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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56화 (57/171)
  • 제56화. 변화의 바람 (2)

    왕세자에 관해서는 그 역시 얼핏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가 숱한 암살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식도.

    이변이 없다면 차기 국왕이 될 남자다. 신전에서 그를 주시하는 것은 당연했고, 벤자민이라고 귀를 닫고 사는 건 아니었다. 그가 신전에서 보내는 사절을 계속해서 거절하고 있어 상층부에서는 꽤 골머리를 썩고 있다는 사실도 은밀하게 전해 들었다.

    종교와 정치는 그 분야가 다르다 하나, 예로부터 신전은 정치에 발을 걸치고 각종 특혜를 받아왔다.

    신전은 왕족의 권위가 신에게서 왔음을 증명해 그들의 정통성을 보장하고, 왕실은 그런 신전에게 보답하는. 관례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는 관계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왕세자의 태도를 신전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벤자민은 신전의 그런 풍토에 오래전부터 의문을 가졌다. 그 역시 순수한 마음으로만 신관으로서의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고, 신전 내에 수많은 파벌이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꼭 그렇게 복잡하게 살아야 할까. 과한 욕심은 결국 해악을 부를 뿐인데.

    이런 생각을 속 시원히 드러내본 적은 없었다. 그게 모두가 자신에게 바라는 위치니까. 자유로워 보이지만 결코 틀을 벗어나지 않는 자. 여태껏 그 기대에 꽤 열심히 부응하며 살아왔다.

    굳건한 여인의 눈을 보며 생각했다. 고여 있던 물에 파문이 이는 것을 보는 기분이 이럴까.

    관례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일들에 대놓고 도전장을 던지는 왕세자와 그런 왕세자가 선택한 여인이라. 흥미로운 마음에 불쑥 질문했다.

    ‘두렵지 않으십니까? 이 장소에서 그런 말씀을 꺼내는 것이.’

    내가 당신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갈 수도 있는데.

    ‘여기는 당신의 공간이잖아요. 장소는 의미가 없죠.’

    새까만 강물에 별가루를 뿌린 듯한 배경이 여인을 둘러싸고 있었다. 솔직한 것 같으면서도 허투루 말하는 것이 없었다.

    ‘솔직함이 독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시지 않습니까.’

    하지 않고 넘겼어도 되었을 말을 꺼내는 의도가 궁금해, 벤자민은 말이 조금 많아졌다.

    ‘말한 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먹히지 않는 가치지요. 허나 당신이 그런 사람이었다면, 굳이 왕궁까지 저를 데려가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왕궁에 들키지 않고 잠입할 수 있다는 건, 그에게 주어지는 신뢰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위협이 된다 싶은 이를 왕실이 순순히 내버려둘 리가 없으니까.

    여인과 서로 공범이 되었다고는 하나, 여인이 거짓말을 한다면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을 터였다. 그럼에도 여인의 부탁을 들어주고자 한 건, 그에게서 느낀 기묘한 동질감 때문이었다.

    더없이 냉엄한 진실을 저토록 차분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것도 대단했다.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자신을 직시하는 여인을 향해 벤자민은 두 손을 들고 항복 자세를 취했다.

    ‘이거 참. 제가 졌습니다.’

    그럼에도 저 말은 역설적으로, 상대가 자신을 믿고 있음을 선언하는 것과 같았으니까.

    서늘한 돌 위에 이마를 대고 있던 벤자민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천천히 눈가를 휘어 웃었다.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나중에 신전으로 오셔서 저를 찾으시면 됩니다.’

    왕국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실뭉치를 포착한 고양이처럼 기민하게 변화를 감지한 그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어질 것 같았다.

    * * *

    초록색의 시종 옷을 입은 핀이 쪼르르 통로를 걸어갔다. 처음 시종 일을 했을 때에 비해 혈색도 좋아졌고, 살집이 꽤 붙었다. 제법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걸어가는 핀의 손에 작고 새하얀 들꽃 한 묶음이 들려 있었다.

    처소에 도착한 뒤, 시녀에게 물어 주인을 찾았으나 이미 외출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예상했는지라 핀은 실망하지 않고 햇빛이 비치는 화창한 날씨 아래 발을 디뎠다.

    한참을 걷자 숲 언저리가 보였다. 그 안쪽으로 들어간 핀은 어느덧 넓게 가지를 뻗고 있는 나무를 찾아냈다. 성인 남자 둘이 팔을 뻗어야 덮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둘레를 가진 나무 아래에 작은 소녀가 앉아 있었다.

    제법 고급 옷감으로 만들어졌을 옷이 여기저기 해져 있었다. 경계심이 차올라 있는 소녀의 앞으로 간 핀이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일라 전하.”

    오랫동안 독을 복용한 후유증으로 귀가 들리지 않는 왕녀, 아일라 리나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다른 왕족들을 대하던 프란츠가 유일하게 신경 쓰는 이복동생이기도 했다.

    처음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봤을 때, 제라니아는 꽤 놀랐다.

    ‘아일라 전하와는 사이가 좋으시네요.’

    ‘…위협이 되는 상대가 아니니까요.’

    아이의 어머니는 한미한 자작 가문 출신이었다. 때문에 왕위 경쟁에서는 일찌감치 밀려났으나, 청순한 미모를 가졌으며 왕궁의 여인들 중 순수하게 국왕을 사랑하는 몇 안 되는 여인이었다.

    그걸 짐작해서인지 켄드릭도 유독 여인을 자주 찾았고, 다른 후궁들의 눈 밖에 난 만큼 여인과 아일라 역시 수많은 고초를 겪었다. 여인은 불임이 되어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었고, 하나뿐인 딸은 귀가 멀었다.

    그를 돌보는 몇몇 시녀들을 제외하고,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고 방치되어 있던 작은 왕녀에게 유일하게 관심을 둔 건 프란츠뿐이었다.

    ‘근성도 있고 말입니다.’

    귀가 들리지 않을 뿐 소녀는 무척 똑똑했고, 사리분별도 분명한 데다 악바리 같은 면모가 있었다. 공부머리가 좋은 건 아니었음에도 일곱 살에 글자를 배웠고 간단한 수어 역시 구사할 줄 알았다.

    소녀에게 공부를 가르친 건 이렌스였다. 이 또한 프란츠의 뜻이었는데, 이렌스는 자질구레한 일만 시키신다며 투덜거리면서도 성의껏 왕녀를 가르쳤다.

    “맞다, 이거 받으세요.”

    핀은 편지와 함께 제가 가져온 들꽃들을 아일라에게 내밀었다. 들꽃을 향해 뭐냐고 손짓하는 아일라에게 핀이 입 모양으로 ‘선물’을 말했다. 아일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움직였다.

    [너 진짜 웃기네. 왜 나한테 이런 걸 줘?]

    아일라가 핀과 처음 마주쳤던 건 그가 이렌스와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심술기가 돋은 듯 아일라는 한동안 핀을 꽤 괴롭혔으나, 고아원에서 겪었던 일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인지라 아무렇지도 않았다.

    “친해지고 싶어서요.”

    핀이 또박또박 말하자 아일라는 알 만하다는 듯 빠르게 손짓했다.

    [이렌스한테 쓸데없는 일 그만하라고 전해.]

    과연 눈치가 빨랐다. 편지를 뜯어서 읽어 내리는 아일라의 금빛 고수머리가 바람을 타고 흔들렸다.

    아일라는 이렌스와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아일라의 편지는 주로 질문이고 이렌스는 대답을 건네는 식이었다. 핀과 아일라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그는 편지 배달을 핀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가는 김에 친해지면 더 좋을 테고요.’

    ‘제가 왕녀 전하랑요?’

    어찌 감히, 라는 생각이 절로 떠올랐다. 이렌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 봬도 외로움을 타시니까요. 나이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신분은 까마득히 다르다지만. 심드렁히 대답하는 이렌스를 보며 핀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눈앞의 남자는 심각한 문제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핀은 아일라의 날 선 눈동자에서 과거의 자신을 보았다. 내버려둘 수 없는 건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몇 번이나 이래도 괜찮을까 망설였지만, 거리낌 없이 제게 손을 내밀었던 제라니아를 떠올리며 핀은 작은 용기를 건져 올렸다.

    편지를 다 읽었는지 그것을 곱게 접은 아일라가 다시 봉투에 그것을 집어넣고 몸을 일으켰다. 앞장서 걸어가는 아일라를 따라 핀 역시 총총 걸음을 내디뎠다. 아일라가 핀을 홱 돌아보았다.

    [왜 따라와?]

    [답장을 받아 가야 해서요.]

    눈치를 보면서도 웃는 얼굴을 하는 핀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일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핀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가 조금 망설이는 듯 눈을 깜빡였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가자.”

    어눌한 발음이 아일라의 입 안에서 흘러나왔다. 남들 앞에서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아일라가 제게 말을 걸어준 것에, 핀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 * *

    “어서 오십시오, 왕세자 전하. 왕세자비 전하.”

    정중하게 예를 표하는 유리 그라시아에게 프란츠와 제라니아는 각각 한마디를 건넸다.

    “환대해줘서 고맙소.”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각하.”

    제라니아의 뒤에 서 있는 하나뿐인 아들을 스치듯이 노려본 유리가 곧 부드럽게 답했다.

    “물론입니다.”

    수도를 출발한 이들은 남쪽의 데브론 영지에서의 사열을 마친 뒤, 그라시아 가문이 다스리는 서쪽의 셀바 영지에 도착했다.

    조만간 해가 저물 것 같은 하늘을 힐끔 바라본 유리가 집사를 불렀다. 숙소까지 안내하라 지시하며 유리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편히 쉬십시오. 곧 리베라 후작도 도착할 예정입니다.”

    “하이센은 어떻게 하고 말입니까.”

    “하루 이틀 비운다고 함락될 만큼 만만한 요새는 아니잖습니까.”

    프란츠와 유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제라니아가 슬쩍 끼어들었다.

    “리베라 후작이라면…. 전하의 외숙부를 말씀하시는 게 맞을까요.”

    유리가 선뜻 대답했다.

    “예, 맞습니다. 그러고 보니 비전하께서는 처음 만나시겠군요.”

    크레이츠 왕국의 주변에는 여러 나라가 있었지만, 서쪽에 있는 왕국 헤리타와는 유독 사이가 좋지 않았다. 늘 서쪽 국경선을 호시탐탐 노리는 그들에 맞서 국경을 지키는 일족이 바로 리베라 후작가였다.

    용맹한 무인으로 유명한 가문에서 프란츠와 같은 인물이 나왔다는 게 놀라웠다. 프란츠가 검술을 아예 못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어지간해서는 검을 들고 다니지도 않았다. 검을 싫어한다는 말은 진심인 듯했다.

    “그럼 사열 전에, 그분을 한번 뵐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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