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66화 (67/171)
  • 제66화. 은빛 뱀의 초대장 (3)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일을 마치고 돌아온 프란츠는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제라니아의 뒷모습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제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 창문을 내다보는 제라니아의 얼굴이 생각에 잠긴 듯 고요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지, 가까이 다가가도 미동조차 없었다. 말없이 옆으로 다가가 그를 지켜보던 프란츠가 불쑥 말을 걸었다. 그제야 옆을 돌아본 제라니아가 눈을 깜빡거렸다.

    “깜짝이야, 언제 오셨어요?”

    “좀 됐습니다.”

    30분쯤 지켜봤다고 이야기하는 대신, 두루뭉술한 대답을 내놓으며 프란츠는 제라니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무튼 그래서, 무슨 생각을 했길래 누가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까.”

    “어, 그게….”

    제라니아는 잠시 말이 없다가, 차분히 생각을 다듬어 내놓았다.

    “오늘 루이스 공자랑 샤를로테 공녀를 만났거든요.”

    프란츠의 눈이 아까 전 만났던 매와 같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그 두 사람이 무슨 짓이라도 했습니까?”

    제라니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오히려 생각과 정말 달라서 놀랐어요. 둘 다 무척 친절한 분들이었어요.”

    “윌터 경과는 많이 다르지요.”

    바로 핵심을 찌르는 프란츠의 대답에 제라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간 얼굴에 살며시 그림자가 졌다.

    ‘비전하께서 강한 분이시라서요.’

    왜 제게 호의를 표하는지에 대해 질문했을 때, 루이스는 약간의 침묵 끝에 그렇게 대답했다.

    ‘저희 가문의 상징은 검입니다. 휘장에도 두 자루의 검이 교차되어 들어가죠. 그러나 저는 형님이나 누님과 달리 그런 쪽에 소질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을 실망시켰죠.’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했는데, 다른 이들의 존중을 받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고 덤덤히 말하는 루이스의 얼굴에 짙은 회한이 묻어 있었다.

    ‘이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아버님의 앞에 서면 반사적으로 몸이 굳어버리고 맙니다. 한심하게도 말이지요. …하지만 비전하께서는 아버님과 대등하게 대화를 나누시더군요.’

    특출한 무력이 있는 것도 아닌, 그저 작고 가녀린 여인이다. 그러나 위압적인 이를 앞에 두고도 저보다 한참 작은 여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태연함을 가장하는 게 아니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게 무척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냥, 그래서입니다.’

    대화를 마친 뒤, 제라니아는 아주 많은 것을 생각했다. 언제나처럼 조용히 생각만 하고 묻어두었을 것이, 프란츠를 마주하고 있으니 하나둘씩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나 역시도, 편견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한 게 아닌가.”

    결투와 승부에 미친 전투광들, 왕국 사교계에서 클라단 영지 출신들을 보는 시선은 그러했다.

    오랜 세월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노력한 휴스타인가와 달리, 프로모 왕국은 멸망한 지 이제 고작 6년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그조차도 그들은 왕국의 문화에 따르기보다는 최소한의 예의만 차렸다.

    기사들 사이에서는 인기를 끌었지만 사교계의 사정은 달랐다. 다만 귀족들은 뒤에서는 그들을 야만인이라 폄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호전적인 기질을 두려워했다.

    같은 입장인데도 사교계에 더 친화적인 휴스타인 공작가나, 그들을 따르는 루미테인 후작가보다도 케라온 공작가의 눈치를 더 보는 것만 봐도 증명되었다.

    “사실 여기 오기 전에 좀 걱정했거든요.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희 가문이랑 케라온 공작가는 사이가 좋지 않고…. 윌터 경과 그런 일이 있었다보니 솔직히 가문 자체에 껄끄러운 감정이 없지 않았어요.”

    “얼마 전에 그런 일을 겪었던 걸 생각해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럴지도 몰라요. 그래도 그건 윌터 경의 잘못이지, 그들이 잘못한 건 아니니까요.”

    휴스타인가와 친하게 지내면서, 제라니아 역시 그들이 목도한 차별의 순간을 종종 봐왔다. 그런 상황을 안타까워하고 그렇게 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생각했는데, 정작 제 일이 되니까 무의식적으로 선을 긋고 있었던가.

    깨닫고 보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심란한 듯 손으로 뺨을 감싸는 제라니아와 달리 프란츠는 무심히 대답했다.

    “글쎄요. 그렇다고 해도 방심할 만한 상대들은 아닙니다. 개개인의 성정이 괜찮다 한들, 개인의 의견보다 가문의 뜻이 더 중요한 게 귀족이니까.”

    “알고 있어요.”

    필요하다면 가문을 등질 수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제라니아는 웃고 있었다.

    “그래도, 만나볼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따라오길 잘했어요.”

    “그들이 마음에 들었습니까?”

    제라니아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도 있고요. 대립하는 것만이 길은 아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상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공작과 윌터를 겪었을 때까지만 해도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생각이 씨앗에서 싹이 트듯 고개를 내밀었다. 프란츠가 가차 없이 손을 들어 햇빛을 가렸다.

    “늘 생각하지만, 당신은 정말이지 큰 꿈을 꾸는군요. 케라온 공작이 있는 한 쉽지 않을 겁니다.”

    냉정한 대답에도 제라니아는 풋 웃고 말았다. 저를 타박하고자 꺼낸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쉽지 않다고 하시는 걸 보니, 전하께서도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희박한 가능성보다는 확실한 결말을 선택할 겁니다.”

    “제가 방법을 찾아온다면 들어주실 건가요?”

    핀을 구했던 그때처럼. 눈으로 묻는 제라니아에게 프란츠는 덤덤히 말했다.

    “그건 그때 가봐야 알 것 같군요.”

    확실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제라니아에게는 충분했다. 그늘이 제법 걷힌 제라니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프란츠가 입을 열었다.

    “생각했던 게, 단지 그것만입니까?”

    “네?”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의심스레 자신을 바라보는 눈초리에 제라니아는 속으로 뜨끔했다. 묘하게 안절부절못하는 제라니아를 보며 프란츠는 얼굴에 물음표를 그렸다. 무슨 일이지?

    “그, 샤….”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제라니아는 입을 합 다물었다.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는 프란츠에게 그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당신을 대하는 샤를로테 공녀의 태도가 마음에 걸린다고.

    ‘…전에 뵈었을 때보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괜찮으신 겁니까.’

    ‘물론입니다.’

    단순한 안부 인사라고 생각했을 때도 느꼈던 위화감은 아까 전, 프란츠의 이야기를 꺼내는 샤를로테의 태도에서 확실한 흔적을 남겼다.

    제라니아가 말을 꺼낼 수 없었던 건, 이 생각이 짐작의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직접 확인해본 것도 아닌데, 억측일지도 모르는 일을 함부로 입에 담는 것은 상대에게 실례이지 않은가.

    엄밀히 따지면 제가 참견할 문제도 아니었다. 공녀가 프란츠를 특별하게 생각한다고 한들, 그건 둘 사이의 문제였다. 프란츠가 제게 소홀한 것도 아니었고, 공녀가 적극적으로 제 감정을 표현한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과 프란츠는 감정적인 문제로 서로를 구속할 사이는 아니지 않던가. 그러니,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찜찜함을 조용히 묻어두고 제라니아는 슬쩍 말을 돌렸다.

    “내일 지진이 났던 지방에 다녀오실 거랬죠?”

    “그럴 겁니다.”

    몇 주 전, 동쪽 지방에서 발생했던 지진 때문에 그 지역의 마을 여럿이 피해를 입고 현재는 복구 중이었다. 피해 규모를 보고받긴 했으나 직접 확인하러 가야 했다. 세금과 관련된 일이니만큼 허투루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자치권을 주었다 한들 여기는 크레이츠의 영토였고, 관리 없이 내팽개쳐둘 수는 없었으니 당연한 처사였다. 문제가 생길 싹은 미리 잘라내야 옳았다.

    제라니아를 데려가자니 일단 산지가 너무 험했고, 당장 영지에 바이첸에 반감이 있는 이가 상당한 만큼 무슨 일이 생길지 장담할 수 없어 프란츠는 그를 성에 남겨두기로 했다. 제라니아 역시도 동의했다.

    “공작님도 함께 가시나요?”

    “그러겠다고 했는데, 모레 있을 열병식을 준비해야 한다고 해서 말입니다. 그 대신 샤를로테 경이 같이 가기로 했습니다.”

    “…그렇군요.”

    “당신은 어떻게 할 겁니까.”

    “오늘은 성을 구경했으니까, 내일은 루이스 공자랑 같이 서재에 가기로 했어요. 역사서를 보여준다고 했거든요.”

    “…단둘이 말입니까?”

    묘하게 떨떠름한 눈빛을 한 프란츠를 보며 제라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뇨, 오늘처럼 리암이랑 같이 갈 건데…. 왜요?”

    “아닙니다.”

    아무것도.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프란츠의 손이 제 가슴께를 문질렀다.

    챙그랑!

    어두운 밤,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휘영청 떠 있는 달이 불빛이 감도는 창문 안쪽을 비췄다.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내던지며 루이스가 연무장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헉헉… 이, 정도면, 되었겠죠.”

    “이제 좀 그럴듯해 보이긴 하는구나. 시간을 맞출 수 있겠어.”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샤를로테는 들고 있던 천과 물병을 루이스에게로 던졌다. 힘없이 그걸 받은 루이스가 숨을 몰아쉬며 천으로 얼굴을 닦았다. 물을 몇 모금 머금어 입을 축인 뒤, 루이스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누님, 역시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버님의 명령이다. 불복할 셈이냐.”

    답답하다는 듯 루이스가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온순하던 얼굴에 미미한 짜증이 어려 있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거 아실 텐데요. 저는 이런 동작 하나도 버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제가 어떻게 열병식을 이끌 수 있겠습니까. 기사들이 절 제대로 따를 리가 없습니다.”

    “걱정 마라. 너를 따르지 않을지는 몰라도, 아버님의 명에 불복할 머저리는 클라단에 존재하지 않아.”

    냉정한 평가에 루이스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가 내뱉었다.

    “형님이 없는 이상, 그 자리에 서는 건 누님이어야 합니다! 누님도 불만이 아주 없으신 건 아니잖습니까!”

    “…….”

    샤를로테는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동생에게 그는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버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아라. 어떻게 될지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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