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53화 (54/171)

제53화. 마법 같은 추수감사절 (5)

“보는 눈이 너무 많지 않았습니까. 한순간에 사람이 사라지면 난리가 날 게 뻔하니까요. 원래, 생명의 위협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면 외부에서 사적으로 능력을 사용하는 건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능력을 사용하고 계시잖아요.”

“왕족은 모든 일에서 예외가 되니까요.”

즉, 제라니아를 보호한다는 명분이 있으니 능력을 마음껏 사용한다 이거였다. 왜 제게 동의하냐고 물었는지 깨닫고, 제라니아는 고개를 돌려 그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넉살 좋게 웃는 얼굴에서 묘하게 얄미운 느낌이 났다.

“아무튼, 어디로 모실까요.”

진지하게 묻는 벤자민에게 제라니아는 문득 생각난 장소를 읊었다.

“혹시, 왕궁으로 갈 수도 있나요?”

제가 말해놓고도 제라니아는 살짝 당황했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한 거지?

“그건 좀 곤란한데요. 허가 없이 왕궁의 결계를 뚫고 들어가는 건 금지되어 있어서. 절 감옥에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장난스럽게 목을 긋는 벤자민에게 제라니아는 살짝 시무룩해진 얼굴로 말했다.

“하긴 그렇겠죠.”

슬며시 가라앉은 왕세자비의 분위기에 벤자민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어렸다. 그가 넌지시 질문했다.

“혹시 왕세자 전하를 만나러 가시던 길이었습니까?”

“아, 그건 아닌데…. 그냥 얼굴이나 볼 수 있을까 해서요.”

설마 일정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건 아니겠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이 묘했다.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 사실 다른 일행이 있기도 하고요.”

민망한 듯 덧붙이며 제라니아는 저택이 있는 쪽으로 몸을 움직여 리암으로 보이는 이를 찾았다. 밤이긴 했지만 불빛이 밝은 데다, 건물 지붕에서 성인의 키만큼 높은 위치라 사람의 얼굴을 분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걱정하고 있을 텐데. 혹시 먼저 저택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까 싶다가도, 리암의 성격상 그럴 리 없었다.

“들키지 않는 선이라면 가능하긴 합니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벤자민을 돌아본 제라니아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네?”

“조금 복잡해지긴 하지만요.”

벤자민은 곰곰이 생각했다. 왕궁 주변으로 결계를 살짝 중첩시킨 뒤 기존의 결계에 닿지 않게 공간을 접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왕궁의 결계는 술자를 중심으로 하는 게 아닌, 마법진을 중심으로 하기도 했거니와 마력의 일부를 제공한 게 자신인 만큼 곧장 눈치 채이지는 않을 것이다.

세밀한 제어를 요구하는 데다, 힘을 잘못 조절하면 바로 결계가 어그러져서 들킬 것이라는 점을 뺀다면.

물론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가 변변한 배경 하나 없이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능력 때문이었으니까.

“5분 정도라면 어떻게든 될 것 같습니다. 정말 얼굴만 보고 오시는 걸로 괜찮으시다면.”

제법 시원하게 승낙하는 벤자민과 달리 제라니아는 당황한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건 괜찮지만….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생각은 없어요.”

무심결에 그의 얼굴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정말 보러 가게 생겼다. 손사래를 치는 제라니아에게 벤자민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뭐 어떻습니까. 총애하는 비가 자길 보러 여기까지 왔다는데 설마 벌을 내리시겠습니까. 사람이 한 번쯤은 사고도 좀 치고 살아야죠.”

경험담처럼 들리는 건 기분 탓이겠지?

개구지게 웃는 벤자민을 보며 제라니아는 묘한 불안함에 휩싸였다. 이제껏 마주쳤던 신관들은 대개 엄숙한 느낌이 강했는데, 남자의 태도는 가벼워도 정말 가벼웠다. 그런데도 경박한 느낌이 들지 않는 게 신기했다.

저렇게 말하지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이다. 벤자민은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나요?”

제라니아는 조용히 질문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만 딱 듣기에도 만만해 보이는 일은 아니었다. 이제 겨우 두 번 마주한 상대를 위해 이렇게까지 호의를 베풀 이유가 있나. 제가 사고를 치게 해 프란츠의 흠을 잡으려는 건 아닐까, 머릿속에 별별 생각이 오갔다.

벤자민은 이상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절 도와주셨잖습니까. 은혜를 입었으면 갚아야 하는 법이니까요.”

벤자민은 하하 웃었다. 그는 눈앞의 여인이 정말로 흥미로웠다. 제가 누군지 알아채지 못했음에도 사람을 구하고자 손을 뻗는가. 망설임 없이 제 손을 붙잡던 손의 온기가 아직도 생생했다.

제 신분을 알고 나면 대부분의 귀족은 경멸 어린 눈을 한다. 아무리 아닌 척하더라도 순간적으로 스쳐가는 시선은 속일 수 없었다.

동정도, 연민도, 경멸도 없이 순수하게 호기심만을 담은 눈동자. 정체를 밝혔을 때 여인의 눈은 딱 그랬다. 비렁뱅이 출신인 이가 제 몸에 손을 댔는데 화를 내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재미있는 사람을 발견했다는 생각에, 벤자민은 간만에 몹시 유쾌해졌다.

“대신 말씀드렸다시피, 들키지 않는 게 우선입니다. 얼굴만 보고 나오시는 겁니다. 이 일은 저희 둘 사이의 비밀로 남는 거고요.”

벤자민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딱 보기에도 서른이 넘은 남자가 뭐 이리 소년 같은 얼굴을 하는지. 제라니아는 마음을 굳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승낙의 말을 듣자마자 벤자민은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제 발밑으로 내려다보이는 왕궁에 제라니아는 다시금 눈을 깜빡거렸다. 순식간에 휙휙 바뀌는 풍경이 신기하면서도 도통 익숙해지지 않았다.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을 겁니다.”

제 어깨에 닿아 있던 손의 온기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책의 페이지를 넘기듯 시야가 또다시 바뀌었다.

제라니아는 바로 앞에 보이는 창문을 알아보았다. 세자궁이 아니라 처음 그의 부하들을 소개받았던 집무실에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었다.

2층에 자리한, 꼭 닫혀 있는 창문 안으로 프란츠의 얼굴이 보였다. 문이 닫혀 있어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제라니아는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서도 프란츠의 옆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신과 있을 때와 달리 차갑고 무료해 보이는 얼굴이 낯설었지만,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피곤해 보이는데 잠은 제대로 잔 걸까. 오늘 일에 대해 들으면 아무래도 걱정하려나.

창문 밖에 둥둥 떠 있던 제라니아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는 프란츠를 보고 깜짝 놀랐다. 창문에 손을 디딘 제라니아가 그 반동으로 뒤로 살짝 물러난 순간, 창문이 활짝 열렸다.

물끄러미 제 쪽을 바라보는 프란츠와 시선을 마주했다. 분명 이쪽을 보고 있는데도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꾹 다물려 있는 붉은 입술과 무표정한 낯, 깊다 못해 텅 비어 있는 듯한 눈동자를 보니 심장이 철렁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당신은 이런 얼굴을 하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당신의 모습조차, 사실은 잘 포장해서 내놓은 껍데기가 아닌가 하는.

그렇다면, 진짜 당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얼굴에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멈춘 손이 프란츠의 볼을 살며시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들키면 안 된다고 했으니 직접 만져서는 안 됐다.

그러고 보면 프란츠가 제 얼굴을 만지는 일은 자주 있었어도, 제 쪽에서 먼저 손을 댄 적은 없구나.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결을 따라 부드럽게 흩날렸다. 아름답게 조형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보다 훨씬 강하고 가진 게 많은 사람인데, 어째서 당신을 보고 있으면 이런 감정이 드는 걸까.

분명 여기 있는데도 눈을 떼면 어딘가로 훌쩍 사라질 것만 같다는, 그런 느낌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스멀스멀 피부를 타고 올라오는 불안함에 제라니아는 조심히 덧붙였다.

‘내일 봐요, 프란츠.’

꼭이요. 입 모양으로만 작게 속삭인 제라니아의 모습이 곧 그의 앞에서 사라졌다.

“전하? 왜 창문을 여십니까.”

갑작스러운 프란츠의 행동에 티레인이 의문을 표했다. 묵묵히 창문을 바라보고 있던 프란츠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는데.”

“시선이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던 티레인이 제롬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안 느껴집니다.”

차분하게 고하는 목소리는 언제나와 같이 진실되었고, 프란츠는 별다른 의문을 표하지 않은 채 창문을 닫았다.

권태로워 보이는 미소가 그의 입가에 다시금 자리했다.

* * *

저택에 밀드레드를 데려다준 뒤 리암은 밖으로 나갔다. 길을 되짚어 걸어가는 리암의 얼굴에 초조함이 가득했다. 제라니아라면 아마 저택으로 오고 있을 것이다. 머리로는 아는데 걸음걸이는 점차 빨라졌다.

침착하자, 리암 그라시아. 별일 없을 거야. 말마따나 나보다 더 수도를 잘 알고 있는 녀석이니까.

부지런히 왔던 길을 걸어가는 리암의 옆에 보이는 골목길에서 누군가가 훌쩍 뛰어나왔다. 얼떨결에 손을 뻗어 그를 붙잡은 리암이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 소리쳤다.

“제라니아!”

“리암.”

태연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제라니아를 본 리암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친 데는 없지? 무슨 일 생겼던 건 아니지?”

황급히 저를 구석구석 살피는 리암의 시선에 제라니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 일 없었어.”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나중에 신전으로 오셔서 저를 찾으시면 됩니다.’ 리암이 보이는 장소 근처에 자신을 내려준 뒤, 벤자민은 곧장 모습을 감췄다. 시작부터 끝까지 참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제라니아는 리암에게 말했다.

“일단 저택으로 가자. 할 말이 있어.”

“…그래.”

부지런히 걸어 리암의 저택으로 들어가자, 입구에 새까만 머리칼의 여성이 서 있었다. 창백해 보일 정도로 하얀 피부의 미인은 줄리아 파시안과 무척 닮아 있었다.

“밀드레드 파시안…?”

“네, 비전하를 뵙습니다.”

바로 알아보고 고개를 숙이는 밀드레드에게 제라니아는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리암은 제라니아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랐는지 살짝 입을 벌린 밀드레드와 달리, 멀뚱히 서 있는 제라니아를 올려다보며 리암은 진지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사죄를 올리는 리암의 푸른 눈동자에 제라니아의 덤덤한 얼굴이 가득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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