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62화 (63/171)

제62화. 트라이탄의 마녀 (2)

“오랜만의 손님이군.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왔나?”

클라세아는 대답 대신 망토의 후드를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호롱불에 비치는 그의 얼굴을 본 노파가 가래 낀 웃음을 터트렸다.

“이게 누구야, 비겁하게 숙명에서 도망친 겁쟁이 아닌가.”

“…오고 싶어 온 게 아닙니다. 볼일을 다 보면 밖으로 나오십시오.”

냉랭하게 답하고, 제 곁을 스쳐 밖으로 나가는 클라세아를 뒤로한 채 제라니아는 노파의 앞으로 가 마련되어 있는 낡은 의자에 앉았다. 리암이 그 뒤로 가 뒷짐을 지고 섰다.

“그 계집애, 어디로 갔나 했더니 이렇게 소식을 들려줄 줄이야.”

인생이란 이래서 재미있다고 낄낄거리며 웃는 노파를 향해 제라니아는 조심스럽게 일라테어로 말을 꺼냈다.

“저, 의뢰를 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폴릭시나 씨가 맞으실까요?”

“맞소.”

트라이탄의 마법사들은 두 개의 이름을 가진다. 태어났을 때는 부모에게서, 능력을 각성할 때는 본인의 숙명을 닮은 이름을 갖게 된다. 별의 이름을 부여받은 여인이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수정구에 비친 제라니아의 얼굴을 힐끔 쳐다본 폴릭시나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말려 올라갔다.

“무엇을 찾고자 하는가?”

“이 낙인에 대해 조사하고 있습니다.”

제라니아는 한 장의 종이와 함께 붉은 액체가 담긴 병을 품에서 꺼내 내밀었다. 섬세하게 그려져 있는 문양을 말없이 들여다보던 폴릭시나가 입을 열었다.

“준비가 철저하군. 병에 든 건 그 소년의 피인가?”

“네. 이 낙인이 새겨진 이의 피…. …어떻게 아셨나요?”

“클라세아한테 설명을 들었을 텐데?”

수정구에 손을 올리는 노파의 목소리가 경박하게 울렸다. 탐색하듯 자신을 살피는 시선에도 제라니아는 꼿꼿이 등을 펴고 그를 마주 보았다.

“말씨가 딱 봐도 귀족 나리 같은데, 낙인을 만든 이를 찾고 있는 거겠지?”

“그것도 있지만, 관련된 정보는 모두 다요. 알고 계신 게 있으신가요?”

“글쎄. 적어도 왕국 놈들보다야 잘 알겠지.”

제라니아는 묵직한 돈주머니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폴릭시나가 픽 웃었다.

“과연, 통이 크구만.”

낙인이 그려진 종이를 수정구 옆에 펼쳐둔 채 폴릭시나는 조수로 보이는 여인에게 가만히 손짓했다. 여인이 두 개의 방문 중 하나를 열고 들어가 물이 담긴 그릇과 통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어디 보자….”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것을 구경하는 둘의 앞에서 폴릭시나는 통에 든 작은 가루를 물에 뿌렸다. 작은 나이프로 제 손가락에 피를 낸 그가 피 몇 방울을 물속에 뿌린 뒤, 제라니아가 가져온 붉은 병을 집어 들었다.

노파가 병을 기울여 핏방울을 수면에 떨어뜨리고, 무어라 주문을 외웠다. 서로 간에 뭉치기 시작한 핏방울들이 곧 그릇 속에서 확 펼쳐졌다. 제가 가져온 낙인과 똑같은 문양이 피로 그려지는 것을 보고 제라니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때, 낙인이 조금씩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릇이 떨리는 것을 본 폴릭시나의 주름진 손이 그것을 꽉 붙잡았다.

눈을 부릅뜨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리는 노파의 음성이 오두막 안을 음산하게 울렸다. 마치 머릿속을 헤집는 것처럼 직접적으로 닿는 목소리에 두 사람은 귀를 틀어막았다. 그릇이 닿은 테이블의 진동이 점점 커져갔다.

그러다가, 모든 것이 멈췄다.

제라니아는 힐끔 물이 담긴 그릇에 시선을 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문양을 그려내던 핏방울들이 불규칙적으로 흩어져 있었다. 수면을 지그시 들여다보고 있던 폴릭시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꽤 골치 아픈 상대를 적으로 둔 모양인데, 아가씨.”

“네?”

“여기서 남동쪽 방향으로 기운이 느껴지는데, 강력한 힘이 추적을 막아서고 있네.”

“남동쪽 방향이요?”

“그래.”

옆으로 그릇을 치운 폴릭시나가 수정구에 시선을 두었다. 노파의 회색 눈동자가 안개가 낀 듯 흐리멍덩해졌다. 제라니아는 그를 따라 수정구를 쳐다보았으나, 불투명한 수정구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낙인이 뭔지 아나, 아가씨?”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제라니아는 차분히 대답했다.

“잘 모릅니다.”

“낙인이란 강력한 예속을 의미해. 피로써 맺는 계약인 만큼 술자와 그걸 맺은 이의 거리는 무척 가깝지. 그런 만큼 낙인이 새겨진 이의 피에는 술자에 관한 꽤 많은 정보가 들어 있네. 여기까지는 알고 있겠지?”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알기에 피를 뽑아 온 거였으니.

“근데 묘할 정도로 정보가 흐릿해. 이건 아마, 이미 술자의 피에 여러 마력이 섞여 있어서겠지.”

자기 몸에 다른 사람의 마력을 이식했거나, 술자 역시 낙인의 피해자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폴릭시나는 거기까지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남은 건 피에 깃든 술자의 마력을 추적하는 것뿐인데…. 이것조차 강력한 무언가가 막아서고 있군. 짐작이지만, 결계의 일종이 아닐까 싶은데.”

“결계요?”

“그래. 내 힘을 막아설 정도라면 어지간히 강력한 마법사거나, 여럿의 마력이 중첩되어 있거나. 거리가 가깝다면 몰라도 추적 대상이 상당히 먼 곳에 있기도 하고.”

“어느 정도로 먼지 가늠할 수 있을까요?”

“그 정도는 가능하지. 대충 이 정도.”

설명을 들은 제라니아의 머릿속에 왕국의 지도가 떠올랐다.

“…그럼 추적은 영영 불가능한 건가요?”

“정공법으로는 아무래도.”

그러니 편법을 써야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폴릭시나는 수정구를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공기가 무거워지는 느낌과 함께 노파의 눈동자에 금빛이 스며들었다. 순식간에 돌변한 분위기에 제라니아는 살짝 마른침을 삼켰다.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려 말을 자아냈다.

“동쪽으로 가면…. 얼굴 없는 이들이 모여 기묘한 모임을 갖지. 사방에…. 향이 진동하는군. 교활한 뱀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먹잇감들을 기다리고 있어.”

분명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인데도, 마치 다른 세계의 언어를 듣는 것처럼 이질감을 자아냈다. 노파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할 때 제라니아는 제 팔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꼭, 봐서는 안 될 무언가를 마주한 것처럼.

“그게, 무슨 뜻이죠?”

제 몸을 짓누르는 위압감을 떨쳐내고 제라니아는 조용히 입술을 달싹거렸다. 질문으로 대답하는 폴릭시나의 분위기가 방금 전보다 가벼워졌다.

“그걸 해석하는 게 아가씨의 몫 아니겠나?”

“아니, 그게 무슨 돌팔이 같은 소리야?!”

어이가 없었는지 리암이 기어코 말을 내뱉었지만, 노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제라니아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을 꺼냈다.

“낙인을 해지할 수는 없는 건가요?”

“방법이야 찾으면 있겠지. 허나 낙인이라는 걸 만든 놈들은 해주 방법을 만들지 않았다고 들었네.”

“…독을 만들 때는, 해독약을 같이 만드는 법이잖아요.”

“보통이라면 그렇겠지만, 풀 방법이 있어봐야 본인들에게 손해니까 말이야. 결국 답은 현재로서는 하나뿐이지. 술자를 죽이는 것.”

“…….”

제라니아는 말없이 폴릭시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세월의 흐름을 맞은 노파의 얼굴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현명한 것 같으면서도 초연했고, 어딘지 지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행의 끝을 맞이하는 방랑자처럼.

금색 눈동자로 그를 마주하던 폴릭시나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가씨는 욕심이 많군.”

“네?”

“포부가 무척 커. 그러니 만족하지 못할 수밖에. 아가씨를 담기에 그릇이 너무 작아.”

“…….”

“아가씨가 호수라고 치면, 호수를 이 작은 그릇에 담아둔 거나 다름없으니 말이야.”

물이 담긴 그릇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폴릭시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한 가지 충고하지. 벌어지는 모든 일을 해결하고자 하지 마시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모든 건 순리대로 흘러가기 마련이니.”

찬란하던 왕국이 멸망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노파는 그 이야기까지 덧붙이지는 않았다. 제라니아 역시 무언가를 묻기보다는 가만히 침묵했다. 조용하게 맴도는 적막 끝에, 노파는 짧게 비소를 터트렸다.

“몰락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과거에 머물게 될 뿐이지. 당신도 날 미쳤다고 생각하나?”

제라니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

“하지만 그렇더라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거예요.”

“멸망을 피할 수 없다고 해도? 끝이 예정되어 있다고 해도 말인가.”

냉소를 머금은 노파의 눈빛에도 제라니아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삶이란 그런 거잖아요.”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고 해도, 그 과정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막을 수 없는 일들이 다가올 걸세. 아가씨 역시도 분명 절망하게 되겠지.”

제라니아는 쓰게 웃었다. 최근 들어 떠오른 여러 가지 고민들이 다시금 튀어나와 그를 심란하게 했다. 대답은 금세 나왔다.

“그래도 멈춰 서고 싶지 않아요. 절망 속에서도 나아가는 게 인간이잖아요.”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그런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애초에 평탄하기만 한 삶은 없으니까요. 그렇게 보이는 삶이 있다면,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거나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뿐이겠죠.”

의문을 갖지 않는다면 지금보다는 마음이 편할까. 제게 주어진 것들에 만족하고 순응하면 모든 게 괜찮은 걸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외면하고 회피하려 했지만 결국 이렇게 돌아오지 않았나.

“아무리 괴로워질지라도,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견뎌낼 겁니다.”

시련만 있는 삶은 없으니까. 시련이 지나가면, 행복해지는 순간이 찾아올 테니.

폴릭시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뭐라고 하기 전,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니, 듣자 듣자 하니까 할망구.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멸망이니 몰락이니, 재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고 말이야.”

제라니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후드를 쓴 채 심기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는 리암을 향해 폴릭시나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애송이가 입만 살았구나.”

어디 보자, 리암을 올려다보며 가벼운 투로 중얼거리는 노파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건강하게는 보이는데, 명줄이 생각보다 길지는 않구나. 미래에 자식 때문에 속 좀 썩겠어.”

대놓고 악담을 내놓는 노파를 보며 리암은 입을 떡 벌렸다. 리암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제라니아를 돌아본 노파가 눈매를 휘어 웃었다.

“그에 비하면 아가씨는 꽤 재미있군.”

힐끗 시선을 옮겨 수정구를 들여다보는 노파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은은한 불빛이 폴릭시나의 주름진 얼굴을 부옇게 비췄다.

“아가씨, 샤를로테의 검을 조심하게. 그것만 피한다면 아가씨는 꽤 오래 살 거야.”

속삭이듯 말하는 음성이 깃털처럼 부드럽게 제라니아의 귓가를 쓸고 지나갔다. 제라니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조금 더 묻고 싶었지만, 누설해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꺼낸 것처럼 조심스러운 노파의 태도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팔짱을 낀 채 조용해진 폴릭시나를 보며 제라니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석상처럼 자리에 앉아 있는 폴릭시나와 시선을 마주한 채로 제라니아가 말했다.

“조언해주신 건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운명 같은 거 안 믿어서요.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이는 제라니아를 바라보던 노파가 웃기 시작했다. 배를 잡고 웃는 노파를 보며 조수가 놀란 얼굴을 했다. 웃음이 사그라진 뒤에야 노파가 제 눈가를 훔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당신은….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인가요?”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는 사람이지.”

뭐라 더 말하려는 듯 입을 여는 제라니아를 향해 노파는 손을 내저었다.

믿지 않는다면 그것대로 더 나은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어서 가게. 돌아보지 말고.”

중얼거리는 노파의 얼굴이 폭삭 늙은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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