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61화 (62/171)
  • 제61화. 트라이탄의 마녀 (1)

    저 멀리 초록색이 물결쳤다.

    북쪽으로 한참을 달려가면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산맥과 그 밑을 접시처럼 받치고 있는 넓은 평원이 보인다. 시원한 바람이 숲속을 앞장서 말을 달리는 기사들의 투구와 갑옷 사이로 스며들었다.

    트라이탄 영지.

    이제는 왕국령으로 편입된 옛 카르멘 왕국의 영토였다.

    남부의 일부 영토를 제외하면 농사를 짓기 적합한 토양이 아닌지라, 자연히 농사보다는 목축이 발달했으며 사냥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 많았다. 11월이 훌쩍 넘어간 탓인지 서늘해진 공기가 코끝을 따끔하게 찔렀다.

    동쪽의 클라단과 같이 자치권을 가진 만큼, 트라이탄에서는 왕국의 법보다는 현지의 법이 더 우선되었다.

    트라이탄에는 신비한 힘을 가진 마법사들이 거주했다. 고유의 종교를 섬기며 카르멘 왕국과 공생하던 마법사들은 전쟁 직후, 신전의 법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고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자치권은 마법사들에게 훌륭한 방패가 되어주는 동시에, 그들을 가두는 울타리로 작용했다.

    “오랜만에 봐도 멋진 풍경이에요.”

    마차에 앉아, 제라니아는 작은 창문에 기대어 탁 트인 초원을 내다보았다. 마차의 양옆을 호위하듯 달리는 말들이 신이 난 듯 히힝 울음을 터트렸다.

    “왕국에 이만한 평원지대가 없긴 합니다.”

    맞은편에서 그런 제라니아를 바라보고 있던 프란츠가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둘 다 이 시기의 트라이탄을 대비해 수도에서보다 두껍게 껴입은 차림새였다.

    “그러고 보면, 휴스타인가와 친하니 자주 왔겠군요.”

    “자주는 아니고, 몇 번 정도였어요. 아무래도 거리가 꽤 되잖아요.”

    남쪽에 자리한 데브론에서 북쪽에 있는 트라이탄까지는 마차로만 나흘이 넘게 걸렸다.

    “사실, 처음 봤을 땐 깜짝 놀랐어요.”

    엄청 넓어서. 가볍게 부연하는 목소리가 그들이 탄 마차의 바퀴처럼 경쾌하게 굴러갔다.

    “이렇게 보는 것도 좋지만, 말을 타고 달릴 때가 제일 기분 좋아요. 속이 시원해지더라고요.”

    “승마를 할 줄 압니까?”

    “네. 여기 와서 배웠어요.”

    프란츠는 가만히 제라니아가 말을 모는 모습을 상상했다. 안 어울리는 듯하면서도 어울렸다.

    회색빛 하늘을 배경으로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마차에 부딪히는 바람 소리, 말 울음소리가 그들의 대화 사이로 섞여들었다.

    “이번에는 시찰 기간을 포함해 사흘쯤 머문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왕국에서 가장 서늘한 기후를 자랑하는 만큼, 트라이탄은 여름이 짧고 겨울이 길었다. 더 추워지기 전에 길을 떠나는 게 여러모로 효율적이었다.

    그럼에도 사흘이나 시간을 낸 건,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서도 있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럼 같이 승마라도 하실래요?”

    제라니아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프란츠를 바라보았다. 프란츠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재미있겠군요.”

    * * *

    “어서 오십시오, 전하.”

    섬세한 생김새를 자랑하는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반듯한 눈빛을 한 중년의 남성과 그 옆에 서 있는 앳된 얼굴의 소년이 그들을 맞이했다.

    영지의 주인인 아론 휴스타인 공작과 그의 막내아들인 네이선이었다. 그들은 갈색 천 위로 화려한 자수가 놓여 있고, 색색의 실을 꼬아 소매와 허리를 장식한 이 지역 특유의 전통복을 입고 있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환대해 주어서 고맙소, 공작.”

    내밀어진 손을 붙잡고 가볍게 악수를 한 프란츠가 아론과 시선을 교환했다. 대화를 나누며 걷기 시작하는 두 사람을 제라니아는 조용히 따라갔다.

    도착하자마자 정해져 있던 일정들을 소화하니 순식간에 날이 어두워졌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태양이 거대한 산맥에 잡아먹히며 보랏빛 흔적을 흩뿌렸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제라니아는 리암과 함께 제가 머무는 방 근처에 마련되어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언질을 받고 미리 와 있던 네이선이 제라니아를 맞이하며 밝게 웃었다.

    “오랜만이야, 네이선. 잘 지냈어?”

    “나야 당연히 잘 지냈…. 흠흠, 잘 지냈습니다.”

    아버지한테 주의를 들었는지 존댓말을 고수하는 네이선의 머리를 제라니아의 손이 가볍게 쓰다듬었다. 진갈색 고수머리가 하얀 손가락 사이로 마구 뒤엉켰다.

    “아, 하지 마!”

    습관적으로 반말을 꺼내던 네이선이 헙 입을 다물고, 제라니아의 뒤에 선 리암에게 시선을 보냈다. 석상처럼 말없이 서 있는 리암 대신 제라니아가 웃으며 손짓했다.

    “편하게 말해도 돼.”

    “눈치가 보이는데요.”

    내키지 않아 보이는 네이선의 얼굴에 제라니아는 더는 권유하지 않았다. 조금 뒤 문이 열리고, 쟁반을 든 하녀가 안으로 들어와 음식들을 내려놓았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담은 커다란 잔과 하얀 고체형의 과자가 담겨 있는 접시가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고소한 우유를 한 모금 마시자, 부드럽게 목으로 넘어가며 금방 몸이 따뜻해졌다.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눈 뒤 제라니아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시찰을 오기로 했을 때부터 생각했던 일이었고, 이걸 위해 사흘의 시간을 냈다.

    과자를 와그작 씹어 먹던 네이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데요?”

    “일단,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기로 약속해줘.”

    “가문에 해가 되는 일이 아니라면 그러겠습니다.”

    “물론이지.”

    제라니아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마법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해.”

    같은 자치령이라도 클라단과 트라이탄은 그 사정이 무척 달랐다. 클라단에서는 마법사들을 대놓고 배척한다면, 트라이탄을 다스리는 휴스타인가는 마법사들과 친화적인 가문으로 유명했다.

    그들은 암살의 배후를 찾기 위해 낙인을 추적하려 했으나, 그에 관해서는 신관들 역시 제대로 알지 못했다. 신전이 아니라면, 왕국 내에서 마법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트라이탄에 살고 있는 마법사들과 접촉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왕국령이라고는 해도, 트라이탄 바깥에서 온 이들은 어쨌거나 외지인에 가까웠다. 어쩌다 그들을 찾아낸다 해도, 경계심 많은 마법사들이 무작정 찾아간다고 도움을 줄 리 없었다. 그러니 조력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수도에 주로 머무는 크리스토퍼와 셀리나, 루크와 달리 네이선은 영지에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자신이라도 영지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의 발로였지만, 그만큼 트라이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마법사를 찾고 있다는 뜻인가요?”

    “아무래도 그렇지.”

    “그건 갑자기 왜요?”

    “정보가 필요한 일이 있어서. 사례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할게.”

    잠시 고민하던 네이선은 고개를 저었다.

    “부탁은 들어드리겠지만, 사례는 됐습니다.”

    “왜?”

    “비전하한테 그런 걸 받았다간 제가 큰형님한테 혼나서요.”

    네이선은 품에서 종을 꺼내 울렸다.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로브를 닮은 긴 치마를 입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나 조용하게 왔는지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부르셨습니까, 도련님.”

    트라이탄의 고유어인 일라테어의 딱딱한 발음이 여인을 한층 더 무뚝뚝하게 보이게 했다.

    “안녕, 클라세아.”

    살갑게 그를 부른 네이선은 짤막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마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찾는다는 말에 클라세아라고 불린 여인이 놀란 얼굴을 했다. 아무런 대답 없이 제라니아와 리암을 힐끔거리는 하녀에게 네이선이 손사래를 쳤다.

    “믿을 만한 사람들이야. 내가 보증할게.”

    “…능력만 좋으면 되는 겁니까?”

    그제야 입을 열고 진지하게 묻는 클라세아를 보며 네이선이 짧게 침음했다. 가만히 앉아 있던 제라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래?”

    “그게, 마법사들이란 하나같이….”

    성격이 괴팍하거든. 차마 그 말을 마법사인 클라세아의 앞에서 할 수는 없었는지라 네이선은 말을 얼버무렸다.

    “흠흠, 능력이 좋은 사람이면 될까요?”

    “응. 성격은 상관없지만, 마법 쪽 지식이 풍부하고 돈으로 해결 가능한 상대였으면 좋겠어.”

    바로 맥락을 알아들은 제라니아가 눈치껏 요청하자,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클라세아가 입을 열었다.

    “그러시다면, 알맞은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 * *

    칠흑 같은 밤이 내려앉은 산의 풍광이 으스스했다. 차가운 밤공기가 은은한 빛을 내며 박차를 가하는 말들의 다리를 휘감았다.

    스산한 밤을 타고 말발굽 소리가 요란스레 흙을 짓밟았다. 세 필의 말들이 새까만 후드를 뒤집어쓴 이들을 등에 태우고 앞으로 나아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거리낌 없이 달려가는 이들의 망토자락이 바람을 따라 펄럭였다.

    ‘몰렌 산맥의 깊숙한 곳에, 마법사가 하나 살고 있습니다.’

    클라세아는 그렇게 운을 떼었다.

    ‘트라이탄에 있는 마법사라면 누구나 선망하고 질투하며, 두려워하는 상대죠.’

    ‘그렇게 뛰어난가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살아남은 마법사들 중 유일하게 사는 곳을 자주 바꾸지 않는 이이기도 합니다.’

    지형이 꽤 험한 곳에 거처를 두고 있는 데다 결계를 몇 겹으로 둘러둔 만큼 아무나 찾아갈 수도 없다고, 클라세아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큼 성미가 괴팍하기로도 유명하죠. 친절하지도 않습니다.’

    ‘에이, 마법사들은 원래 친절과는 거리가 멀잖아.’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클라세아가 정색하자 네이선은 말없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제 눈치를 보는 고용주를 뒤로한 채 클라세아는 진지하게 말했다.

    ‘농담이 아니라, 미쳤다는 말이 돌 정도니까요.’

    정 안 되면 다른 이를 소개하겠다는 말을 덧붙이며 클라세아는 제라니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덤덤한 얼굴과 달리 불꽃을 담은 듯한 새붉은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나무들이 빽빽한, 막다른 길에 다다르자 앞서가던 이가 말고삐를 세게 잡아당겼다. 앞발을 높이 올린 말이 그 자리에 멈추고, 뒤를 따라오던 두 사람 역시 고삐를 잡았다.

    “도착한 것 같습니다.”

    딱딱한 목소리와 함께 로브를 입은 이가 말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했다.

    “이거 정말 괜찮을까?”

    클라세아를 따라 말에서 훌쩍 내려온 리암이 걱정스레 제라니아를 돌아보았다. 이미 바닥에 내려선 제라니아가 말의 갈기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능력은 확실하다잖아. 해를 끼칠 상대도 아니라고 하고.”

    “아니, 그렇지만….”

    무어라 더 말하려던 리암은 입을 다물었다.

    말들을 나무에 묶어놓은 뒤 제라니아와 리암은 클라세아의 뒤에 섰다. 클라세아의 손에서부터 새하얀 진이 펼쳐지며 나무들의 모습이 일그러지고, 곧 제법 한산한 숲의 모습이 드러났다.

    찢어진 공간을 넘어 앞장서는 클라세아를 바지런히 쫓아가자, 오두막 한 채가 나타났다. 클라세아는 나무로 만들어진 낡은 집의 대문을 성의 없이 두드렸다. 안에서 작게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폴릭시나를 만나러 왔다.”

    한참 뒤, 문이 열리고 등불을 든 젊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사람이 폴릭시나인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여인은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안에 계십니다.”

    오두막 안은 꽤나 단출했다. 살림살이가 거의 없어 유독 휑해 보이는 거실의 왼쪽 벽에 문 두 개가 붙어 있었다. 빛바랜 자주색 천이 깔려 있는 테이블 위로 수정구와 몇 개의 나무 막대, 화르르 타오르는 등불이 자리했다.

    그 앞에 앉아, 성의 없는 손길로 막대를 건드리던 노파가 고개를 들어 일행을 쳐다보았다. 제법 나이를 먹었는지 쪼글쪼글한 피부와 걸걸한 목소리, 늑대를 떠올리게 하는 강렬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