 죄다 꺼졌다. 어둠 속에서 커튼에 붙어 있던 수정들이 희미하게 빛을 내며 달그락달그락 흔들렸다. 곧, 아이들이 서 있는 주변만이 환하게 밝아졌다. 사람들의 모습은 가리되, 아이들을 볼 수 있게 되어 있는 구조였다.

    “자, 오늘도 여러분을 위해 귀여운 아이들을 데려왔습니다. 우선은 어린아이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제라니아는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노예 경매구나!

    이래서 초대장에 아무런 설명도 없었던 거군.

    제라니아는 재빨리 주변을 훑어보았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 몇몇의 얼굴이 보였다.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대다수가 이 상황을 알고 있었다는 양 태연했다.

    사회자로 보이는 남자의 부름에 따라 남자아이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윗옷을 입지 않은 채로 나와 한 바퀴를 빙그르르 도는 아이의 등에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익숙한 문양에 제라니아는 눈을 크게 떴다.

    “보시다시피 아주 건강하고, 예의도 바르며, 목소리도 좋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떨지 않고 말하는 아이의 눈동자는 죽은 생선 눈깔을 연상시켰다. 분명 살아 있는데, 마치 인형과도 같이 인위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제라니아는 문득, 제 쪽을 돌아본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불편할 정도로 텅 비어 있는 눈동자가 마치 자신을 단죄하는 것만 같았다.

    경악을 감추기 위해 부채로 입가를 가린 제라니아의 옆에서 귀족들이 가격을 부르기 시작했다. 첫 번째 남자아이를 낙찰한 건 나이 든 여성 귀족이었는데, 제 소유가 된 아이의 몸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의도가 명백히 묻어났다.

    그 후로도 경매는 계속 진행되었다. 여러 아이들이 경매에 등장했는데, 개중에는 최근 마법 능력을 개화한 아이 역시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아이를 거래하는 것을 본 제라니아는 또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왕국법상 마법 능력을 가진 이는 무조건 신전에 신고해야만 했다. 마법사를 빼돌린 것이 들통나면 대부분은 극형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아무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노예 경매 자체는 불법이 아니었으나, 마법 능력을 가진 이가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아이들의 등에 그려진 문신 역시 마음에 걸렸다. 그건 분명 핀의 등에 그려져 있는 문양과 일치했다.

    노예를 아주 접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이렇게 직접적으로 경매를 지켜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이들은 단순히 움직이는 것만이 아니라, 귀족들의 요구에 맞춰 온갖 수치스러운 자세를 취해야 했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었다.

    끔찍한 광경에도 오히려 분위기는 탄력을 받은 듯 점점 더 과열되어 갔다. 광기가 따로 없는 장면이었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1부가 끝났으니, 한 시간 동안 쉬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즐겨주시길.”

    사회자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향이 확 짙어지면서 사람들의 눈 역시 하나둘씩 몽롱해졌다. 그들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이들과 달라붙더니, 차마 눈 뜨고 못 볼 민망한 풍경들이 연출되었다.

    조용히 코와 입을 소매로 가리며 제라니아는 뒤로 물러섰다. 이건, 아무래도.

    “으….”

    옅은 신음 소리에 뒤를 돌아본 제라니아가 멈칫했다. 리암이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깜빡거렸다. 제라니아는 재빨리 리암의 팔을 잡고 속삭였다.

    “리암, 괜찮아?”

    “머리가 울려….”

    힘없이 대답하는 리암의 목소리에 제라니아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사회자로 보이는 남자가 쉐링턴 남작과 함께 문을 열고 나가자, 충분한 간격을 둔 뒤 제라니아는 리암을 끌고 같은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리암의 묘사대로 복도는 꽤 어두웠다. 창문 밖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적막한 복도를 내리비추고 있었다. 하인을 마주칠까 염려했는데, 쉬는 시간이라 그런지 복도는 아직 휑했다.

    재빨리 근처에 있는 방으로 들어간 제라니아가 문을 잠그고, 안에 마련되어 있는 소파에 리암을 앉혔다. 시원한 공기를 쐬니 좀 나아졌는지, 리암이 눈을 껌뻑거렸다.

    “…와, 이건 예상 못 했는데.”

    향까지는 예상 범주에 있었지만, 설마 이런 복병이 있을 줄은. 천천히 호흡을 고르는 리암의 잘생긴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아직도 머리가 아파?”

    “지금은 그럭저럭 살 만해. 너는 멀쩡하네.”

    “전하께서 주신 게 있어서. 아마 그것 덕분일 거야.”

    그런 게 있었냐며, 불공평하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종알거리는 리암의 이마를 제라니아가 조심히 쓰다듬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만히 정리해주는 손길이 세심했다.

    닫힌 문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곧 옆방에서 묘한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는 것에 두 사람은 동시에 표정을 구겼다. 귀를 씻어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제라니아는 말했다.

    “다시 홀에 돌아가는 건 위험할 것 같아. 너 지금 상태는 어때?”

    “으, 몸에 힘이 잘 안 들어가긴 하는데 나오니까 좀 나아.”

    “그럼, 넌 여기서 잠깐 쉬고 있어.”

    “무슨 소리야?”

    “그 사회자를 쫓아가 봐야 할 것 같아서.”

    “미쳤어?! 어떤 놈인 줄 알고 널 혼자 보내라는 건데?”

    벌떡 일어나려던 리암은 머리를 콕콕 찌르는 두통에 흐물흐물 늘어졌다. 처음에는 크림처럼 부드럽기 짝이 없던 목소리는 저항을 시도하니 금세 날카로운 가시가 되었다. 정신을 몽롱하게 하는 향과 합쳐지니 더욱 죽을 맛이었다.

    제길, 그 사회자 자식. 무슨 수를 쓴 거야.

    “안 들키면 돼.”

    “그게 말이 쉽지.”

    “정말 상황만 보고 올 거야. 여차하면 길을 잃어버린 척할게.”

    이대로 내버려 두기는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단순히 마법과 연관되어 있기만 했다면 몰라도, 인형처럼 사고 팔리던 아이들의 모습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노예 소유 자체를 법으로 단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법 능력을 가진 아이를 몰래 사고팔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그걸 이용해 다른 아이들 역시 구할 수 있을지 몰랐다.

    제라니아는 프란츠의 염려를 이해했다. 그라면 나중에 좀 더 좋은 기회가 있을 테니 지금은 몸을 사리라고 하겠지.

    하지만 그동안, 더 많은 아이들이 팔려나갈 것이 분명했다. 자신의 안위만을 도모하자고, 그 아이들을 외면해도 괜찮은 걸까.

    핀의 얼굴을 떠올리고 제라니아는 주먹을 꼭 쥐었다.

    사회자의 말대로라면 한 시간 뒤에 2부가 시작된다. 그들이 2부에 들어간 다음 기회를 노릴까, 아니면 지금 당장 움직일까.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획을 수립하고, 제라니아는 제 얼굴에 삐딱하게 걸쳐져 있던 나비 가면을 고쳐 썼다.

    “리암, 너는 일단 조금 있다가 저택 밖으로 나가도록 해. 가급적 눈에 띄지 말고.”

    “뭘 하면 되는데?”

    “밖에 있는 마부를 만난 다음, 일단 마차를 후작가 근처로 보낸 다음 조용히 대기하라 해. 기사들도 같이.”

    “후작가로?”

    “응. 그리고….”

    짤막하게 계획을 설명하자 리암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제라니아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냐고 묻자,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넌, 진짜…. 정말 성격 참 어디 안 간다.”

    누가 널 얌전하다고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며 작게 투덜거리던 리암이 몰래 감춰왔던 단도 한 자루를 품에서 꺼내 제라니아에게 내밀었다.

    “이거 가져가.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고마워.”

    “너 진짜 무사해야 돼. 이 미친 계획에 동조하고 내 목숨이 붙어 있으려면 그것밖에 없어.”

    “그래도 반대는 안 하네?”

    “말려도 할 거잖아. 아무튼 정말 조심해!”

    머리를 부여잡으면서도 잔소리를 하는 리암을 향해 제라니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암을 내버려두고 방에서 나온 뒤, 제라니아는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서늘한 복도를 걸어갔다. 매끄러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복도의 바닥 위로 어렴풋이 인영이 비쳤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까, 계단이 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제라니아는 끝없는 어둠이 펼쳐져 있는 복도를 바라보다가, 심연처럼 어두운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고, 천천히 위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3층으로 올라서려던 순간, 복도 바닥을 비추는 불빛을 발견한 제라니아는 숨을 죽이고 벽에 바짝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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