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변화의 바람 (4)
꽤 편한 차림새를 한, 인형처럼 예쁘게 생긴 소년과 시선을 마주쳤다. 만지면 사르르 녹아버릴 것만 같은 금빛 고수머리와 이목구비가 오목조목 들어간 작은 얼굴, 깜빡이는 눈꺼풀 사이로 예쁜 푸른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안녕?’
밝게 인사를 건넸지만 소년은 묵묵부답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살짝 어깨를 움찔하는 소년에 몇 걸음을 놔두고 걸음을 멈췄다. 겁먹지 말라는 듯이 더욱 활짝 웃었다.
‘왜 여기 혼자 앉아 있어?’
‘…안전하니까.’
알쏭달쏭한 말을 내뱉는 소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긴 숲이니까 짐승이 나올 수도 있는데, 사람이 있는 곳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
그렇게 말하지 못한 건 소년의 표정이 무척 진지했기 때문이다. 제라니아는 다른 말을 꺼냈다.
‘미안, 네 비밀기지에 멋대로 쳐들어와서.’
‘괜찮아.’
‘혹시 너도, 파티가 지루해?’
소년은 잠깐 망설이는 듯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즐거운 우연이네! 나도 그렇거든.’
다들 남 얘기만 하는데 너무 재미없어 죽겠다고 조잘거리자 소년은 눈만 끔뻑거렸다.
그는 제가 본 또래 중 가장 말수가 적었다. 그래도 크리스는 질문을 하면 대답이라도 꼬박꼬박 하는데, 눈앞의 소년은 반응조차 거의 없었다. 자신을 경계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제라니아야. 너는 이름이 뭐니?’
‘…프란츠.’
‘프란츠? 예쁜 이름이네.’
발랄하게 답하는 자신을 보던 소년의 표정이 더욱 오묘해졌다.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너, 왕궁에 처음 왔구나.’
‘응? 맞아, 어떻게 알았어?’
‘…그냥.’
‘왕궁 사람이라면 나를 모를 리 없으니까.’라고 중얼거리는 아이의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세 발자국쯤 더 걸어 소년의 앞에 서 손을 내밀었다.
‘이것도 인연인데, 나랑 같이 놀래? 혼자는 심심하잖아.’
이 숲은 정말 조용했다. 잎사귀들이 햇빛을 가리고 있어서 그런지 낮인데도 서늘한 느낌을 풍겼다. 아름답지만 무표정한 소년과 무척 잘 어울리면서도, 어쩐지 여기에 혼자 내버려두고 가기 좀 그랬다.
소년은 한참 동안 멀뚱히 제 손을 쳐다보았다. 잡을지 말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투명한 구슬 같던 소년의 눈동자에 짙은 푸른색이 들어찼다.
고요하던 숲에 찰싹, 소리가 났다.
‘…필요 없어.’
제 손을 쳐내는 손길이 제법 매서웠다. 단호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소년은 말했다.
‘날 만난 걸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마. 좋은 꼴 보기 힘들 테니.’
‘…….’
‘돌아가!’
제법 누그러졌다 싶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갑작스레 날을 세우는 소년을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소년은 재차 가라고 종용했다.
기세에 눌려 뒤돌아섰다. 고집을 부리기에는,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취미는 없었다. 가달라고 했으면 가는 게 맞는 거였다. 숲에 먼저 온 건 소년이었고, 자신은 소년 입장에선 불청객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왜 자꾸 눈에 밟힐까.
저대로 두고 와도 정말 괜찮은 걸까. 몇 걸음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자, 여전히 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그가 보였다. 스쳐가는 바람 한 줌 없이 적막에 감싸여 있는 소년의 하얀 얼굴은 꼭 죽은 나무처럼 생기가 없었다.
그에 왠지 무서워져서, 제라니아는 돌아보지 않고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서 나왔다.
파티장으로 돌아가자,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부채에 얼굴을 가린 채 시선을 굴리던 어머니가 자신을 발견하고 부채를 탁 접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어머니는 도끼눈을 뜨고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제라니아! 어디를 갔다가 이제 오니? 얼마나 찾았는데!’
‘죄송해요, 어머니.’
익숙하게 들리는 꾸지람을 감당하면서도 제라니아는 자꾸만 숲 쪽으로 돌아가려는 고개를 막기 위해 애썼다.
소년의 정체는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풀렸다. 낮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꺼내던 중 제라니아는 소년의 얼굴을 떠올렸다.
얼굴도 그런데 차림새를 보면 귀족인 건 확실했고, 묘하게 위압적이던 태도를 생각하면 꽤 높은 신분인가 싶었다. 내가 예의 없이 굴어서 화가 났던 걸까? 하지만 그렇다면 왜 신분을 밝히지 않았지?
만난 장소는 제외하고 소년에 대해서만 조심스레 털어놓자, 어머니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
‘프란츠? 왕자님이 파티에 오셨다고?’
‘네?’
그제야 어머니가 왕비님의 오랜 말동무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왕비님께 내 또래의 왕자님이 있다고 했던 사실도.
그 이후로는 만나지 못했다. 열여덟 살이 되어 수도로 올라온 뒤에 파티에서 가끔 얼굴을 보는 정도였다. 마주칠 때마다 웃고 있는 얼굴을 보며 속으로 안도했다. 잘 지내고 있는 듯해 다행이었다.
말을 걸어볼까 하다가도, 고작 어릴 때 한 번 만난 어린애를 기억할 리 만무하다고 여겼기에 모른 척했다.
편지를 받았을 때는 어찌나 놀랐던지. 혹시 자신을 기억하나 싶었지만, 역시나.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왕자님을 보며 제라니아는 아무렇지 않게 모르는 척을 했다. 생각보다 무뚝뚝한 건 어릴 때랑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나 하면서.
그때는 자신이 나중에 왕자님한테 청혼을 받게 되고,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인연이란 참 별나다고 할 법했다.
“후작 각하.”
회상을 마친 제라니아가 프리드를 조용히 불렀다. 그를 마주 보는 녹색 눈은 따스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상대가 숨기고 있는 것들을 끄집어낼 것처럼.
“각하께서는 전하를 아끼시지요.”
그가 꺼내는 일화만 보더라도 프란츠를 보는 그의 시선은 무척 따뜻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혈연도 배신하는 게 귀족이라 하나, 후작이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는 건 담백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서 이미 짐작이 갔다.
“물론입니다.”
덤덤한 대답에 제라니아는 조용히 속으로 숫자를 셌다. 셋, 둘, 하나. 딱 3초가 지난 뒤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이야기한 것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
“그러니 한 가지만,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무엇을 말입니까.”
제라니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사람을 살아가게 만드는 건 욕망이라고 생각해요. 저 역시도 그러니까. 권력을 탐하는 것도 그 연장선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러니 전하께도 마땅히 그런 욕망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고요.”
누군가를 알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해야만 했다. 악몽을 꾸고 깨어났던 프란츠를 본 이후로, 텅 비어 있는 눈동자를 보았던 순간을 지나 줄곧 고민했다.
나는 프란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그런데 저는 가끔, 잘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무엇을 염두에 두고 이 길을 걸어가시는 건지.”
프란츠는 자신에게 이 나라를 바꿔보자고 했다. 그걸 위해 이상적인 왕비를 찾는다고 말했고, 언제나 내 의견을 새겨들을 것이라 했다. 그렇기에 그가 성군이 되고자 한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보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왜 그는 그런 왕이 되고자 하는가?
그저 마음에서 우러나서 그럴 수도 있다지만, 그렇다기엔 프란츠는 그런 인간적인 감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화려한 외양과 달리 건조하고 메말랐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그의 가까이서 지내는 만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왕족으로서의 의무감일까.
그것도 솔직히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의무감을 따지기엔 프란츠의 입에서 그런 식의 발언을 들어본 적이 전무했다. 애초에 그는 왕족이라는 위치에 소속감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었다.
단순히 왕궁에서 벌어지는 개판에 이골이 나서, 다 갈아엎고 싶어서 왕이 되고자 하는 걸까? 현재로서는 가장 납득할 만한 답이었으나 그렇더라도 걸리는 점이 있었다.
프란츠는 제가 본 사람들 중 최고로 합리적인 사람이었고, 이익과 손해를 확실하게 구분했다. 그의 모든 발언에는 감정적인 요소가 지극히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니 의문이 드는 것이다. 왜 이런 방식을 선택했을까. 나라를 바꾸는 게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이득이 있지?
귀족들의 권세가 갈수록 커지고 있으니, 그들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쪽의 변화를 말하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면 왜 자신과 결혼하고자 했을까. 그는 자신에게 필요하다면 가문과도 부딪힐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고 했다. 그건 바꿔 말하면, 프란츠 자신과도 부딪힐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똑똑한 그가 그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 없었다. 하물며 제 방식이 프란츠와 맞지 않으리라는 건 그간의 만남에서도 이미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결혼을 권유했다. 제게 이대로 있으라는, 변할 필요 없다는 말까지 덧붙여가면서.
게다가 단순히 왕이 될 거라고 했다면 몰라도, 그는 굳이 나라를 바꾸겠다는 표현을 썼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프란츠다. 정치에서 말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열두 살의 나이부터 정치에 몸을 담았다던 그가 모를 리 없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살짝 멍해졌다. 순조롭게 길을 걸어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사방에 안개가 둘러져 있어 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기분이었다.
꼭 톱니바퀴 하나가 빠져 있는 기계가 이럴까. 모든 게 갖추어져 있지만, 부품 하나를 끼워 넣지 못해 온전히 굴러가지 못하는 기계처럼 제 추론들도 그렇게 삐걱거렸다. 무엇이 부족한지는 분명했다.
그가 왕이 되고자 하는 동기.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온갖 암살 위협을 겪으면서도 국왕이 되고자 하는, 그의 모든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확실하고 명확한 이유가.
문제는 그 이유가 뭔지, 아직까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