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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57화 (58/171)
  • 제57화. 변화의 바람 (3)

    “예? 그야 당연히 괜찮습니다만….”

    반짝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제라니아에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슬쩍 덧붙였다.

    “살살 하십시오.”

    뭔가 꿍꿍이가 있을 때 저런 눈을 하지 않던가. 제라니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만.”

    “뭡니까.”

    “저기 서 있는, 제 하나뿐인 아들놈에게 볼일이 좀 있어서 말입니다. 데려가도 괜찮겠습니까?”

    이를 악물고 말하는 유리를 지켜보던 제라니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절대 안 된다고 눈으로 신호를 보내는 리암의 얼굴을 확인한 뒤, 제라니아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네, 물론이죠.”

    배신자! 입을 벙긋거리며 배신감에 몸부림치는 리암과 달리 유리의 얼굴이 해바라기처럼 활짝 피었다. 악몽의 전주가 제 귓가를 둥둥 떠다니는 기분에 리암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감사합니다.”

    말없이 싫다고 온몸으로 발악하는 리암을 챙긴 유리가 더없이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방을 나섰다.

    이럴 때 보면 참 똑같단 말이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제라니아에게 프란츠는 말했다.

    “보내도 되겠습니까?”

    “네, 음…. 등짝 정돈 맞지 않을까요.”

    판은 깔아줬으니, 나머지는 둘이 알아서 하겠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제라니아는 프란츠에게 말했다.

    “우리도 가요.”

    리베라 후작은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야 도착했다.

    여독을 풀기도 전, 자신을 부른다는 언질을 받고 후작은 곧장 옷을 갈아입고 응접실로 갔다. 문을 열자마자, 마주 앉아 체스를 두고 있는 프란츠와 제라니아를 본 후작의 낯빛이 살짝 굳었다.

    “아, 어서 오세요.”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제라니아가 인사를 건넸다. 말에 손을 가져가려던 프란츠 역시 후작을 쳐다보았다.

    “…왕세자 전하와 비전하를 뵙습니다.”

    인사를 건네는 후작을 힐끔 본 프란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부는 다음에 내야겠군요.”

    “가시게요?”

    “회포는 사열이 끝난 뒤 풀어도 늦지 않으니까요.”

    거침없이 몸을 돌려 걸어간 프란츠가 후작을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침묵이 찾아들었다. 문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에게 제라니아는 가만히 손짓했다.

    “저쪽 자리에 앉으세요.”

    “…예.”

    절도 있게 걸어온 남자가 제라니아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이제 마흔을 넘긴 남자의 얼굴은 과연 혈육이다 싶을 만큼 프란츠와 닮아 있었다. 갈기처럼 흐트러진 더티 블론드에 갈색 눈동자, 전장에서 평생 살아왔다는 것을 증명하듯 팔뚝과 손에는 흉터가 즐비했다.

    프리드 리베라.

    후작이면서 서쪽 경계를 지키는 변경백. 그가 머무는 하이센 영지는 헤리타와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 요충지인 만큼, 영주들 가운데 유일하게 군에 마법사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무뚝뚝한 목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체스판을 슬쩍 옆으로 밀어놓으며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름 아니라, 한 번도 뵙지 못한 것 같아서요. 결혼식에서 뵐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불경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 탓하려고 그런 게 아니에요.”

    본래는 참석하려고 했으나 결혼식이 열리기 직전, 국경지대서 작은 마찰이 생긴 탓에 후작은 하이센을 떠날 수 없었다. 혼자서라도 다녀오시라는 부하들의 진언에도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국경을 지키는 것은 그의 가장 최우선 임무이기도 했으므로.

    후작이 입을 꾹 다물자, 썰렁한 분위기가 둘 사이에 감돌았다.

    “전하, 그러니까 프란츠에 대해 여쭤보고 싶어서도 있고요.”

    차분하게 저를 응시하는 제라니아에게 후작은 잠시 침묵했다가, 느릿하게 대답을 내놓았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이라면 기꺼이 그러겠습니다만…. 아마 저보다 비전하께서 전하에 대해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가요?”

    프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주 뵙지는 못했으니까요. 제가 후작위를 빨리 물려받기도 했고 말입니다.”

    고작 20대 중반의 나이에 후작이 된 만큼, 그는 여러 가지로 바빴고 재미없는 남자였다. 가끔 누이가 보내는 편지를 읽는 정도가 유일한 즐거움이었을 정도로.

    “…즐거워 보이셨습니다.”

    “네?”

    “비전하와 계실 때 말입니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소파에 앉아 있는 프란츠를 본 프리드는 눈을 의심했다.

    그가 웃고 있었다.

    지어낸 미소가 아니라, 정말 즐거운 듯이 자연스럽게 올라가 있는 입꼬리를 본 순간 그는 멍해졌다.

    누이인 아그네스가 죽은 뒤로 조카는 저렇게 웃은 적이 없었다. 그는 누이의 장례식에 홀로 서 있던 프란츠의 얼굴을 기억했다. 모든 감정을 씻어낸 것처럼 무표정하던 얼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것에 모두가 독하다고 수군거렸다.

    장례식에는 비가 왔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방울에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사람들과 달리, 소년은 머리와 옷이 젖어가는 와중에도 말없이 어머니의 장례를 지켰다.

    ‘전하, 들어가시지요.’

    보다 못한 자신이 다가가서 말을 걸자, 남청색 눈동자가 천천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작은 입술이 오물거리며 말을 그려냈다.

    ‘숙부.’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차분한 목소리가 상념에 잠긴 프리드를 깨웠다.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는 프리드에게 제라니아는 재차 말했다.

    “그래도 제 앞에서의 전하와, 각하 앞에서의 전하는 다를 테니까요.”

    눈을 반짝이며 대답을 기다리는 제라니아의 얼굴에 기대가 가득했다. 프리드는 조용히 제가 가진 기억들을 하나둘씩 더듬었다.

    아그네스와 함께 있을 때의 프란츠는 자주 웃었다. 아이치고는 꽤 차분했고, 낯을 많이 가린 탓에 제 어머니의 드레스 자락을 꼭 붙잡은 채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말간 얼굴이 기억이 난다.

    아그네스가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날 줄은 몰랐다. 제가 기억하는 누이는 강건하면서도 부드러운 면모를 가진 여성이었다. 안부 인사로 보내는 편지에도 크게 고민을 털어놓거나 한 적은 없었다. 점점 수척해지는 것에 걱정이 되기는 했으나 그뿐이었다. 아그네스가 괜찮다고 했으니까, 그렇다고 믿었다.

    …믿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프리드는 제가 안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나라의 왕비를 보내는 자리가 이다지도 초라할 수 있던가.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 하더라도 도가 지나쳤다.

    유모 하나만을 옆에 두고 서 있는 프란츠의 등을 보니 회한이 몰아쳤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등을 한 조카에게 변변한 위로의 말 하나 제대로 해주지 못 하는, 말재주 없는 자신이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다.

    비가 내리자, 움직이지 않으려고 버티는 프란츠를 간신히 설득해 응접실로 데려왔다. 옷을 갈아입은 프란츠의 금색 머리칼을 유모에게서 받은 수건으로 조심스레 문질렀다.

    오는 길에도 수많은 시선을 받았다. 왕자에게 향하던 악의 어린 시선들은 옆에 서 있는 자신을 확인하자마자 쏙 들어갔다.

    기가 막혔고, 그래서 슬펐다. 조금 더 빨리 알아챘으면 나았을까. 짙은 후회가 머릿속에 엉켜들었다. 그중 하나가 입 밖으로 톡 굴러 나왔다.

    ‘괜찮으시다면, 왕자님. 저랑 같이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자신은 내일이면 하이센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프로모 왕국과의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만큼 국경을 오래 비워둘 수는 없었다. 그것이 자신의 임무이고 의무니까.

    그런데 왜 이리 가슴이 답답한지 모르겠다. 모르긴 몰라도 아이를 이대로 두고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 주제넘게 보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해야만 했다.

    어렵사리 꺼낸 말에 프란츠는 잠시 말이 없었다. 천천히, 그렇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는 말간 얼굴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은 괜찮다고, 여길 떠나지 않을 거라며 또박또박 말하는 프란츠의 눈동자에 기이한 감정이 일렁였다.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았다.

    아그네스가 죽고 난 뒤, 무표정한 얼굴로 세월을 보내던 조카는 어느 순간부터 웃기 시작했다. 그게 비록 어린 시절 보였던 미소와는 많이 다르다고 해도.

    가끔씩 안부를 묻고자 보낸 편지에 돌아오는 답장 역시 점점 짧아졌다. 성심껏 쓰인 건조하고 유려한 문장들은 그가 잘 지내고 있음을 피력했다. 그 말대로 프란츠의 웃고 있는 얼굴은 과거의 아픔을 다 떨쳐낸 것처럼, 다 괜찮아진 것처럼 보였다.

    프리드는 좋았던 기억들을 세심하게 골라 제라니아에게 내밀었다. 세 살 때, 처음으로 제게 안아달라고 손을 내밀었던 기억이라든가, 다섯 살쯤 장난을 치다가 왕비에게 혼난 일이라든가, 여섯 살에 하얀 강아지를 끌어안고 있던 모습이 천사 같았다든가.

    “전하께서 강아지를 키웠었다고요?”

    “예, 오래는 아니었지만.”

    1년 뒤, 장례식에 찾아갔을 때 강아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프란츠를 둘러싸고 있던 악의를 생각하면, 쉽게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기에 프리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렇구나…. 의외네요.”

    어릴 때도 그런 느낌은 아니셨는데. 제법 놀란 듯 중얼거리는 제라니아의 목소리는 꼭 어린 시절의 그를 아는 것처럼 들렸다.

    실제로도 그랬다.

    제라니아는 가만히 프란츠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15년 전 왕궁에서 주최했던 연회에서였다.

    * * *

    당시 자신은 아홉 살이었고, 처음으로 나가는 수도 나들이에 조금 들떠 있었다. 물론 연회에 참석한 지 30분 만에 후회했다.

    끔찍하게 지루했다. 이렇게 재미없을 줄 알았다면, 그냥 어떻게든 안 오는 건데!

    귀부인들과 수다를 떨고 있는 어머니를 기다리고 기다리다, 결국 작은 모험을 감행했다. 여전히 어머니의 손에 붙들려 있는 칼리아 언니에게 미안하다는 사인을 보내자, 언니가 배신자 보듯 나를 쳐다봤다. 속으로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 언니!

    왕궁의 정원은 무척 아름다웠다. 색색의 꽃들이 열을 맞춰 활짝 피어 있었는데 왕실의 상징이라 불리는 커다란 보랏빛 꽃, 뮤라나도 보였다. 풀밭 위로 떨어져 있는 꽃잎 몇 장을 주워 손에 꼭 쥐었다.

    숲으로 향하는 오솔길을 따라 룰루랄라 걸어갔다. 그늘진 시원한 숲속으로 들어가니 왠지 모험을 하는 기분이 들어 신나기도 했다.

    ‘어?’

    그때였다. 커다란 나무 밑에 앉아 있는 누군가를 발견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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