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마법 같은 추수감사절 (6)
그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호위로서 비전하를 똑바로 보필하지 못해, 비전하께서 해를 입으실 수도 있었던 점, 어떻게 사죄를 드려도 모자랍니다.”
어쨌거나 자신은 제라니아의 호위였고 그를 우선해야 맞았다. 밀드레드를 따라온 시점에서 자신은 임무를 방조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어떤 사정이 있었던 간에 그것은 제 잘못이었다.
제라니아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아 망정이지, 무슨 일이 생겼다면 어쩔 뻔했는가. 고개를 수그리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리암은 곧게 자세를 유지했다.
제라니아가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리암 경.”
“예.”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리암에게 제라니아는 차분히 말했다.
“그대의 마음은 잘 알겠어요. 허나 그대의 진언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린 내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본디라면 임무를 방기한 죄로 근신을 명해야 할 것이나, 석 달간의 급여를 삭감하는 것으로 징계를 대신하겠습니다.”
시찰이 코앞인데 근신령을 내릴 수는 없었다. 제라니아는 여전히 리암을 신뢰했다. 밀드레드가 여기 있는 걸 보니 무슨 상황이었을지는 대략 감이 잡혔다. 제가 리암의 입장이었어도 외면하기 어려웠겠지.
“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만 할 것입니다.”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곤란했다. 리암이라면 이 말의 의미를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다. 예상대로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예, 비전하.”
정중하게 대답하는 리암에게 한참 뜸을 들인 뒤, 제라니아는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일어나.”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난 리암이 제라니아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가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미안해. 너 정말 괜찮은 거지? 무사해서 다행이긴 하지만,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정말….”
“나야말로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고집부려서 미안해.”
제가 부렸던 일탈에 대해 사과를 건네며 제라니아는 차분히 제게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물론 왕궁에 몰래 들어간 사실은 제외하고.
이야기를 들은 리암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신전 쪽 사람이랑 만났다고?”
“응.”
제라니아는 곰곰이 아까 전 보았던 벤자민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를 보고 느낀 인상은 여러 가지였지만, 총평을 하자면.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어.”
엉뚱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에게는 별다른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다시 만날 일이 또 있을까 싶지마는 여러 의미에서 참 인상 깊기는 했다.
좋은 인연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마냥 단정할 수만은 없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아무튼 이 사실은 비밀로 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전하께도?”
“그건 내가 직접 말하려고.”
덤덤하게 대답한 제라니아가 밀드레드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밀드레드 씨, 리암이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온 거죠?”
“아, 네.”
말없이 서 있던 밀드레드가 두 손을 꼭 모은 채로 대답했다. 입구에 오래 서 있었는지 밀드레드의 안색이 살짝 질려 있는 걸 눈치챈 제라니아가 리암에게 눈짓했다.
그가 종을 울리자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가 나타났다. 눈치껏 자리를 피해 있던 집사에게 따뜻한 차를 요구하며 제라니아는 둘을 돌아보았다.
“나는 다른 응접실에 가 있을게. 둘이서 얘기 끝내면 불러.”
“같이 가.”
“…나를 눈치 없는 사람으로 만들 셈이야?”
자신을 붙잡는 리암의 손을 제라니아는 부드럽게 거절했다. 힘주어 잡은 건 아닌지라 손은 쉽게 떨어져 나갔다.
“저도 괜찮아요.”
차분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고막을 잡아끌었다. 옆을 돌아보자 밀드레드가 다소곳이 손을 모은 채 제라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풍부한 감정이 물결을 타듯 여인의 푸른 눈동자에 넘실거렸다. 깔끔하게 관리되었으나 소매가 해어진 낡은 옷차림을 하고도 주눅 든 기색이 없다. 정직한 시선은 어찌 보면 자신보다 순수하다 느껴져, 제라니아는 조금 웃고 말았다.
“비전하께서 불편하지 않으시다면요.”
제 웃음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밀드레드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여인에게 무안을 주고 싶지 않았는지라, 제라니아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낭패라는 듯 눈을 깜빡이는 리암은 가볍게 무시했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간 세 사람의 앞에 집사가 차를 우려 내놓았다. 몰리가 타주던 차에 비해서는 다소 서툴다 싶은 솜씨였지만 제라니아는 아무렇지 않게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리암 경.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이런 얘기를 하기는 좀 그렇지만…. 저택에 좀 다녀와 주지 않겠어요?”
“저택이요?”
“기사들을 좀 데려와 줬으면 해서요.”
“예, 알겠습니다.”
리암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현관 쪽으로 향하는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에 귀를 기울이던 제라니아가 입을 열었다.
“밀드레드 씨.”
“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거죠?”
그래서 자신을 붙잡은 것 아니냐고 묻자, 밀드레드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저번에 귀한 발걸음을 마다 않고 찾아와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직접 뵙고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지금이 아니면 다시 뵐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아서요.”
“괜찮아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니까.”
“그리고…. 비전하께서 제 손을 들어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밀드레드의 하얀 손가락이 따뜻한 찻잔을 양손으로 감쌌다. 침묵 속에서 제라니아는 가만히 상대를 기다려 주었다. 짧지만 긴 시간 끝에, 밀드레드는 입을 열었다.
“그 말씀, 진담으로 받아들여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이미 결심한 건가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밀드레드의 얼굴이 갈색 찻물 위로 어른거렸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가요?”
제라니아의 입술이 호기심을 툭 뱉어냈다.
신분과 능력, 외모 등 모든 걸 다 갖춘 귀족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하는 것을 동경하는 이는 많았다. 《아름다운 소녀 보니타》 이야기만 해도 왕자의 첫사랑이 된 평민 소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 않던가.
눈앞의 여인은 적어도 신분 상승의 꿈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대귀족으로 산다는 건 그만큼 많은 제약과 책임이 따라온다는 말과도 같았다. 둘이 다시 만난다면, 오히려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리…. 도련님이 들으면 서운해하실지도 모른다 생각하지만…. 저 역시 사실 공작 각하의 말이 틀리지 않다 생각해요.”
씁쓸하게 웃는 여인의 얼굴은 그마저도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아마 열심히 노력한다 해도 결코 메우지 못할 틈은 존재하겠죠. 그러고도 잘될지 장담할 수도 없고요.”
“…….”
“하지만 비전하. 사람은 이성적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다는 걸, 저는 그분과의 이별에서 깨달았답니다.”
밀드레드는 추억을 되짚듯 아련한 시선을 했다.
“도련님과 함께할 때 마냥 행복하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답답하고 힘들 때도 있고, 싸우기도 많이 싸웠으니까요. 그래도 제 옆에, 도련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건 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저는 겁이 많고 미련한지라, 편지를 받고 나서야 확신할 수 있었어요. 제 진심을요.”
직접적인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보이는 것이 있다. 상대를 떠올리는 눈빛, 무의식적인 행동, 그 사람을 입에 담을 때 목소리의 울림과 같은 사소한 것들.
눈앞의 여인은 리암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을 잘 모르는 제 눈에도 훤히 보일 만큼.
이런 게 사랑인 걸까.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군요.”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 이럴까. 목이 타는 느낌에 제라니아는 홍차를 한 모금 더 머금었다.
“잘 될 거예요. 그게 무엇이든.”
마치 다 걸러내지 못한 잎차처럼, 격려를 건네는 제라니아의 눈동자에 부산물처럼 떠올라 있던 심란함이 천천히 사라졌다.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 * *
어두운 밤, 조용히 숨어드는 그림자가 있었다. 탑의 꼭대기, 불 하나 켜지 않아 깜깜한 방의 창문을 훌쩍 넘어 들어온 남자가 조용히 손가락을 튕겼다. 방 안 어딘가에 놓여 있던 등불이 확 켜졌다. 일렁이는 불꽃이 방 안을 따뜻하게 비췄다.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서늘한 목소리에 벤자민은 속으로 이크, 탄성을 내지르며 옆을 돌아보았다. 열려 있는 문가에 금발의 여성이 팔짱을 끼고 기대어 서 있었다.
서른 중후반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성의 눈동자는 그 머리칼의 색과 비슷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손마저도 새하얀 장갑으로 꽁꽁 싸매고 있어 더욱 신성해 보였다.
이피나스 에이르, 신전에 단 하나뿐인 아나샤. 접촉을 통해 상대의 과거를 읽어내는 자.
“재미있는 인연을 만났거든요, 선배.”
“번제에 불참한 핑계치고는 얄팍한데. 그리고 똑바로 호칭을 불러.”
친한 척 굴지 말라는 일갈에도 벤자민은 사람 좋게 웃었다.
“에이, 정말이라니까요. 믿지 못하시겠다면, 잡아보시면 알 거 아닙니까. 아, 대신 보신 건 비밀로 해주세요.”
자진납세를 하겠다는 듯 얌전히 손을 내미는 벤자민을 보며 에이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언제 봐도 넌 참 이상해. 두렵지 않은 건가?”
내 능력이.
에이르가 늘 착용하고 다니는 새하얗고 고급스러운 장갑을 힐끗 본 벤자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별로요.”
“…하긴, 그럴 만큼 생각이나 하면 다행이겠지.”
“선배는 정말 저한테 유독 평이 야박하신 것 같아요.”
“선배라고 부르지 말랬지. 이피나스 벤자민.”
“같은 대학 선후배끼리인데 뭐 어떻습니까. 비록 제가 졸업을 한참 늦게 하긴 했지만.”
“현재 이피나스 중 신학대를 졸업하지 않은 인간은 없어. 왜 내게만 이러는 거냐고 묻는 거야.”
“그거야…. 이 신전에서 선배만큼 믿을 만한 사람은 없으니까요?”
헤실 웃으면서도 뼈 있는 대답을 던지는 벤자민을 향해 에이르는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딱히 잘해준 기억은 없는데.”
“그게 선배의 매력이죠.”
“…어째 해가 지날수록 헛소리가 늘어만 가는군.”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젓던 에이르가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아무튼 준비해, 호출이다.”
“호출이라면.”
“아비스가 이피나스 전원을 소집했어. 네 휘하 사제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짓은 적당히 해.”
그제야 벤자민은 왜 에이르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제가 없으니 사제들이 에이르를 찾아가 하소연을 한 모양이었다.
문을 닫고 재빨리 신관복으로 환복한 뒤, 벤자민은 에이르를 따라 방 밖으로 나왔다. 간간이 벽에 불이 밝혀져 있지만,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복도를 걸어가며 벤자민은 제 뒤통수에 양손을 포개었다.
“저까지 참석하라 하는 건 꽤 의외네요. 무슨 일이길래.”
가볍게 중얼거리는 벤자민보다 한 걸음 앞서 걸어가며 에이르는 덤덤히 말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가보면 알겠지.”
모든 건 신의 뜻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