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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60화 (61/171)
  • 제60화. 변화의 바람 (6)

    “가문의 일이라는 말씀을 하시기엔…. 각하와 리암의 문제에 제가 끼어 있었던 게 한두 번인가요.”

    성에 올 때마다 꼭 둘이 싸우는 모습을 목격하고, 리암이나 공작을 살살 달래서 화해하게 만드는 건 언제나 제 역할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묵인하지 않으셨던가.

    그 부분을 지적하자 유리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의 귓불이 갓 익은 사과처럼 살짝 붉어졌다.

    “두 사람을 반대하는 이유가 있나요?”

    “차이가 나도 너무 나지 않습니까.”

    “…….”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고, 가진 것도 하나 없는 데다 몸까지 약합니다. 하나뿐인 아들의 짝으로 눈에 차는 상대는 아니지요.”

    잠자코 듣고 있는 제라니아에게 유리는 조용히 덧붙였다.

    “그래도 주제파악은 할 줄 아는 것 같았습니다. 돈을 좀 쥐여줬더니 바로 알겠다며 고개를 숙이더군요.”

    제라니아는 말없이 공작과 여인의 대면을 상상해 보았다. 분명, 여인에게는 다분히 모욕적인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나 지금은 그걸 지적할 때가 아니었다.

    유리 그라시아는 단단한 쇠와 같은 인물이었다. 우직하고 강하며, 그러면서도 불같은 성미를 가진. 무작정 두들기는 방식이 먹히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리암은 공작 각하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해요. 각하께서 단 한 명의 부인만을 두셨던 것처럼요.”

    조곤조곤한 음성이 흘러가는 물처럼 부드러웠다. 제라니아는 웃으며 정곡을 찔렀다.

    “그래서 그 둘을 떼어놓으려고 하신 거죠?”

    “…….”

    “리암이 그 사람만 볼까 봐. 그 연약한 여인이 후계자를 낳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서 말이에요.”

    결혼하고도 첩이나 정부를 두는 것이 당연시되는 귀족 사회의 일원임에도, 유리 그라시아는 죽은 부인만을 곁에 두었던 사람이었다. 사교계에서는 드물게도 연애결혼을 했던 만큼 그는 제 아내를 끔찍이도 아꼈다.

    귀족이라면 누구나 제 후손을 남기는 것을 중시한다. 재취도 하지 않고 오로지 리암 하나만을 후계자로 키운 것부터가 공작의 집념을 보여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경우가 다릅니다. 헤스티아는 번듯한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사고가 아니었다면 쭉 살아 있었을 테지요.”

    “…….”

    “그 아이는 그저, 치기 어린 감정에 휘둘리고 있는 것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잊어버리게 될 겁니다.”

    회색이 섞여든 푸른 눈동자에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여인의 얼굴이 비쳤다. 제라니아는 덤덤하게 한 마디를 던졌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

    대답하지 못하는 유리에게 그는 쐐기를 박았다.

    “단언컨대, 리암은 절대 포기 안 할 거예요. 어중간한 마음이었다면, 각하께 이 정도로 반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매사 투덜거리지만 리암은 진심으로 제 아버지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낯가림이 가출을 막아준 게 아니냐고 농담처럼 말하지만, 그 성격에 정말 공작을 싫어했다면 진작 집을 나가고도 남았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냥 이 기회를 활용하시는 게 더 좋지 않겠어요?”

    “기회?”

    “네, 기회.”

    제라니아가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여인을 찾아주는 대가로, 저는 리암에게 제 호위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어요. 그는 곧장 제안을 수락했고요. 서임식조차 미루고 미루던 걸 생각하면 참 장족의 발전이지 않나요.”

    “…….”

    “리암이 후계자로서 책임감을 가지는 것, 공작 각하께서 가장 바라 마지않는 일이잖아요?”

    살짝 굳는 유리의 표정을 제라니아는 놓치지 않았다. 여인과의 사이를 허락하는 대신, 그걸 이용해 리암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라는 은근한 권유를 유리는 냉정하게 받아쳤다.

    “궤변이시군요. 아무런 기반이 없는 상대를 데려다 무엇에 쓰겠습니까. 세간의 웃음거리만 될 테지요.”

    “그런가요? 반드시 상대의 집안이 필요할 만큼, 그라시아 공작가의 위상이 부족하지는 않다 생각하는데.”

    “굳이 자갈밭을 걸을 필요는 없습니다.”

    “신발이 튼튼한데 무엇이 걱정일까요.”

    공작은 하나뿐인 아들에게 좋은 것만을 주고 싶어 했다. 리암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당기기는커녕 밀어낼 줄밖에 모르는 고집불통 둘이 맞붙으니 문제가 풀릴 턱이 없었다. 중간에서 조율하는 사람이 없다면 말이다.

    “자식이 길을 엇나가려 하는 걸 방치하란 말입니까.”

    “그렇게 말하기엔…. 리암은 이미 성인이잖아요. 어디든 자유로이 갈 수 있고, 충분히 자신의 인생을 판단할 수 있는 나이죠.”

    지금의 대화는 마치 곡을 연주하는 것과 같았다. 절정으로 달려가듯 몰아치던 대화의 결을 살며시 느슨하게 바꾸며, 제라니아는 달래듯이 부드러운 음성을 내었다.

    “그리고, 리암의 성격을 아시잖아요. 강제로 궤도를 바꾸려고 하신다면 아예 이탈할 성격이라는 거.”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다는 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분히 중의적인 의미를 함축한 말에 유리의 미간에 줄이 그어졌지만, 제라니아는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리암을 다그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에게 찾아가신 거고요. 걱정하셨던 거죠? 리암이 그 사람을 데리고 사랑의 도피라도 할까 봐 말이에요.”

    물론 리암은 진짜 그러고도 남을 성격이긴 했다. 맞은편에 앉은 유리의 얼굴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떨떠름했다.

    “각하께서 말씀하셨듯 정말 한때의 마음일 뿐이라면, 이후에는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죠. 각하의 말을 들을걸, 하고 후회할지도 모르고요.”

    “…….”

    “그래도 자기 인생이니, 알아서 잘 하리라 생각해요. 각하께서 가르치셨던 대로요.”

    느릿하게 흘러가는 침묵 속에서, 말없이 생각에 잠긴 유리를 제라니아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비전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고집스레 다물린 입과 달리 유리의 눈빛은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확답을 건넨 건 아니었지만 그 눈만으로도 충분히 답이 되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제라니아는 여상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유리는 가만히 제 턱을 매만졌다.

    “한 가지만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왜 제 아들의 편을 드시는 겁니까. 바이첸 공작조차 나서지 않은 일인데.”

    잘되어도 당장 떨어지는 이득은 없고, 틀어진다면 자신과 척을 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 인과관계를 눈앞의 상대가 모를 리 없었다.

    “비전하가 짊어지고 있는 이름들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이 시기에 굳이 이렇게 나설 필요가 있습니까?”

    부드러운 음성이 대답을 내놓았다.

    “이유라면 여러 가지가 있겠죠. 사적으로는 오랜 친우의 행복을 위해서기도 하고, 공적으로는 미래를 위해 투자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건….”

    잠깐의 간격을 두고, 제라니아는 자신 있게 말했다.

    “각하를 설득할 자신이 있었으니까요.”

    “허.”

    기가 막힌 듯 숨을 삼키는 유리를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가 생기롭게 반짝였다. 질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성숙한 얼굴 위로 체스판을 앞에 두고 눈을 빛내던 앳된 얼굴이 겹쳐졌다.

    제라니아는 성에 올 때마다 그와 체스를 두곤 했고, 그때부터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었다. 말갛고 보드라운 얼굴과 달리 날카로우면서도 과감한 수를 두는 아이의 전략에 그는 말없이 감탄하곤 했다.

    그 어리던 아이가 벌써 이만큼 컸는가.

    “무엇보다, 저는 이제 왕세자 전하의 사람이니까요. 그러니 제가 받을 것은 무엇이든 마땅히, 모두 다 그분의 것이지요.”

    그것이 배척이든 지지든 간에. 생략된 말을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았다. 가문과 명확하게 선을 그으면서도 왕세자에게로 공을 돌리는 그 처세에 유리는 조용히 감탄했다.

    “그 여인을 찾으셨습니까.”

    제라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에요. 그렇지만 곧 찾을 겁니다.”

    “쉽지 않을 텐데요.”

    “사람이 쉬운 길만 걸어갈 수는 없으니까요.”

    “확정되지도 않은 미래의 이야기를 굳이 지금 꺼내신 이유가 있습니까?”

    제 심기를 건드리는 걸 감수하기까지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꺼낸 저의가 뭘까. 나중에 생각해도 될 문제일 텐데.

    제라니아는 싱긋 웃었다.

    “그거야, 억울하잖아요.”

    “……?”

    “다들 고생하는 와중에 공작 각하 혼자 신나하시는 게 억울해서요.”

    태연하게 말을 늘어놓는 제라니아를 보며 유리는 간만에 말문이 막혔다. 아이작이 사람을 골탕 먹일 때 꼭 저렇게 웃던데, 정말이지 피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사실 해코지를 걱정하진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했다.

    “리암이 제 곁에 있는 한, 각하께서 절 위험에 처하게 두실 리가 없으니까요.”

    부정할 수 없었기에 유리는 속으로 조용히 침음했다.

    리암의 서임식과 제라니아의 편지. 그 둘의 연관성을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랑에 눈이 먼 아들놈을 유리는 속으로 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디든 안전하겠냔 생각이 들었다.

    기사로 키운 이상 위험이 아주 없을 수는 없으니. 이 또한 제 아집인가 싶었다.

    “그렇죠?”

    눈웃음을 보이는 제라니아를 향해 유리는 솔직하게 말했다.

    “정말 한결같으십니다.”

    처음 만났던 12년 전부터 어쩜 이렇게 변한 게 없나 싶었다. 그때부터 참 만만치 않게 자랄 것 같긴 했지만, 이렇게 제 뒤통수를 때릴 줄은.

    “그래서 절 마음에 들어 하셨잖아요.”

    하여간 한마디를 안 진다. 아이작의 의견에 공감하는 건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며 유리는 헛헛 웃고 말았다.

    * * *

    제라니아가 대답을 하기도 전, 닫혀 있던 식당의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오는 프란츠와 공작을 보자마자 리암은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키며 자세를 반듯이 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들리기 시작한 소음에 섞여, 스치듯 떨어지는 제라니아의 목소리가 리암의 귓가를 사로잡았다.

    “잘 끝났으니 됐지 뭐.”

    이제 안심이야. 조용히 속삭이는 음성은 여느 때와 같이 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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