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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52화 (53/171)
  • 제52화. 마법 같은 추수감사절 (4)

    비전하라는 호칭을 듣고 제라니아는 남자를 홱 돌아보았다. 남자는 하하 웃으며 경쾌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어느 인적이 드물어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간 남자가 후드를 벗었다. 예를 갖추어 인사하는 남자의 얼굴이 근처 건물에서 피어 나오는 불빛을 받아 제법 선명하게 드러났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했는데, 그제야 제라니아는 그를 어디에서 봤는지 명확히 떠올렸다.

    결혼식을 올렸던 예배당에서 신관들 쪽에 서 있던 사람. 푸른색 줄이 그어져 있는 새하얀 신관복을 입고 있던 남자. 여성 하나를 제외하면 다섯 중 제일 젊었다. 게다가 결계사.

    그렇다면.

    제라니아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이피나스 벤자민 산드리아?”

    “정답입니다. 역시 현명하신 분.”

    부드럽게 입매를 올려 웃는 남자를 향해 제라니아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신전의 최고위 사제가 그런 차림으로 저잣거리 한복판에 나와도 되는 건가요?”

    이피나스.

    신전의 수장인 아비스 바로 아래 직책인 다섯 명의 사제들을 일컫는 말로, 아비스와 더불어 신관들 모두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존재들이었다.

    개중에서도 결계 마법을 가진 이피나스는 신전을 지키는 거대한 결계를 주관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때문에 뛰어난 능력은 물론이거니와 신에 대한 경외심과 신실함, 책임감이 가장 크게 요구되는 직책이었다.

    대신전 산드리아를 지키는 신전의 수호자, 라고 불리는 이가 바로 제 앞에 있었다.

    “뭐 어떻습니까. 비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제 신분엔 이 정도가 딱 맞지요. 아실 텐데요. 유명하니까.”

    그는 평민 출신의 남자로, 무려 빈민가에서 자랐던 이였다. 신전에 들어간 후에도 온갖 텃세와 차별에 시달렸지만 오로지 그 능력 하나로 이피나스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제라니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보통 결계사인 이피나스는 신전 밖으로 나오는 게 금지된다고 해서 한 말이었어요. 당신이 어디에 있느냐는 당신의 자유겠죠.”

    차분하게 대답하는 제라니아를 의아한 듯 쳐다보던 그가 가볍게 덧붙였다.

    “수도 밖을 나서는 건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금지되어 있긴 합니다. 그렇다고 외출까지 금지되는 건 아니라서요. 저 하나 없다고 대신전의 결계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죠.”

    “하지만, 지금은 신전에서 번제를 드리고 있을 시간이 아닌가요?”

    “하하.”

    슬쩍 시선을 피하는 벤자민의 모습에 제라니아는 직감했다. 몰래 빠져나왔구나.

    그나저나 자신의 의도대로 상황을 조작할 수 있다니, 척 듣기에도 위험한 능력이 아닌가.

    녹색 눈동자에 경계하는 빛이 서리는 것을 알아챈 벤자민이 뺨을 긁적였다.

    “경계하시는 것을 이해합니다만, 밖에서 능력을 사용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건 금지되어 있어서요.”

    그래서 방금 전, 그냥 멱살을 붙잡혀주고 있었던 걸까.

    제라니아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벤자민이 선수를 쳤다.

    “비전하야말로, 이런 저잣거리 한복판에 혼자 나와 계셔도 되는 겁니까. 무슨 일이라도 생기시면 어쩌시려고요.”

    제가 나쁜 놈이었으면 큰일 아니었겠냐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벤자민의 눈동자는 제법 진지했다. 제라니아는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혼자 나온 건 아니고, 원래 일행이 있었는데 놓쳤을 뿐이에요.”

    지금쯤이면 리암도 자신을 찾고 있겠지.

    골목으로 들어온 탓인지 주변은 무척 깜깜했다. 불빛을 들고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골목 밖으로 내다보였다. 그걸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제라니아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냥, 밖에 나오고 싶었거든요.”

    충동적으로 행동한 걸 인정한다.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리암에게 그의 충성을 시험하듯이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차분히 되짚어보면 내가 왜 그랬을까 싶었다. 물론 눈에 띄지 않을 것이라는 걸 계산하고 행동하긴 했지만, 최근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리암의 걱정은 타당했고 자신이 고집을 부린 게 맞았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밖으로 나오고 싶었다. 그곳에서. 입장, 행동, 의무,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서.

    나를 둘러싼 모든 시선들에서.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답답함에 질식할 것 같았다. 리암마저 없었다면 아마 홀로 외출했겠지.

    가끔씩 그럴 때가 있었다.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가끔 자신을 얽매는 모든 것을 떨쳐내고 싶은 순간이. 모두가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들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싶었다.

    나를 둘러싼 공기는 평화롭고 안온했다. 그 안온함에 숨이 막힐 때가 있었다.

    ‘전하야말로, 그런 일들을 겪으시면서도 왕권을 포기하지 않으시잖아요. 왜 저는 그러면 안 되나요?’

    몸을 사려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든다.

    왜 내게는 위험이 허용되지 않을까.

    어째서 내가 가질 수 있는 역할은 이런 것뿐인 걸까.

    프란츠가 나를 위해 마련해둔 온실은 무척 따뜻하고 평온했다. 왕궁에 들어간 첫날을 제외하고, 내게 별다른 위협이 닥쳐오지 않은 건 분명 그 덕분일 것이다. 그가 얼마나 내 안전에 신경 쓰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과연 그것에 만족하고 순응해야만 할까.

    모두는 내게 안전을 말하지만, 그게 보석함에 담긴 보석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나. 약한 자는 언제나 두려워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걸까? 약간의 위험조차 감수하지 못할 만큼?

    나는 얌전히, 프란츠와 모두가 원하는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인간인가?

    가만히 앉아 이룰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스물넷의 인생을 살면서 얻은 교훈이었다.

    제라니아는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내걸었다.

    …일단 그만하자.

    못된 충동을 언제나와 같이 내리눌렀다.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사람이 어떻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겠는가. 그래서도 안 됐다.

    나는 역시 이상한 걸까.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인데, 왜 나는 그러지 못할까.

    오래전 싹을 잘라냈다고 생각했던 뿌리에서 다시 싹이 트고 있었다. 관심이라는 양분을 먹고 점차 커져가는 이 의문의 종착점이 어디일지 궁금했다.

    제라니아는 이 의문이 다시금 자라나게 된 계기인 프란츠의 얼굴을 떠올렸다.

    ‘…맞는 말이군요.’

    당신을 만난 뒤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 오로지 당신만이 이런 나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나를 보호하려고만 들었다. 내 편의를 맞춰주는 것 같지만 결국 나를 일정선 안으로는 들이려 하지 않는다.

    ‘당연히, 오래 살 겁니다.’

    프란츠가 그 말을 내뱉은 후로 쭉 이 상태였다. 그때 느꼈던 위화감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했지만, 말할 수 없었다. 기다리겠다고 했으니 기다려야만 했다. 머리로는 아는데 감정은 그걸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을 뿐.

    그때 이야기를 들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 이야기가 프란츠에게 있어 역린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고, 그래서 제지했다.

    그걸 입 밖에 내는 순간, 그는 다시 선을 그었겠지. 고고한 얼굴로 선 밖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그를 떠올리니 괴로웠다. 답답함은 해소되었을지 몰라도 관계는 아마 지금보다 더 경직되었을지 모른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 되었던 다른 이들과 달리 프란츠는 너무 가까웠고, 그래서인지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 발을 디뎌야할지 모르겠다. 관계에 대해 이 정도로 고민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차라리 식을 풀듯이, 답이 딱 떨어진다면 좋으련만.

    “뭐, 말씀하시는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만….”

    그럴 때가 있죠. 나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제라니아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벤자민이 이해한다는 듯 빙그레 웃고 있었다.

    “비전하께서도, 가끔 어딘가로 떠나고 싶으실 때가 있으십니까?”

    그는 수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신전에, 자신이 가진 직책에 내재된 의무에 묶여 있으니까. 제라니아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는 당신은요?”

    “저야 뭐.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어딘가로 가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걸 말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나온 건가요?”

    벤자민은 웃는 얼굴 그대로 말이 없었다. 그것이 긍정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가 주의를 환기하려는 듯 가볍게 손뼉을 쳤다.

    “아무튼, 일행을 찾고 계시다는 거였죠.”

    “네.”

    “도와드릴까요?”

    “당신이?”

    고개를 끄덕이는 벤자민에게 제라니아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도와준다면 감사하긴 하겠지만….”

    무슨 꿍꿍이냐. 그렇게 묻는 듯한 시선에 벤자민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신을 섬기는 자로서, 곤란에 빠진 이를 내버려두는 건 도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

    “아무튼, 동의하신 겁니다?”

    그 말과 함께 벤자민은 제라니아의 뒤로 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두 사람은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헉!”

    저도 모르게 발버둥을 치던 제라니아에게 벤자민이 작게 속삭였다.

    “안 떨어집니다. 제가 이 손을 놓더라도요.”

    낮고 차분한 목소리는 묘하게 마음을 안정시키는 느낌이 있었다. 제라니아는 발밑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천천히 앞으로 발을 내딛자 놀랍게도 몸이 움직였다. 제라니아는 신기함 반, 걱정 반을 담아 말했다.

    “…그래도 손은 놓지 마세요.”

    소심하게 덧붙이자 벤자민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네. 알겠습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반딧불이처럼 노란색의 불빛들이 점점이 거리를 따라 일렁거리는 모습은 은하수를 떠올리게 했다. 저 멀리 광장으로는 모여 있는 사람들과 연극판이 보였다.

    하늘을 날고 있으니 시선을 끌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어쩌다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쳤다 싶었어도 그들은 곧 감흥 없이 고개를 돌렸다.

    아까와 같이, 이쪽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거죠?”

    조심히 공중을 걸어가며 묻는 제라니아에게 벤자민이 빙그레 웃으며 속삭였다.

    “말씀드렸잖습니까. 결계 내에서의 모든 일은 술사의 마음대로라고 말이죠.”

    “여기가 결계 안이라고요?”

    “네, 대충 저기부터 저기까지.”

    한 손을 들어 중앙 쪽에 자리한 광장을 가리켰던 그가 몸을 틀어 저 끝에 보이는 성벽을 가리켰다. 교묘하게 대신전과 왕궁, 광장에 닿지 않는 정도의 범위였다.

    “그렇게 범위가 넓어요?”

    “결계의 내구성을 어느 정도 포기하면 가능합니다.”

    이것저것 몇 겹으로 결계를 치거나 외부의 힘이 개입한다면 좀 어렵겠지만, 환상 결계 하나만을 끌고 간다면 이 정도 범위는 벤자민에게 있어서 간단했다.

    이미 조성되어 있는 결계와 충돌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럼 바로 들키니까.

    “그런데, 왜 아까는 결계를 치지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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