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59화 (60/171)
  • 제59화. 변화의 바람 (5)

    “각하께서는 그 이유가 짐작이 가시나 해서요.”

    제라니아의 시선이 프리드의 표정을 신중히 탐색했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보다 프란츠를 더 오래 지켜본 사람이고, 혈육이었다. 제가 모르는 프란츠의 일면을 알지도 몰랐다.

    “제게 질문하시기보다, 직접 물어보시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서요.”

    프리드는 제라니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과 반짝이는 눈동자, 차분해 보이지만 생동감 있는 여인이었다.

    프란츠가 사랑에 빠졌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누이의 죽음을 겪은 그 아이가 사랑하는 사람을 왕궁에 끌어들일 리 없었다. 아그네스가 죽은 뒤로 아이가 겪었던 변화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직접 만나보니 어쩌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웃는 프란츠를 보는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었으므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 죄송스럽습니다만, 저 역시도 짐작 가는 게 없습니다.”

    살며시 고개를 내젓는 프리드에게 제라니아는 끈질기게 물었다.

    “짐작 가는 게 정말, 조금도 없으신가요?”

    “글쎄요….”

    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던 프리드의 뇌리에 어떤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국왕의 부름을 받아 수도로 올라왔을 때, 프란츠를 만나러 갔던 순간의 기억.

    프란츠의 나이 열넷의 일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조카는 머리가 제 목까지 닿을 정도로 키가 컸다. 하긴 어머니인 왕비도, 아버지인 국왕도 장신인 편이었으니 앞으로도 더 클 것이다. 어쩌면 자신을 따라잡을지도 몰랐다.

    안 본 사이 조카는 많이 변해 있었다. 조용하기만 하던 전과는 달리 주도적으로 대화를 끌어가는 언변도 그렇고, 웃는 얼굴이 매력적인 소년으로 자랐다. 분명 잘 자라 주었다고 생각해도 될 텐데….

    그런데 어째서 그 모든 것에 위화감이 들까.

    ‘숙부님?’

    왜 그러냐는 듯 묻는 프란츠의 입가에 매달려 있는 웃음이 무척 싱그러웠다.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라고 해도 될 만큼, 아그네스와 닮아 있었다.

    ‘전하, 괜찮으신 겁니까?’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기어코 묻고 말았던 건 가슴께를 묵직하게 누르는 죄책감의 말로일 뿐인지도 모른다. 의문 어린 시선을 내보이던 소년이 짧게 감탄사를 뱉었다.

    ‘왜 그런 표정이세요, 숙부님.’

    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지?

    ‘내가 어머니처럼 세상을 떠날까 걱정되시는 건가요.’

    소년의 입술이 한쪽으로 슬쩍 올라갔다. 비릿한 조소와 달리 눈은 지극히 차가웠다.

    아니, 차가운 걸까?

    경쾌하고 산뜻한 목소리와 달리, 쨍하다 싶을 정도로 새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심연처럼 어두운 눈동자를 홀린 듯이 들여다보았다.

    너무나도 두터워, 도리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난 죽지 않아요. 절대로.’

    죽고 싶어.

    어째서 그 말이 반대로 들리는 걸까.

    문득 떠올린 생각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심장에서부터 퍼져 나온 오싹한 감각이 피부를 뚫고 밖으로 나오려 했다. 자꾸만 부정적인 감정에 침몰되는 자신을 애써 끄집어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기우일 것이다. 제 나이의 절반도 되지 않은 아이였다. 아버지인 국왕을 닮아 강건한 신체에 어머니의 미모를 물려받은 데다, 계승권 역시 자식들 중 제일 높았다. 찬란한 미래가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죽고 싶다니,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었다.

    평생 전쟁터에서 굴러왔다. 생사를 넘나들었던 치열한 전투 역시 없지 않았다. 그 순간에조차 느끼지 못했던 낯선 감정이 갈고리처럼 제 가슴에 쿡 박혔다.

    두려움이었다.

    그는 두려웠다. 이제 겨우 열다섯을 향해 달려가면서, 족히 서른 살은 더 먹은 것처럼 공허한 눈을 하고 있는 제 조카가.

    소년의 잔상이 옅어지며 그 위로 여인의 얼굴이 덧씌워졌다. 방금 전의 잔상과는 달리, 생을 담고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를 마주하고 프리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추측에 지나지 않은 이야기일 뿐. 불길한 말을 구태여 입에 담을 필요는 없었다. 그렇기에 프리드는 조심히 그 생각을 흘려보냈다.

    * * *

    짹짹,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가 창밖에서 들려왔다. 갓 태어난 태양이 푸르스름한 새벽 공기를 밀어내며 위로 차오르는 시간이었다.

    제라니아는 졸음기가 묻어나는 눈을 멍하니 깜빡였다. 이미 나갔는지 비어 있는 옆자리를 힐끗 보고, 세안을 한 뒤 옷을 갈아입은 제라니아가 밖으로 나왔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그들을 지나쳐 식당으로 가자, 문 앞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안녕, 리암.”

    “누구세요.”

    전 그쪽 모르는데. 토라진 얼굴로 대꾸하는 리암에게 제라니아는 놀리듯이 말했다.

    “공작님과 즐거운 시간 보냈어?”

    “그랬겠냐?”

    툴툴거리는 리암을 달래며 제라니아는 그와 나란히 식당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식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연회색 테이블보가 깔린 거대한 식탁 위로 접시와 식기가 세팅되어 있었다.

    화려하다기보단 정갈하게 꾸며진 테이블에 착석한 뒤, 제라니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을 따라 작게 나 있는 창문들 너머로 고즈넉한 아침 풍경이 내다보였다.

    “여긴 정말 변한 게 없네.”

    “곧 생길 거야.”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 리암이 제라니아의 옆에 놓인 등받이가 긴 의자에 팔을 걸쳤다. 옆으로 돌아앉은 제라니아가 넌지시 말했다.

    “얼마나 혼났는데?”

    “말도 마. 잔소리가 아주 폭우 수준이었지.”

    끔찍했던 지난밤의 기억을 떠올리며 리암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도 없는 식당의 전경을 뒤로한 채 제라니아는 부드럽게 웃었다.

    “이야기는 잘 끝났지?”

    “대충. 아니 그런데, 아버지는 갑자기 왜 저러지? 난 드디어 노망이라도 난 줄 알았잖아.”

    태연하게 불경한 소리를 입에 담는 리암의 미간이 한껏 구겨졌다. 어젯밤은 정말로 영문 모를 일투성이였다.

    ‘정말 그 여자를 선택할 생각이냐?’

    공작은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은 뒤, 혼미해진 정신을 다잡는 리암에게 다짜고짜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찬물을 뿌린 듯 리암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말을 고르고 골라낸 그가 나름대로 신중하게 대답했다.

    ‘예, 당연하죠. 절대 안 헤어질 거니까, 차라리 그냥 절 내쫓으….’

    ‘좋다.’

    ‘…셔도 상관없, 네?’

    ‘몇 가지 조건을 달겠지만, 그걸 따를 수 있다면야 허락해주마.’

    리암은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 이게 무슨 말이지. 뭐야, 설마 아버지….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죽을병이라도 걸렸어요?’

    ‘…인석이, 그게 오랜만에 얼굴 보는 아비한테 할 말이냐!’

    역정을 내는 공작을 향해 리암은 진지하게 말했다.

    ‘사람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면 오래 못 산다잖아요, 아버지.’

    ‘하여간 말버릇하곤…. 그래도 내가 네 아버지라는 자각은 있어서 다행이구나.’

    작게 혀를 차던 공작이 냄비뚜껑 같은 손을 들어 리암의 등을 세게 내리쳤다. 악! 기습적인 공격에 비명을 토해내는 리암을 못마땅한 얼굴로 보던 공작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테냐?’

    “어떻게 하기로 했는데?”

    제라니아의 질문에 리암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뭐, 당연히 받아들였지. 나한테 선택의 여지가 어디 있어?”

    아버지가 내건 조건들은 귀찮고 까다롭긴 했지만 못 하겠다 싶은 것들은 아니었다. 단, 호위기사를 그만두고 사교계에 데뷔하라는 조건은 제라니아와 했던 약속을 생각해 일단 뒤로 미루기로 했다.

    “진짜 뭘 한 거야.”

    의심스레 자신을 향하는 시선에 제라니아는 일단 시치미를 뗐다.

    “뭘 말이야?”

    “다 안다는 듯이 말했으면서. 뭔가 했지, 너?”

    리암이 눈을 가늘게 뜨고 추궁하자, 제라니아는 선선히 대답했다.

    “별거 아니었어.”

    데브론 영지에서 수도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라니아는 그라시아 공작저를 방문했다. 깔끔하게 꾸며진 응접실에 앉아 있던 유리 그라시아 공작이 그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공작 각하.”

    “오랜만입니다, 비전하.”

    무뚝뚝한 얼굴로도 깍듯하게 대답하는 공작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제라니아는 힐끔 공작 쪽 테이블에 놓여 있는 편지봉투를 보았다. 자신이 보낸 편지였다.

    편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수도에 올라오실 일이 있다면 한번 뵙고 싶습니다. 연락 주세요.’였다.

    무슨 일로 편지를 보낸 건지 서로가 모르지 않았으므로, 유리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리암이 기사 서임식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비전하께서 주도하신 일입니까.”

    “역시, 금방 눈치채셨네요.”

    “그놈은 아비보다도 비전하의 말을 더 잘 듣지 않습니까. 하여간, 자식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더니.”

    거하게 한숨을 내쉬며 유리는 큼직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제라니아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이미 다 알고 계시겠군요.”

    리암과 그 여인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제라니아에게 유리는 단호하게 말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자면, 이 일에서 빠지셨으면 합니다. 비전하께서 나설 만한 일이 아닙니다.”

    예상한 말이었는지라 제라니아는 바로 대답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유리가 진중한 목소리를 내었다.

    “이건 저희 가문의 문제입니다. 자신과 관계없는 가문의 일에 나서는 게, 월권이라는 걸 영민하신 분께서 모를 리 없을 텐데요.”

    얼핏 듣기에는 꽤 타당한 의견이었으나, 제라니아는 진심으로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