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은빛 뱀의 초대장 (1)
“레터스 상단이라고.”
거울 너머로 나타난 티레인의 설명을 들은 프란츠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 뭔가 아시는 게 있습니까?
“내가 알았다기보단, 비가 알아냈지.”
제라니아가 말한 도시들 중에는 아렌타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사건을 벌인 배후의 거점으로 추측하고 기사들을 보낸 장소이기도 했다.
프란츠의 손가락이 습관처럼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렸다.
“하나둘씩 꼬리가 잡히긴 하는군.”
자신을 노린 살수들, 국왕 시해 시도, 낙인, 강력한 결계, 아렌타, 보데로아 후작, 수상쩍은 상단.
그리고 신전.
“신전과 정말, 연관이 없을 것 같나?”
- 아직도 물증은 전혀 없지만…. 동기는 차고 넘치죠. 국왕 폐하께서도 그다지 신전 친화적이지는 않잖습니까.
‘나는 이 나라를 언제까지고 종교 나부랭이들이 휘두르게 둘 생각은 없다.’
자신을 왕세자로 임명하고 난 뒤 국왕은 그렇게 말했다. 자신은 무어라 대답했던가.
‘오랜만에 의견일치를 보는 것 같습니다.’
“소문은 잘 퍼트리고 있겠지.”
- 물론입니다. 슬슬 신전 측에서도 손을 쓰고 있는 것 같지만요.
이미 이렌스에게서 첩자들의 연락 주기가 늦어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만큼, 프란츠는 심드렁히 대답했다.
“분위기를 못 읽는 멍청이들은 아닐 테니, 알아서 몸을 사리겠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티레인이 머리를 긁적였다.
-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할까요?
“그자는 들키지 않게 구속해두고, 그 상단과 신전의 연결고리를 찾아봐라. 이 정도로 아렌타와 얽혀 있다면, 아마 후작과도 연관되어 있겠지. 나오는 게 있다면 바로 보고하도록.”
아버지의 치부를 파내라는 명령에도 티레인은 태연하게 답했다.
- 예, 알겠습니다. 전하!
평범한 거울로 돌아온 물건을 주머니에 갈무리한 뒤, 프란츠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험준한 산맥이 주를 이루는 영지, 클라단의 모습이 내려다보였다. 성이 높은 지대에 자리하고 있어 바깥을 내다보기에 좋았다. 도시인 하우켈 쪽이 아닌 산맥이 내다보이는 방이 배정된 것부터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건 느껴졌지만, 늘 이랬으니 상관없었다.
흙의 알갱이가 크고 평지가 적어 농경도 그렇거니와 목축을 하기에도 적합한 토양이 아닌 만큼, 클라단 영지는 프로모 왕국 시절부터 수렵채집의 비중이 높았다.
산과 숲뿐인 클라단에서 유일하게 넘쳐나는 자원이 있다면 바로 광물이었다. 그들은 광산에서 나오는 철광석을 제련해 무기를 만들어 사냥을 하고, 부족한 자원과 토지를 충족하고자 주변국들을 침략하곤 했다.
덕분에 프로모 왕국에 국경선이 근접해 있던 리하르타넨 공국이나 크레이츠 왕국은 예로부터 그들과 뺏고 뺏기는 치열한 영토전을 벌였다. 언젠가 났을 결말을 제 아버지가 앞당겼을 뿐이었다.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바깥을 내다보던 프란츠의 귓가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종이 가져온 용건을 들은 그가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제롬을 포함해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 몇이 그의 뒤를 따랐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여독은 좀 풀리셨습니까?”
시종에게 안내되어 커다란 방으로 들어가자 가신들을 뒤에 대동한 덩치 큰 중년의 남자가 그를 맞이했다. 천둥을 삼킨 것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손을 내미는 적발의 남자를 프란츠는 무감한 눈으로 응시했다.
“물론입니다.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부드럽게 웃으며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면서도, 푸른 눈은 남자를 탐색하듯 쳐다보았다.
알란 케라온.
클라단 영지를 다스리는 공작이며 옛 프로모 왕국에서도 최고의 무인이라 불리던 남자.
그는 덩치가 제 아버지인 켄드릭보다도 컸다. 온몸이 잘 짜인 근육으로 덮여 있어 제법 나이가 들었음에도 둔해 보이지 않았다. 정석이라 해도 좋을 만큼 전형적인 무인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뇌까지 근육으로 되어 있는 상대는 또 아니어서, 그게 까다로웠다. 외양은 곰을 떠올리게 한다면, 아이작 바이첸과 설전을 벌이면서도 쉽사리 상대의 언변에 휘말리지 않는 모습은 늙은 너구리를 연상시켰다.
“갑자기 시종을 보내고, 무슨 일입니까?”
“사흘 뒤 있을 열병식에 관해 몇 가지 논의드릴 사항이 있어서 전하를 뵙자고 요청했습니다.”
“마침 묻고 싶은 게 있었으니 되었습니다. 보내준 문서를 확인했는데, 2인용 마차가 빠져 있는 것 같더군요. 열병식 당일까지는 준비해줬으면 합니다.”
“2인용 마차라니…. 설마, 비전하께서도 참여하시는 겁니까?”
의외라는 양 알란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프란츠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이 감당할 만한 게 아니라 생각됩니다만.”
그것도 바이첸 공작의 딸이. 뒤에 생략된 단어를 금방 파악한 프란츠가 부드럽게 대꾸했다.
“염려는 감사하지만, 그건 공작이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웃는 얼굴로도 단호하게 선을 긋는 프란츠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물들었다. 사파이어를 떠올리게 하는 선명한 푸른색 위로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알란의 얼굴이 비쳤다.
“그러고 보니, 공녀께서 열병식을 이끌지 않는 건 의외로군요.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이제야 떠올랐다는 양 프란츠가 가볍게 덧붙이자, 알란은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말씀하신 대로 그 아이의 자질은 물론 뛰어나나, 전통이라는 게 있어서 말입니다. 다른 아들놈이 대신할 것 같습니다.”
“윌터 경은 아직 수도에 있습니까?”
“…예, 아무래도 본연의 임무가 있지 않습니까.”
알란의 미간이 살짝 구겨지는 것을 본 프란츠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윌터가 수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기사단에 수를 써둔 보람이 있었다. 그와 제라니아가 다시 마주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했던 일이지만, 공작이 짐작할 수 있게 조처한 건 본보기를 위해서도 있었다.
이쪽에서 반발을 할 수 없을 정도로만.
세력 균형을 생각하면, 아무리 그라도 대놓고 제라니아의 편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바이첸 쪽으로 추가 기울기 시작할 것이 분명했다. 바이첸과 케라온의 아슬아슬한 견제 구도는 아직 유지되어야 했다.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을 때까지는.
“본론으로 들어가죠.”
차분하게 말을 돌리는 프란츠의 얼굴에 견고한 가면이 덧씌워졌다.
* * *
한편, 제라니아는 성의 바깥에 자리한 부드러운 풀밭을 걷고 있었다. 저 아래로 도시 하우켈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도시를 둘러싼 높은 성벽이 경계선을 긋듯 주변을 에워쌌다.
산맥을 계단처럼 깎아 만든 듯한 평지들 위로, 벽돌로 지어진 튼튼한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파이에 선을 긋듯 그 사이사이로 깔끔하게 난 도로, 저 멀리 보이는 성벽 너머로는 울창한 숲이 보였다.
“정말 지세가 험하네.”
이마에 차양을 드리우듯 손을 올리고 도시를 내려다보는 제라니아의 눈이 반짝였다. 뒤에 서 있던 리암이 질린다는 듯이 말했다.
“한 시간이 넘게 그것만 보고 계시는데, 질리지 않으십니까?”
“질릴 리가. 이런 지형구조는 얘기만 들어봤지 처음 보는걸. 흥미롭지 않아? 리암, 저거 봐. 어떻게 저런 평지가 만들어진 걸까?”
“저는 말씀해 주셔도 잘 모릅니다. 그것보다, 비전하께서 혼자 나오신 게 더 의외인데요. 전하께서 서운해하지는 않으십니까?”
“전하께서도 따로 볼일이 있으신 것 같았는데 뭐.”
제라니아는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전하와 함께 있으면 이렇게 시간을 때우기 죄송하니까. 나는 재밌다지만 전하께서는 지루할지도 모르잖아.”
새처럼 조잘거리면서도 도시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제라니아의 귓가에 요란한 함성 소리가 들렸다. 묘한 기시감에 고개를 돌리자 의외의 인물이 눈을 멀뚱히 뜨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로 느슨하게 묶은 진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 단정한 외모를 가진 청년이 두꺼운 책을 품에 안고 있었다. 청년의 입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비전하시군요.”
“루이스 공자.”
케라온 공작의 차남 루이스 케라온이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의 눈이 초승달처럼 곱게 휘어졌다.
“여기서 무엇을 하십니까?”
“…도시를 구경하고 있었어요. 처음 오다 보니 신기해서요.”
윌터의 동생이라기엔 머리카락 색을 제외하면 여러 가지로 닮지 않은 상대였다. 외모도 그렇지만 그 태도도. 은연중에 윌터와 비슷한 느낌이리라 상상했었는데 현실의 그는 무척 사근사근한 청년이었다.
아버지인 바이첸 공작이 케라온 공작과 앙숙인 만큼, 이렇게 말을 섞어보는 건 처음이었다.
“직접 내려가서 구경하시지 않고요? 안내가 필요하시다면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전하.’
“고맙지만 괜찮아요.”
그리고, 묘하게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형과는 달리 순수한 호의에 가까워 보였지만.
고맙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런 호의를 받기엔 가문끼리 사이가 안 좋지 않나?
정중한 거절에 루이스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다시 한번 아까와 같은 함성이 고막을 두들겼다.
“이 소리는….”
청년의 입가에 씁쓰레한 미소가 스쳐갔다.
“기사들이 대련하고 있을 겁니다. 아까 보니, 누님께서 함께 계셔서 그런지 사기가 유독 높더군요.”
“…공녀께서 검을 쓰나요?”
“네. 보러 가시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스를 따라 함성이 들리는 쪽으로 걸어가 성의 모퉁이를 돌자, 저 멀리에 가죽 갑옷을 입은 병사 수십이 한데 뭉쳐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편편한 흙바닥 위에서 기사 둘이 대치하고 있었다. 짧은 잿빛 머리카락의 남자와 붉은 기가 도는 금발을 포니테일로 올려 묶은 여자. 갑옷을 입은 두 사람의 손에 들린 목검이 치열하게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그려냈다.
둘의 체구 차이는 상당했지만, 놀랍게도 우세한 건 여인 쪽이었다. 망설임 없이 빈틈을 공략하는 여인의 몸놀림은 무척 빨랐고, 어쩌다 부딪히더라도 슬쩍 검을 비껴내며 충격을 흘려보냈다.
급소만 노리며 몰아치는 공격에 남자는 점점 집중력이 바닥나고 있는지 움직임이 점점 흐트러졌다. 제 머리로 날아온 검을 막아낸 남자가 옆으로 몸을 틀어 여자의 옆구리를 내리찍으려 했다.
“억!”
남자의 목검이 옆구리에 닿기도 전에 여인의 목검이 남자의 복부를 후려쳤다. 남자가 고통에 잠시 멈칫한 순간 여인이 부드러운 몸짓으로 목검을 휘둘러 남자의 검을 하늘로 세게 쳐냈다.
한쪽 무릎을 꿇고 넘어진 남자의 턱에 우아하게 검 끝을 가져다 대는 여인을 마지막으로, 심판으로 보이는 기사가 여인의 승리를 선언했다. 분한지 눈가가 살짝 붉어진 기사에게 구경하던 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어깨동무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