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은빛 뱀의 초대장 (4)
샤를로테의 머릿속에 지나왔던 세월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체벌은 흔한 일이었고, 그보다 더 무서운 건 방관이었다. 이 이상 욕심을 부려봐야 지금 가진 것조차 잃게 될 수 있었다.
기회가 왔으니 잡으면 될 텐데, 루이스는 이 상황 자체가 달갑지 않은 듯했다.
“누님!”
가족 중 가장 어리광을 받아준 게 자신이라 그런지, 루이스는 제 앞에서는 묘하게 말이 많아졌다. 다행히도 아이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는지라 때와 장소를 가렸고, 샤를로테는 늘 그런 동생을 안쓰러워했다.
연민을 고스란히 내비칠 생각은 없었다. 여리고 약한 남동생에게는 그저 독이 될 테니.
“…마지막으로 순서를 점검하자.”
일어나. 차분한 목소리가 연무장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 * *
푸른빛이 감돌던 새벽을 살짝 걷어낸, 이른 아침이었다. 푸르스름한 밤의 장막을 비집으며 태양이 산맥 주변으로 새하얀 테두리를 그렸다.
동이 트고 있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전하.”
고도가 높은 만큼 새벽바람이 제법 추웠다. 산맥을 등지고 두툼한 숄을 어깨에 두른 채로, 제라니아는 가만히 프란츠를 배웅했다. 말을 타고 가야 하는지라 갑옷을 차려입고 있어,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기사처럼 보였다.
“그럴 겁니다.”
멋없이 대답하는 프란츠의 금빛 머리카락을 바람이 살살 흐트러뜨렸다. 몸을 숙인 프란츠가 무미건조한 손길로 제라니아의 숄을 다시금 정돈해 주었다.
“추우니 이만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저녁에는 돌아올 겁니다.”
망설임 없이 돌아선 프란츠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기사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등지고 걸어가는 프란츠를 바라보던 제라니아는 몸을 움직여 성으로 가려다가, 우뚝 멈춰 섰다.
그것은 어떠한 충동이었다.
“프란츠!”
저를 부르는 낭랑한 음성에 프란츠는 고개를 돌렸다. 비장한 얼굴로 제게 걸어오는 제라니아를 본 프란츠가 한 박자 느리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제라니아?”
제 얼굴로 뻗어오는 손길에 프란츠는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몸을 숙였다. 제라니아가 발뒤꿈치를 드는 것과 동시에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프란츠의 동공이 놀라움을 담아 커졌지만, 제라니아는 눈을 꼭 감고 있어 보지 못했다.
우리가 연인은 아니지만, 당신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랄 수는 있지 않을까.
그저 미신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굳어 있는 프란츠의 입에 도장을 찍듯 입술을 꾹 누르고 있던 제라니아의 발꿈치가 천천히 땅으로 가라앉았다.
“…잘 다녀오세요.”
입맞춤을 마치며 제라니아는 천천히 눈을 떴고, 깜짝 놀랐다.
“프란츠?”
“…아.”
제 손에 붙잡혀 있는 프란츠의 얼굴이 사과처럼 붉었다. 얼굴도 그렇지만, 물에 색소를 탄 것처럼 목과 귀로까지 퍼져가고 있었다. 피부가 원체 새하얘서 그런지 그 변화가 특히 두드러졌다.
얼떨떨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제라니아의 표정에 프란츠는 이제야 사태를 파악했는지 굳어 있던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기름칠이 덜 된 고철처럼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았다.
“그, 아니, 이건….”
당황한 건지 말을 더듬거리는 프란츠의 얼굴이 따끈따끈했다. 생전 처음 보는 모습에 제라니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심으로 놀랐는지 허둥지둥이라 불러도 될 만큼 재빨리 제 손을 떼어내고, 팔을 들어 눈가를 가리는 프란츠의 모습이, 그러니까.
귀여웠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감상에 제라니아는 못내 당황했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크고, 무심하기로는 왕국 최고라 할 수 있는 이 왕자님이 귀엽다니.
말도 안 돼.
“아, 그, 어제 그러니까, 입맞춤을 한다고 그래서, 무사히 돌아오라는 뜻으로요!”
원래 상대의 감정은 전염되는 법이다. 평생 저토록 당황하는 모습을 볼 리 없다고 생각한 상대방이 그러면 더더욱이나.
분명 방금 전까지는 추웠는데, 왜 이렇게 더운 것 같지.
“혹시, 불쾌하셨다면….”
프란츠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말을 더듬으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 제라니아를 향해 그는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제라니아의 어깨를 건드리려던 손이 멈칫하다가, 천천히 거두어졌다. 축제 때와 달리 쉽사리 손을 대기가 망설여졌다.
프란츠는 자문했다.
닿으면 부서질까, 그래서 망설이나?
아니다.
시작되어서는 안 되는 무언가가 시작될 것처럼 아득한 느낌이, 그 순간 프란츠를 압도했다.
제 얼굴에서 퍼지는 열기와 서늘한 새벽 공기,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있는 당신. 연갈색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무미건조하던 시야 속에서, 오로지 당신만이 눈이 부셨다.
생의 찬란함을 그림으로 담아낸다면, 분명 지금 당신의 모습을 하고 있겠지.
잔잔하던 수면이 폭풍을 맞아 뒤집히듯 속이 울렁거렸다. 자꾸만 뒷걸음질 치려는 제 발을 프란츠는 애써 붙들었다. 이 이상 다가가서는 안 된다. 지금의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선을, 그어야….
무형의 선을 머릿속에 거칠게 내리긋는 순간, 제라니아가 움직였다. 그가 그어둔 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선 제라니아가 온몸으로 프란츠를 와락 끌어안았다.
제 등에 둘러지는 작고 부드러운 손과 품에 안겨드는 다정한 온기, 프란츠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떤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던 그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몇 번씩 손을 쥐었다가 펴고, 아주 느릿하게 제라니아의 등을 감싸 안았다. 직접 손을 대어서일까, 둑이 터진 것처럼 감정이 새어 나왔다.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감정이라니, 말도 안 돼.
그러면서도 제라니아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조금 동작이 거칠었는지 제라니아가 작게 신음을 흘렸지만, 목이 조여드는 듯한 갈급함이 조금이나마 해소되는 것 같았다. 시원하고 청량한 체향이 코끝에 스며들었다.
숨이 트인 것처럼 후련하면서도, 속이 갑갑했다. 낯선 것들이 제 마음을 짓눌렀다.
지금 자신이 어떤 기분인지, 아마 당신은 모르겠지.
자신을 끌어안은 채 제 어깨에 얼굴을 묻는 프란츠의 등을 제라니아는 가만히 토닥거렸다.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이.
그가 제게 매달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설마 아니겠지 싶으면서도, 자신을 의지하는 듯한 그의 행동이 심장을 간지럽혔다.
기분이 이상했다. 별거 아닌 일인데, 왜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한 걸까.
나지막한 목소리가 자그마한 약속을 속살거렸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렇지만, 그게 싫지 않았다.
* * *
“이쪽이에요.”
루이스가 커다란 나무문을 열자 넓은 서재가 그들을 맞이했다. 왕실 도서관만큼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어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짙은 나무 향기가 낡은 종이 냄새가 섞여 코끝을 자극했다.
“정말 제가 들어와도 되는 건가요?”
많은 것을 내포한 질문에 루이스는 간단하게 답했다.
“괜찮아요. 기밀은 따로 보관하는 장소가 있어서.”
태연하게 대답한 루이스가 잠시 기다리라 말하고 서재 안쪽으로 쏙 들어갔다. 책을 읽을 생각은 없는지 구석에 마련된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 리암을 내버려두고, 제라니아는 총총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아예 다른 언어를 표준어로 사용하는 트라이탄과 달리, 클라단의 언어는 왕국이 사용하는 히렌어와 비슷해 배우기 쉬웠다. 책등을 손가락으로 짚어 쓸어보았다. 가죽의 감촉이 부드럽게 손끝을 어루만졌다.
“오래된 책이 많네.”
필사본이 주를 이루던 과거에는 책의 가격이 무척 비쌌다. 단순히 책을 필사하는 것만이 아닌, 양피지로 책을 엮고 세공까지 덧붙이는 경우가 많은 만큼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고급품이 아니었다.
책장에 있는 책의 대부분이 낡고 오래된 것을 보아, 자신은 지금 클라단이 가진 재력의 일부를 엿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큼직한 책상이 자리한 안쪽으로 걸어가며 유심히 책장을 살피던 제라니아는 《민요의 역사》라고 적혀 있는 두꺼운 책을 발견하고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재미있어 보이는데.”
문제는 책을 어떻게 꺼내냐였다. 발뒤꿈치를 들면 닿을 것 같은 애매한 위치에 책이 꽂혀 있었다. 고민하던 제라니아는 사다리를 가져오지 않고 손을 뻗었다. 겨우겨우 손끝에 책이 닿았고, 그것을 빼냈다.
“앗!”
책이 꽤 무거운 탓인지 제라니아는 일순 균형을 잃었다. 있는 힘을 다해 책을 놓치는 것만은 피했으나, 중심을 잡기 위해 허둥대던 제라니아는 책상을 짚었다. 책상에 놓여 있던 편지 다발들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책을 책상에 내려놓은 다음 제라니아는 편지를 하나둘씩 주워 담았다. 그러던 중, 바닥에 떨어져 있는 편지를 주운 제라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제라니아가 주운 건 새까만 봉투에 들어 있는 초대장이었다. 살짝 열려 있는 봉투 안쪽으로 크림색의 종이가 보였고, 그 위가 은빛을 발라놓은 듯 반짝거렸다.
제라니아의 손이 스르륵 움직여 그 종이를 꺼냈다. 선명하게 그려진 은색 뱀이 초록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종이 한가운데에 자리했다.
‘은색 뱀이 그려진 초대장을 받으면 들어갈 수 있다는 가면무도회가 있는데, 거기에 가면 황홀한 경험을 할 수 있다던가.’
‘확실하진 않은데, 마법이랑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있더라.’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온몸에서 울리는 듯했다. 초대장을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친애하는 이에게
귀하를 쉐링턴 저택에 열리는 가면무도회에 초대합니다. 한 명의 초대객을 함께 데려오실 수 있으며, 가면이 없으실 시 출입이 제한됩니다.
부디 참석하시어 연회를 더욱 빛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 쉐링턴 남작]
초대장의 내용은 짧고 평범했다. 받는 이의 이름을 특정하지 않은 걸 제외하면 이상한 점이 없었다. 밑에 짤막하게 일시와 장소가 적혀 있었다. 일시는 내일 저녁, 장소는 아렌타.
이것만 봐서는 더없이 평범한 사교계의 초대장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동쪽으로 가면…. 얼굴 없는 이들이 모여 기묘한 모임을 갖지. 사방에…. 향이 진동하는군. 교활한 뱀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먹잇감들을 기다리고 있어.’ 얼굴 없는 이들, 기묘한 모임, 마법, 뱀, 먹잇감.
벼락같은 깨달음이 제라니아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초대장을 꼭 쥔 채로 제라니아는 눈을 깜빡였다.
사라졌다고 생각한 단서가, 형체를 갖고 눈앞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