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변화의 바람 (1)
어두운 복도를 지나 본관으로 들어서니 시야가 확 밝아졌다. 안으로 들어오는 벤자민과 에이르를 본 신관들이 작게 경탄을 내뱉었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하십니까, 벤자민 님!”
행사가 끝난 직후라 신전 내는 활기가 넘쳤다. 대신전 안에서는 정숙해야 한다는 규율에 의거해 소란스럽지 않게 움직이던 이들이 제게 건네는 인사를 벤자민은 살갑게 받아주었고, 에이르는 고고하게 앞만을 보고 걸었다.
투명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바닥을 사뿐한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에이르의 얼굴이 불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벌꿀을 담아 만든 것 같은 눈동자와 대리석을 떠올리게 하는 매끈하고 새하얀 피부, 입술 아래 오른쪽에 자리한 점 두 개만이 갓 내린 눈길 위에 남은 발자국처럼 그 흔적을 자랑했다. 높고 또렷한 코와 살짝 올라간 눈매, 가지런히 다물린 붉은 입술까지.
정면을 올곧게 응시하는 그 옆얼굴을 훔쳐보는 신관들의 마음을 벤자민은 충분히 이해했다. 미인인 것을 떠나 시선을 끄는 상대였다. 신성해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본인이 가진 장점을 알뜰히 이용해먹을 만큼 야심이 넘치는 인물이기도 했다.
신전에서 이 위치까지 올라온 사람이라면 누구인들 안 그렇겠냐마는, 에이르는 그중에서도 꽤나 독했다. 천 년이 넘는 대신전의 역사에서도 여성 이피나스는 몇 되지 않았다. 에이르는 다소 젊다고 할 만한 나이에 그 자리를 당당히 쟁취했다.
사실 그가 타고난 능력을 생각하면 오히려 직위를 받는 게 늦었다고 해도 좋았다.
예언자인 메즈가 없는 이상, 신전에서 아나샤만큼 고귀하게 여겨지는 존재는 없었으므로.
“너무 헤죽거리지 말고, 표정 관리해.”
에이르가 살갑게 구는 자신을 내치지 않는 건, 제가 가진 배경 때문일 것이다. 에이르가 이피나스 중 유일한 여성이라면, 자신은 유일한 평민이었다. 그 덕에 귀족의 배 이상을 차지하는 평민 출신 신관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성도 그렇거니와, 평민이 이피나스의 자리에 오르는 건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신전의 복잡한 인간관계와 물밑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파벌 싸움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벤자민이 이피나스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뛰어난 능력도 있지만, 스승이었던 전대 이피나스가 그를 후계자로 지목했기 때문도 컸다. 물론 스승님은 은퇴해야 할 나이였고, 유독 그를 챙겼다지만 그걸 감안해도 파격적인 인사였다.
상층부에서 꽤 반발이 있었지만, 이 문제에 한해서는 전대 수호자의 의견을 가장 존중하는 게 관례였기 때문에 그는 무사히 이피나스의 자리에 올랐다.
이피나스로 임명된 뒤로 매일이 마치 폭풍 같았다. 휘말리고 싶지 않은 문제들에 제 의지와 상관없이 말려들고 있는 걸 생각하면. 스승의 부탁을 받았다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이기도 하니 딱히 후회하지는 않았다.
가끔 답답해지는 속이 문제지.
“알겠습니다.”
서늘한 목소리에 토 달지 않고 벤자민은 한껏 표정을 정돈했다.
앞장서 걸어간 에이르가 정면에 자리한 커다란 문을 밀었다. 부드럽게 문이 열리고 이미 모여 있던 네 명의 사람들이 둘을 맞이했다. 어서 오라는 간단한 인사를 받으며 벤자민과 에이르는 각자의 자리에 착석했다.
“어서 오십시오.”
에이르의 맞은편이자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백발의 노인이 인자한 미소를 내보였다.
대신전을 총괄하는 아비스, 와이엇 산드리아의 녹색 눈동자가 좌중을 훑어보았다. 그에게는 마법 중에서도 치유 특화 속성을 타고난 이들 특유의 온화한 분위기가 있었다.
“죄송합니다. 연락을 늦게 받아서요.”
부드럽게 대답하는 벤자민에게서 맞은편, 아비스의 왼편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가 차갑게 빈정거렸다.
“왜, 번제에 불참할 만큼 중요한 일이라도 생겼나.”
“딜런.”
아비스의 오른편에 앉아 있던 갈색 머리칼의 노인 단테가 우려를 담아 제지했으나, 그는 강경하게 말했다.
“자네는 도대체가 책임감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건가. 불성실한 태도도 한두 번이지, 이런 중요한 행사에까지 불참할 줄이야.”
“그만 하십시오, 이피나스 딜런. 제때 왔으니 되었습니다.”
와이엇의 제지에 그는 더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럼에도 벤자민을 쳐다보는 눈은 영 못마땅했고, 그는 언제나와 같이 그 시선을 흘려보냈다. 어차피 자신이 뭘 해도 못마땅하게 생각할 사람이었다.
살짝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 가벼운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뒤 와이엇은 입을 열었다.
“요 근래 신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오늘 있었던 일만 해도 말이지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벤자민과 달리 다른 이피나스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르 역시 표정이 굳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벤자민을 위해, 에이르의 왼편에 앉아 있던 세드릭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번제가 끝나갈 무렵에 소동이 있었습니다.”
‘아비스시여. 언제부터 신을 향한 믿음이 세속적인 욕망으로 변질되었단 말입니까.’ 활활 타오르는 제단을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인파를 비집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호소하듯이 외치는 노인의 얼굴이 불빛을 받아 환하게 빛났다.
자신을 순례자라고 소개한 그는 세간에 돌고 있는 소문의 진위를 밝혀주기를 호소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히 서서 기다리고 있던 노인은 끝내 답변을 듣지 못하고 끌려 나갔다.
그럼에도 시선은 아비스와 이피나스들이 모여 있는 단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방금 전 보고가 들어왔는데, 광장에서도 비슷한 소동이 있었다 합니다.”
와이엇의 말에 조용하던 공간이 작게 술렁였다.
재미있는 볼거리를 놓쳤구나. 속으로 몰래 아쉬워하는 벤자민을 힐끗 쳐다보던 딜런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흠흠, 소문이라 하면 역시….”
침묵하는 이들 중, 맨 처음으로 입을 연 건 단테였다.
“왕족 암살에 관련된 소문 말입니까.”
몇 주 전쯤부터인가, 특정 왕족과 유착관계를 맺은 신전이 정치구도에 관여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물살을 타듯이 제법 빠르게 돌기 시작한 소문들은 신전 내부는 물론 외부로까지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증거가 오늘의 사건이었다.
왕궁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암투를 그들 역시 모르지 않았다. 암살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실제로 신전은 왕실과 많은 공조 끝에 이득을 챙겨 왔다.
당대 아비스인 와이엇이 나름대로 신전과 왕실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고 애쓰고 있다 하나,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오래 이어져왔던 관행이 쉽게 사라질 리 없었다.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모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시치미를 뗐다.
태연하게 소문을 부정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료들의 모습에, 벤자민은 절로 구겨지는 얼굴을 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추측성이라고는 하나, 생각보다 번지는 속도가 큽니다.”
“부추기는 자가 있을 것이란 말씀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대신전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속히 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떠드는 입이 많을수록 소문은 힘을 얻는다. 여기 앉아 있는 이들 중 그것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내부는 어떻게든 단속하면 될 것 같습니다만, 외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희 쪽에서 통제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소문이란 한 철일 뿐입니다. 그보다 더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일이 생긴다면 금세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사라진다 하심은…?”
“글쎄요.”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와이엇은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 * *
회의가 끝난 뒤, 이피나스들은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다. 대놓고 귀찮아하는 티를 내는 에이르를 배웅한 다음 벤자민은 언제나처럼 결계식을 설치해둔 방에 들렀다.
신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설치된 특별한 방, 결계의 핵심을 담당하는 이곳을 모두는 대신전의 심장이라 불렀다. 바닥에는 결계식이 그려져 있고, 그 중앙에는 마력 증폭석이라 불리는 초록색의 돌 플리스타나가 자리했다.
결계식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간 벤자민이 집채만 한 커다란 돌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결계에 이상이 없는지 더듬어가는 그의 표정이 간만에 진지했다.
“결계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군.”
마력의 흐름도 멀쩡하고, 손상된 흔적 역시 전무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벤자민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참.”
가만히 플리스타나에 머리를 살짝 기대는 그의 표정이 자못 심란했다. 방금 전 들었던 이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벤자민의 머릿속에 오늘 만났던 작은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와 나누었던 대화 역시 실타래를 풀듯 천천히 머릿속에서 재생되기 시작했다.
왕궁에 들어갔다 나온 직후, 왕세자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미 익숙해진 건지, 제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공중을 딛고 있는데도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와주신 분께 이런 말을 꺼내도 될지 모르겠지만, 왕궁의 결계가 이 정도로 쉽게 뚫리는 곳이었나요?’
‘신전에서 왕궁에 깔아둔 결계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쯤 되니까 이런 기예가 가능한 거였다. 왕궁에 설치된 결계에 제 마력이 많이 포함된 것을 이용해, 일시적으로 결계의 성질을 헷갈리게 만드는 꼼수를 부렸다.
제 말을 들은 여인은 잠시 말이 없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저희 둘만의 비밀로 하자는 것에 동의해요. 다만 직접 겪어보니…. 이런 표현 조심스럽지만, 암살에 딱 좋은 능력이 아닌가 싶었어요.’
‘…….’
‘신의를 지키고자 노력할 겁니다. 그러나 혹시 전하께 무슨 일이 생길 여지가 생긴다면, 저는 비밀을 지킬 수 없어요.’
그저 사실을 고하는 것 같은 담담한 목소리였다. 제 손짓 하나면 바닥으로 추락할 수 있음에도 여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저 또한 전하께 가해지는 암살에 동조할 수 있다 생각하시는 거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