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은빛 뱀의 초대장 (2)
“야, 오래 버텼네!”
“그러게 누가 까불랬냐. 자업자득이다, 인마!”
“그래도 꽤 봐주셨네. 장작 패듯이 두들겨 패실 줄 알았는데.”
“무슨 여자가 저렇게….”
중얼거리다가도 말을 잇지 못하는 남자를 보며 동료 하나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냐는 듯이 쯧쯧 혀를 찼다.
“샤를로테 님한테 너처럼 까부는 놈들이 매년 나오지.”
“넌 아닌 것처럼 말한다? 대표로 한 놈씩 얻어터지고서야 정신 차리잖아.”
“난 윌터 님보다 샤를로테 님이 더 무서워…. 그때 두들겨 맞았던 기억이 가끔 악몽으로 나온다고.”
“오늘은 그래도 기분이 좋으셔서 이 정도로 끝난 줄 알아.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부하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여인은 목검을 바닥으로 던졌다. 목검 주변으로 먼지가 풀썩 일었다 가라앉았다.
“굉장하네….”
홀린 듯이 승부를 바라보고 있던 제라니아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윌터의 검술은 묵직하게 몰아치는 느낌이라면, 샤를로테의 검술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깔끔하고 빠르고 정확했다. 어쩌면 윌터보다 강할지도 몰랐다.
이 사람이 다루는 검을 본다면, 크리스 역시 꽤 흥미로워하지 않을까.
“제법인데.”
리암 역시 가볍게 소감을 읊었다. 검을 배운 상대가 그라시아 공작인만큼 검에 한해서는 칭찬에 박한 그가 이렇게 말하는 건, 그만큼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뜻밖에도 루이스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부하가 가져온 천으로 얼굴을 닦던 여인이 제라니아를 발견하고 부하들에게 가볍게 손짓했다. 먼지구름이 일듯이 왁자지껄하던 소음이 일순 훅 가라앉았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제라니아는 여인이 제 쪽으로 걸어오는 것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인은 제라니아와 두 발자국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멈춰 섰다.
“귀한 분께서 여기까지 와주셨군요.”
예를 갖추는 여인은 제라니아보다 키가 한참 컸다. 어깨가 꽤 넓었고 팔다리에는 근육이 붙어 있었으며 움직임 역시 검을 다루는 것만큼이나 우아했다. 햇볕에 오래 노출된 듯 까무잡잡한 피부가 새하얗다시피 한 남동생과 비교되었다.
무뚝뚝한 얼굴은 능글거리는 윌터와도, 사근사근하게 구는 루이스와도 결이 달랐다.
“저야말로, 멋진 시합을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인사를 건네자, 여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 모습이 익숙한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눈앞의 여인을 볼 때마다 묘한 기분을 느끼는 건 그래서일까.
아니, 그것만은 아닐지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프란츠 전하.’
클라단에 처음 도착했을 때, 프란츠한테 인사하던 여인의 모습이 이랬다. 프란츠는 언제나와 같은 무덤덤한 얼굴로 화답했다.
‘오랜만입니다, 샤를로테 공녀.’
샤를로테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노파가 넌지시 흘리듯 뱉었던 그 말이 떠올랐다.
샤를로테 케라온. 케라온 공작의 장녀로, 이미 세상을 떠난 공작 부인을 대신해 영지 전반을 관리하는 여인. 알려진 것은 이 정도였다. 설마 병사들까지 이 여인의 관할에 있을 줄은 몰랐지만.
케라온 공작에게는 자식이 셋 있었지만, 윌터 케라온을 제외한 나머지 둘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알려진 게 적었다. 둘 다 리암처럼 영지에 틀어박혀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샤를로테의 검이란, 혹시 이 여인을 뜻하는 걸까.’
샤를로테라는 이름은 흔했지만, 왕국에서 검술을 익힌 여인은 흔하지 않다. 무심코 떠오른 생각을 제라니아는 일단 덮어두었다. 경계를 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아직 아무것도 속단할 수 없었다.
“루이스, 왜 이분이 여기 계시지?”
“비전하께서 시합이 궁금하다고 하셔서요.”
제 머리로 떨어지는 엄격한 목소리에 루이스는 차분히 대답하면서도 책을 꽉 움켜쥐었다. 수십 쌍의 시선이 그에게 쏟아졌다.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한 병사들의 태도에도 루이스는 초연했다.
이미 익숙하다는 듯이.
“…아무래도 좀 시끄럽군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은 샤를로테가 병사들에게로 돌아섰다.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 300회. 끝나면 모래주머니를 손목에 매단 상태로 왼쪽 베기랑 오른쪽 베기 동작 300회. 꾀를 부리는 놈들은 나중에 나와 직접 대련이다!”
“예!”
거칠게 소리친 샤를로테가 멀뚱히 서 있는 제라니아를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십니까.”
“네?”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무심코 거절의 말을 뱉으려던 제라니아는 샤를로테의 눈을 마주하고 멈칫했다. 악의 한 점 없는 투명한 눈동자가 그를 한가득 담고 있었다. 제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말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10분째 조용히 걷기만 하던 제라니아는 힐끔 샤를로테를 돌아보았다. 제 옆에서 절도 있게 걷는 여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목적지를 묻는 질문에, 성을 구경하고 싶다 말했더니 알겠다고 말하며 여인은 휙 돌아 앞장섰다. 그 뒤를 제라니아와 루이스가 따랐고, 리암은 맨 뒤에서 그들을 보호하듯 걸었다.
처음 느낀 인상대로 여인은 말수가 적었고, 무뚝뚝한 기사의 표본 그 자체였다. 예의는 깍듯했지만 제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지도 않았다.
길을 걸어가던 중 병사들 몇이 이쪽을 흘끔거렸지만, 샤를로테와 시선을 마주하고 빠르게 고개를 원위치로 돌렸다.
바래다주겠다는 말은, 저를 호위하겠다는 뜻이었을까.
“저 탑은 다른 건물들이랑 지붕 모양이 다른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그게 기록에 따르면….”
그와 달리 루이스는 재치 있게 말을 늘어놓았다. 이런 일에 관심이 많은지, 그는 조리 있게 성에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들을 하나둘씩 꺼냈다. 연무장에서는 움츠려져 있던 그의 어깨가 공작새처럼 활짝 펴져 있었다.
투쟁의 역사로 얼룩진 일족답게 기사와 전쟁에 관한 일화가 많았다. 그만큼 열렬한 사랑 이야기도 넘쳐났는데, 전쟁터에 연인을 보내야만 하는 경우가 빈번했던 탓이라고 루이스가 덧붙였다.
“전쟁을 치르면 보통 몇 년씩은 잡아먹으니까, 어지간히 감정이 열렬하지 않고서야 돌아왔을 때 상대는 이미 다른 연인을 만든 상태일 때가 많거든요.”
하지만 그런 건 이야기로 남기엔 영 재미가 없으니까요. 가볍게 덧붙이며 루이스는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그래서 한쪽은 무사히 귀환할 것을, 다른 쪽은 정절을 지킬 것을 약속하는 의미로 입맞춤을 나누게 되었죠.”
광주리에 도토리를 챙기듯 루이스가 내놓는 이야기를 하나둘씩 주워 담으며 제라니아는 제 앞에 보이는 거대한 산맥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장엄하게 뻗은 산맥이 성과 도시를 요새처럼 빙 둘러싸고 있었고, 도시의 외곽을 따라 깊게 파여 있는 해자가 저 멀리 보이는 강과 연결되어 흘러갔다.
뒤에는 산, 앞에는 강. 천혜의 요새란 이런 곳을 말하는 거겠지.
제라니아가 산맥과 성 사이에 높게 쌓여 있는 성벽을 의아하게 보자, 샤를로테가 입을 열었다.
“짐승들이 종종 내려오는 경우가 있어서 말입니다.”
산에서 내려온 짐승들이 성에서 키우는 가축들을 물어 가는 경우가 있어, 그걸 막기 위해 쌓아둔 벽이었다.
“물론, 성벽만으로 막을 수 없는 녀석들도 있지만요.”
쭉 뻗은 샤를로테의 손가락을 따라 제라니아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날개를 직선처럼 뻗은 매가 그들이 서 있는 하늘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신기하다는 듯이 목을 빼고 매를 쳐다보는 제라니아의 옆에 선 샤를로테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가죽 보호대를 제 왼손과 팔에 둘렀다. 그 상태로 가볍게 휘파람을 불자, 커다란 갈색의 매가 가죽 보호대를 쓴 샤를로테의 팔에 사뿐히 내려앉아 날개를 접었다.
“와!”
“이 녀석은 예외지만 말입니다.”
귀족들 중 매사냥이 취미인 이들이 상당한 만큼, 제라니아 역시 매를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다만 샤를로테의 팔뚝에 앉아 있는 매는 그가 보았던 매들 중 가장 컸다. 부리부리한 눈동자가 그들을 빤히 응시했다.
루이스는 흠칫, 몸을 떨었고 리암은 별 반응이 없었으나, 제라니아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매를 관찰하듯 살폈다. 겁내는 기색 없이 매를 빤히 바라보는 제라니아에게 샤를로테가 말했다.
“만져 보시겠습니까?”
“그래도 돼요?”
“급하지 않게, 천천히 다가오십시오. 놀라게 하면 안 되니까요.”
제라니아가 샤를로테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가만히 있던 매가 날개를 한 번 푸드덕거렸다. 쫙 펼친 날개에 오밀조밀하게 붙어 있는 깃털들이 무척 예뻤다.
한 걸음이 남은 거리에서 멈춰, 조심히 손을 뻗은 제라니아가 매의 가슴에 손을 댔다. 제법 거칠지만 푹신한 감촉이 손바닥에 감겼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을 즐기는지 매는 얌전히 눈만 깜빡였다.
대담하게 날개를 살살 간질이는 제라니아를 보며 샤를로테가 놀라운 듯 목소리를 내었다.
“겁이 없으시군요.”
“그런 얘기 많이 들어요.”
그렇게 한참 동안 쓰다듬는 손길을 느긋하게 맛본 뒤, 매는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날아가는 매를 아쉽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제라니아의 눈동자가 샤를로테를 지그시 응시했다. 샤를로테는 조금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아, 별건 아니고요.”
가볍게 손사래를 친 제라니아가 웃으며 말했다.
“검술뿐만이 아니라, 재주가 많으시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그런가요? 제가 검술에 크게 조예가 있는 건 아니지만, 보는 내내 감탄만 했는걸요.”
“…….”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윌터 경보다 공녀께서 사용하시는 검술이 더 마음에 들어요. 저 혼자 보기는 아까울 정도로요. 수도에 오신다면 분명 다들 감탄할 텐데.”
그저 순수하게 찬탄했을 뿐인데, 샤를로테의 얼굴에 작은 파장이 일었다. 물끄러미 제라니아를 바라보던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같이 뛰어난 기사가 이런 곳에서 썩고 있다니, 케라온 공작도 아까운 짓을 하는군요,’
“…비슷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샤를로테의 입가에 산들바람과도 닮은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주어가 없었음에도 누구를 떠올리는지 알 수 있었다. 구름처럼 몽글몽글 피어난 생각이 제라니아의 가슴을 살짝 내리눌렀다.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지?
“음, 실례되는 질문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기사 서임식을 받으신 거죠?”
여인이 기사가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므로, 제라니아의 말투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다행히도 샤를로테는 기분 상한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호칭을 실수했네요. 샤를로테 경이라고 불러 드렸어야 하는데.”
“괜찮습니다. 그렇게 부르는 이는 잘 없으니까요.”
무심하게 말하며 보호대를 벗는 샤를로테의 얼굴에 쓸쓸한 눈빛이 스치듯 지나갔다.
제 착각이었을까.
다시금 말이 없어진 샤를로테를 따라 제라니아는 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