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63화 (64/171)

제63화. 트라이탄의 마녀 (3)

구름에 가려져 있던 태양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널따란 평원을 자애롭게 내리비췄다.

말들이 히힝, 울음을 터트리며 푸른 초원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갑옷을 입은 기사들 사이로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말을 몰고 있었다.

새까만 말을 타고 있는 금발의 남자와 갈색 말을 탄 여자, 고삐를 쥐고 앞장서는 제라니아의 시야로 초록빛이 쏟아졌다. 저 멀리 지평선에 둘러져 있는 숲과 그 뒤로 흘러가는 하얀 구름,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살짝 어두웠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제라니아의 얼굴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걷어냈다.

자신들이 출발했던 도시가 점처럼 보일 즈음에서야 제라니아는 말을 멈췄다. 가슴을 활짝 펴고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저를 둘러싼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제라니아의 곁으로 프란츠가 말을 몰아 다가왔다.

“달리는 건 그만하기로 한 겁니까?”

기사들은 살짝 뒤로 물러난 채 그들의 뒤에서 대기했다. 프란츠를 돌아보는 제라니아의 얼굴이 무언가를 떨쳐낸 듯 후련해 보였다. 제라니아가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 달리고 싶으세요?”

“당신이 그러고 싶다면 상관없습니다.”

“…저는 전하의 의사를 물은 건데요.”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니까요.”

무심하게 답하는 프란츠의 얼굴을 보던 제라니아의 눈빛이 일순 흐려졌다. 재빨리 감정을 갈무리하는 제라니아에게 프란츠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어제는 잘 다녀왔습니까.”

제라니아가 밤늦게 저택으로 돌아오자, 기다리고 있던 프란츠가 그를 맞이했다. 마음 같아서는 기사를 더 붙여주었을 것이나 클라세아가 제라니아와 리암 외에 다른 사람을 안내할 생각이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한 탓에 단념했다.

“네.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제라니아는 조곤조곤 노파와 만났을 때 알아낸 정보에 관해 설명했다. 다만 마지막에 노파에게서 들었던 검에 대한 이야기만은 제외했다. 괜한 걱정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

왕국에서 샤를로테는 꽤 흔한 이름이었다. 당장 제 유모의 본명도 샤를로테인데, 세상 모든 샤를로테를 경계하며 지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조언을 좌시할 생각은 없었지만 프란츠가 제게 보내는 걱정에 무게를 더하고 싶지 않았다.

이야기를 다 들은 프란츠가 의견을 보탰다.

“결계라면, 대신전이나 왕궁일지도 모르겠군요. 남동쪽 방향이라면 수도 역시 범위에 들어갈 것 같은데.”

“범위를 대충 추산해보긴 했거든요. 그쪽 부근에 도시 몇 개가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제라니아가 생각나는 도시들을 언급하자 프란츠는 조용히 눈만 깜빡였다.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눈빛이 살짝 달라진 그에게 제라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세요, 전하?”

“…아니, 아닙니다.”

아무것도. 재빨리 대답하는 프란츠를 제라니아는 영 미심쩍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무도 없는 주변을 둘러보던 프란츠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괜찮은 발상입니다.”

“네? 뭐가요?”

“이런 탁 트인 곳에서 엿듣는 사람이 있지는 않겠죠.”

눈과 귀가 많은 저택보다야 아무도 없는 바깥이 보안을 생각하면 더 안전했다. 그 대답에 오묘한 표정으로 프란츠를 쳐다보던 제라니아가 입을 열었다.

“아니, 물론 그것도 있지만, 전하와 같이 승마를 하고 싶어서도 있는걸요. 그리고, 좋지 않나요?”

“뭐가 말입니까.”

“이런 넓은 곳에 나 혼자 있는 감각이요.”

제라니아의 시선이 프란츠를 슬쩍 비껴가 지평선을 향해 멀어졌다.

“이 넓은 땅에 비하면 내가 매우 작고 하찮은 존재처럼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고민 같은 게 부질없다, 고 느껴지는 점이 좋아요.”

“고민이 있습니까.”

“있다고 하면, 해결해 주시려고요?”

“할 수 있다면.”

진지하게 말하는 그에게 제라니아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으려다, 멈칫했다.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전하, 아니 프란츠. 나중에 당신이 절망하게 되는 미래가 예정되어 있다고 하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건가요?”

나름대로 어려운 질문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프란츠는 금방 대답을 내놓았다.

“그게 중요합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네?”

멍하게 대꾸하는 제라니아를 보며 프란츠는 차분하게 말했다.

“애초에 질문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것보다는 명확한 조건이 있을 텐데요.”

“어떤….”

“예를 들면 왕위 계승이라든가. 그것을 이루기 위해 그 선택이 필요하다면 할 것이고, 아니라면 고사하겠지요.”

그 판단에 내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말하는 듯한 프란츠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제 귓가에 스며들었다. 몰려오는 한기에 제라니아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바람이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제 가슴을 한바탕 휩쓴 것 같았다. 비틀려 있는 당신의 내피를 엿본 것만 같아서, 심장이 얼음처럼 차가워진다.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제라니아가 겨우 한마디를 뱉었다.

“전에 전하께서 그러신 적이 있었죠. 무엇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내가 당신에게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 것만큼이나, 당신 역시 내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걸.

“지금은 좀, 전하께서 어떤 기분이셨는지 알 것 같아요.”

그 말을 이렇게 체감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그렇다는 겁니다. 당신의 감정을 존중하지 않겠다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태연하던 프란츠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언제나 무심한 당신의 표정이 나 때문에 변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야 하는 걸까, 씁쓸해야 하는 걸까.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전하. 저보다도, 자신의 감정을 소중히 여겨주세요.”

나지막이 고하는 제라니아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한껏 묻어났다. 프란츠는 잠시 침묵했다가 내뱉었다.

“그건, 부탁입니까.”

“네.”

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알겠습니다.”

제라니아는 아직,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 * *

붉은 지붕이 올려져 있는 아담한 이층집 창문 너머로, 밀밭을 떠올리게 하는 짙은 금발의 남자가 부지런히 움직였다. 짐을 꾸리는 건지 이것저것 마구 가방에 쑤셔 넣는 남자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문가에서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남자가 히끅, 딸꾹질을 했다. 기름칠을 안 한 고철처럼 삐걱삐걱 고개를 돌리자, 문가에 덩치 큰 남자가 서 있었다. 발로 문을 차서 연 건지 다리를 내리는 남자가 씩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조슈아 맥켄 씨 되시나요?”

정중한 존대였음에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문 앞을 가로막고 생글생글 웃는 상대를 향해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사람 모르는데요.”

“…….”

“그, 대체 누구십니까.”

“로이라고 합니다.”

티레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가명을 댔다. 가방을 품에 끌어안고 겁먹은 듯 눈만 데굴데굴 굴리던 남자가 큰소리를 쳤다.

“저기요,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면 곤란합니다. 제가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요.”

“실례했습니다. 꼭 맥켄 씨를 뵙고 질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입니다. 듣자 하니 마법을 쓰신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아니, 몇 번을 말합니까. 그런 사람 모른다니까요?!”

티레인이 나갈 기미가 없자 남자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리고 가방을 든 채 출입구에서 정반대에 있는 창문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악!”

무거운 짐을 들고 있어서일까. 어느새 성큼 뛰어온 티레인이 남자가 창문을 넘기 전, 그의 뒷목을 붙잡아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남자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넘어지고, 들고 있던 가방이 열리며 물건들이 쏟아졌다.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가는 남자의 어깨를 꽉 붙잡고 고정한 티레인이 그의 등을 깔고 앉았다. 묵직하게 눌리는 감각에 남자가 컥 숨을 뱉어냈다.

“선택권을 줄까?”

“무, 무슨 선택권이요.”

“순순히 대답할래, 맞고 대답할래.”

“결국 대답하는 거잖아요?!”

“오, 똑똑한걸.”

아까 전과는 달리 깡패 저리 가라고 해도 될 만큼 껄렁한 태도였다. 살짝 손을 비틀어 꺾자 남자가 엄살 섞인 비명을 토해냈다.

“당신이 그렇게 용하다며?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제대로 대답해 줬으면 좋겠어. 형씨, 혹시 마법을 쓰나?”

“그, 그, 그…. 아니, 그게….”

“셋 셀 때까지 대답해. 셋, 둘, 하….”

“아, 아닙니다!”

화들짝 놀라 대답한 남자가 실수했다는 듯 입을 헙 다물었다. 티레인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법을 쓸 줄 안다고?”

“아, 아니요….”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백하는 남자를 보며 티레인은 김이 샌 표정을 했다.

“뭐야, 마법사가 아니었어?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속이고 다녔지? 영애들이 바보도 아닌데.”

명을 받고 간단히 사전조사를 했을 때, 하나같이 의심하는 사람이 없길래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나인가.

“몽혼향을 살짝…. 이게 효과가 끝내 주거든요. 기분도 좋아지고, 정신도 좀 멍해지는 만큼 착란을 일으키기도 쉽죠. 적당히 이야기를 캐낸 다음 조언 좀 덧붙이면 금방 믿는다니까요.”

티레인은 가방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쏟아진 물건들 중, 향으로 보이는 상자 몇 개가 빠져나와 있었다. 반항하면 손목이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걸 눈치챘는지 술술 대답하는 사기꾼에게 그는 온화하게 말했다.

“마약 종류는 나라에서 금지하고 있을 텐데.”

“아, 알죠! 그, 그래서 이제 슬슬 장사 접으려고 했는데….”

“했는데?”

“그게….”

남자는 요즘 들어 특정 상단이 계속 자신을 찾아온다고 말했다. 제가 몽혼향을 사용해 사기를 치고 다닌다는 것까지 파악한 그들은 남자에게 향을 사겠다는 말과 함께 전속을 제의했다.

남자는 돈 욕심은 많을지언정 감이 나쁘지는 않았다. 묘한 불길함에 그는 그 제의를 거절하지만, 상단은 끈질기게 그를 찾아왔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가 저질렀던 사기 행각을 폭로하겠다는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돈도 꽤 모았으니 그냥 도망가자는 생각에 짐을 꾸리던 차, 티레인이 쳐들어온 것이다. 울먹이는 사기꾼의 입에서 나온 상단의 이름을 들은 티레인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레터스 상단이라고?”

방울이 그려진 깃발을 휘날리던 상단의 모습을 떠올리며 티레인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왕국에서도 제법 큰 상단이 왜 이런 사기꾼을 찾아왔는가. 향은 어디다 쓰려고? 곰곰이 생각하던 티레인의 머릿속에 등불에 불이 붙듯 떠오르는 사실이 있었다.

가만, 얘네 분명 아렌타에도 지점을 두지 않았던가.

남자를 곧장 밖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에게 넘긴 뒤, 밖으로 나온 티레인은 거울을 꺼내 들었다. 거울 너머로 보이는 주군의 얼굴을 보자마자 티레인은 안부를 전하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전하,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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