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68화 (69/171)
  • 제68화. 수상한 가면무도회 (1)

    홀은 넓었다.

    진득한 밤이 내려앉은 커다란 저택의 창문마다 불빛들이 반짝거렸다. 주홍색 불빛이 홀을 아늑하게 비췄다.

    바닥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어 발소리가 묻혔고, 군데군데 놓인 테이블 위로 예쁜 꽃과 음식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와인색 커튼 위로 매달린 자줏빛의 수정들이 잘게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홀의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악사들이 느긋한 동작으로 선율을 연주했다. 부드러운 음악이 춤을 추며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의 귓가를 어루만졌다. 휴게실이 없는 대신 홀의 한구석에 소파가 모여 있었다.

    참석한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평범한 파티였다.

    혼자 서 있는 건 자신뿐인 것 같았다.

    금색의 나비가면을 쓰고,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린 채로 제라니아는 시선만을 힐끔 옮겼다.

    겉으로만 보면 평범한 가면무도회 같은데.

    느릿하게 홀을 가로지르며 제라니아는 보이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 * *

    “안 됩니다.”

    말한 대로 저녁에 돌아온 프란츠에게 제라니아는 초대장을 내밀었다. 폴릭시나가 말했던 범주 내에 포함된 도시이기도 하고, 노파가 남겼던 말을 생각하면 들어맞는 구석이 많았다.

    프란츠는 말없이 제라니아의 설명을 귀 기울여 들었다. 그는 제라니아가 내놓은 추측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본인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런 그라도 동의할 수 없는 일은 있었다.

    “당신이 직접 가겠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예상한 대로라면 적의 소굴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곳에 직접 가겠다니, 무모한 짓이라고 반박하는 프란츠에게 제라니아는 조용히 대답했다.

    “전하, 저는 한 번 본 건 쉽게 잊지 않아요. 그게 무엇이라도요.”

    “…….”

    “목표는 분명하잖아요. 이 모든 일을 꾸민 배후를, 혹은 그에 관한 단서를 찾는 것. 저희가 가진 단서는 현재로서는 낙인밖에 없어요. 하지만 들어갈 때 몸수색을 할 수도 있으니, 천을 들고 들어가는 건 무리겠죠.”

    조금이라도 의심을 받았다간 일이 귀찮아지니, 신중을 기해야 했다. 그 자리에서 붙잡혀 입막음을 당할지도 모르고, 무사히 빠져나오더라도 상대가 곧장 잠적하는 불상사가 벌어질 수 있었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이미 충분히 있습니다.”

    “날짜가 당장 내일이에요. 다행히 가면무도회라 신분을 따로 만들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아렌타는 여기서 마차로도 한나절이 걸리는 곳이잖아요. 시간을 맞추자면 내일 낮에는 바로 출발해야 할 거예요.”

    편지를 정리한 뒤, 루이스를 슬쩍 떠봤지만 그는 그 편지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런 편지가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것 같아, 제라니아는 더는 묻지 않았다.

    받는 이의 이름이 없는 걸 봐서는, 공작가에 피해가 갈 가능성은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듯했다. 사실 받는 이의 이름이 없다는 게 가장 수상하긴 했지만.

    “이건 극비 임무잖아요. 아무한테나 맡길 수는 없을 텐데, 전하의 수행원 중 누군가가 빠지면 바로 티가 날 거라고요. 하지만 저는 굳이 전하의 일정을 따라가야 하는 사람이 아니고, 시내를 구경하러 가겠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어요.”

    다른 것보다도 장소가 가면무도회였다. 익명성은 정체를 숨기려는 이들에게도 유리했지만, 자신들에게도 괜찮은 패였다.

    “이렌스에게 연락해, 공간이동 스크롤로 사람을 보내라고 하면 됩니다. 그라면 내일 밤까지 쓸 만한 첩자를 보낼 수 있을 겁니다.”

    “마법과 관련된 문제일 수 있잖아요. 공간이동 스크롤을 썼다가 저쪽에서 눈치채면요?”

    “…….”

    “다른 건 몰라도 머리 쓰는 건 자신 있으니까, 뭐든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동반으로 한 명을 데려갈 수 있으니 리암이랑 같이 가면 될 거예요.”

    아무리 사교계에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도, 자신은 바이첸 공작가의 직계다. 예절도 처세술도 기본 이상은 한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선택한 이유도 그래서이지 않았나.

    “전하께서 제게 결혼을 제의하신 이유는, 제 능력이 필요하셨기 때문이잖아요. 이 일에 저만한 적임자가 있나요?”

    “…….”

    “필요하다면 뭐든 이용하셔야죠. 저를 포함해서.”

    그저 당신의 옆에서 보호받기만 하려고 결혼을 승낙한 게 아니었다. 프란츠의 눈썹이 살짝 움찔거렸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내키지 않는 듯했다.

    “현실적으로 지금 당신이 가장 적임자임을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꼭 당신을 보내야만 하는 일은 아닙니다. 위험하다는 걸 알지 않습니까.”

    제라니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전하. 세상에 위험하지 않은 일은 없어요.”

    “…….”

    “모든 일에는 크고 작은 대가가 있죠. 전하께서 올라 계신 그 자리부터가 그렇잖습니까.”

    “굳이 위험에 뛰어들 필요는 없습니다.”

    “위험한지 아닌지는 가봐야 알겠죠. 언니가 했던 말을 생각하면, 파티가 이번에만 열리는 건 아닐 거예요. 일단 어떤 곳인지 알아보는 정도를 우선하겠다고 약속드릴게요.”

    “…….”

    “눈에 띄는 짓을 하지 않는 한 들킬 염려는 없어요. 사람들은 대체로, 사내보다 여인을 덜 경계하는 법이니까요.”

    말이 없어진 프란츠를 설득하기 위해 제라니아는 조금 더 강하게 나갔다. 말끝에서 씁쓸한 감정의 파편이 바스러졌다.

    약간의 침묵 끝에, 프란츠가 가만히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한숨을 내쉬고 싶은 걸 억누르는 듯 호흡이 흐트러졌다.

    “왜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겁니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을 뿐이에요. 해낼 수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기도 하고요.”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은 아닐 텐데요.”

    제 안전과 관련된 문제라 그런지, 쉽게 물러설 기미가 없어 보이는 프란츠를 지그시 쳐다보던 제라니아가 입을 열었다.

    “전하, 제게 청혼하셨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기억합니다.”

    “저는 그때, 전하께서 저를 전하의 곁에 대등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게 좋았어요.”

    그럴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제게 머리가 좋다, 그래서 아깝다 말하는 사람은 꽤 있었지만, 전하처럼 제게 망설임 없이 저라면 나라를 바꿀 수 있다 말했던 사람은 없었거든요.”

    “…….”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아무것도 기대한 적이 없어요. 제가 가질 수 있는 것들은 명확하고, 그것조차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아니까요.”

    나이를 먹으면서 가장 먼저 익혔던 것은, 해서는 안 되는 말을 구분하는 것이었다. 외면하고 회피하고 무시하고, 적지 않은 시간을 그렇게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살지 않을까 했었다.

    “그런데, 전하와 함께 있으면 자꾸 욕심이 불어나요. 조금 더,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욕심이 생겨요.”

    ‘아가씨는 욕심이 많군.’

    ‘네?’

    ‘포부가 무척 커. 그러니 만족하지 못할 수밖에. 아가씨를 담기에 그릇이 너무 작아.’

    눈동자를 덮고 있던 무언가가 한 꺼풀 벗겨지고, 시야가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왜 잊고 있었을까. 불가능을 먼저 따져봐야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자신이라고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아니었을 것이다.

    답답함을 해소하듯 가만히 숨을 토해냈다. 무언가를 깨달았을 때는 늘 후련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때 제가 느낀 감정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득히 먼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처럼, 어째서 이토록 막막한 기분이 드는 걸까. 지금의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그러니까-.”

    “알겠습니다.”

    뭐라 덧붙이기도 전에, 프란츠는 무겁게 입을 떼어냈다. 두통이 오는 것처럼 이마를 짚는 프란츠의 얼굴에 망설임이 옅게 묻어났다.

    “약속한 대로, 리암 경과 함께 가십시오. 그를 절대 옆에서 떼어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그는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늘 그랬듯이.

    * * *

    홀을 가로질러 봤지만 딱히 특이할 만한 건 없었다. 굳이 따지면 홀의 구석마다 자리한 커다란 항아리들일까. 슬쩍 살펴보니 아무래도 향로의 일종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사방에 향이 진동한다고 했는데 향이라곤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코델리아가 말한 사기꾼이 향을 팔았다고 했으니, 그 비슷한 유일까.

    그렇다면 마법과는 크게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겠네.

    제라니아는 드레스 안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제 손바닥에 쏙 들어올 만한 작은 주머니가 목에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 프란츠가 내민 물건이었다.

    ‘이것을 가져가십시오.’

    ‘이게 뭐예요?’

    ‘수호부입니다. 간단한 마법에는 면역이 될 겁니다.’

    받긴 했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제라니아는 조심스레 물었다.

    ‘이걸 저 주시면, 전하께서는 어쩌시려고요?’

    걱정스레 말하는 제라니아를 프란츠는 지그시 응시했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저번 마차 습격 사건 이후, 그는 제라니아에게도 자신과 같은 수호부를 주고자 했다. 그걸 위해 신전에 연통을 넣었지만, 그쪽에서는 차일피일 소식을 미뤘다.

    이유야 뻔했다. 제 태도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거겠지.

    복잡한 머릿속을 치워두고, 프란츠는 무심하게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지금, 그게 나보다는 당신에게 필요할 것 같으니까요.’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혹시 혼자시라면….”

    “호의에 감사드리지만, 일행이 있어서 말이지요.”

    부드러운 미소를 내걸고 정중하게 거절하자, 남자는 실망한 듯하면서도 쉽게 물러났다. 혼자 있어서 그런지 중간중간 제게 말을 거는 이들이 상당했다.

    어째 얼굴을 가리니 더 인기가 있는 것 같은데.

    “그나저나 얘는 어디 있는 거지….”

    저택에 도착해 초대장을 내민 뒤, 안으로 들어가자 양옆으로 계단이 마련된 넓은 로비가 드러났다. 남성과 여성이 올라가는 계단을 따로 구분해놓은 탓에 제라니아는 리암과 헤어져 계단을 올라야 했다.

    공작새처럼 꾸민 화려한 드레스의 여인들과 섞여 2층으로 올라가며 제라니아는 저택 내부를 꼼꼼히 살폈다.

    저택의 경비는 생각보다 삼엄했다. 바깥에 서 있던 병사들의 수만도 대략 몇십은 될 듯했고, 2층에 마련된 큼지막한 장식품이 곳곳에 자리한 복도에도 제복을 갖춰 입고 서 있는 병사들이 간간이 보였다.

    저택의 규모가 제법 크긴 하지만, 파티 하나에 이렇게 많은 병사들을 동원할 필요가 있나?

    일단 리암과 합류하긴 해야겠는데, 홀에 들어온 뒤부터 찾아다녔음에도 어째 보이지를 않았다.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제 어깨를 붙드는 손에 제라니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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