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마법 같은 추수감사절 (3)
“이 이상은 못 들어갈 것 같습니다.”
길을 가득 막고 있는 인파를 본 마부가 난감한 얼굴을 했다. 마차에 타고 있던 새까만 머리칼의 여인이 조용히 대답했다.
“여기서 내려주세요.”
마부에게 삯을 치른 뒤, 밀드레드는 인파를 비집고 그 속으로 들어갔다. 목적지인 저택까지는 한참 남았으니 부지런히 걸어야 했다.
벌써 밤이 되었지만 불 켜진 건물들과 등불을 든 이들이 많은 덕에 나아가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이 시야를 일부 가렸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줄리아는 자신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아 했으나, 두 사람이 같이 수도로 올라오기는 아무래도 가진 돈이 부족했다. 편지를 보냈다면 쉬운 일이었을지도 모르나, 자신 역시 더는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수도에는 질 낮은 놈들도 있다고 하니, 조심해야 해!’
줄리아의 주의를 떠올리며 밀드레드는 모자를 더욱 깊게 눌러썼다. 총총 걸어 중심부 쪽으로 향하던 중, 그는 제 옆을 스쳐 가던 누군가와 어깨를 세게 부딪쳤다.
“아, 죄송합니다.”
조용히 대답하고 지나가려던 밀드레드의 어깨가 거칠게 붙들렸다. 옆을 돌아보자 웬 남자가 그를 붙잡고 있었다.
밀드레드보다 약간 큰 키, 좁은 어깨. 생쥐를 닮은 두상이 꽤나 야비하게 생겼다. 입을 여는 남자의 얼굴에서 좁쌀만 한 주근깨가 불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좀 더 성의 있게 사과를 해야 할 거 아니요?”
“죄송해요. 어두워서 그런지 앞을 잘 못 봤네요.”
저쪽이 먼저 부딪친 것에 가까웠으나 밀드레드는 재차 사과를 건넸다. 이런 일에 실랑이를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제가 지금 길이 바빠서요. 이만 놔주시겠어요?”
낭랑한 목소리에 남자는 의아한 듯 눈을 깜빡이다 밀드레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탐색하는 듯한 시선에 소름이 돋았다. 밀드레드는 애써 침착하게 어깨를 잡은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팔을 붙잡혔다.
“놔주세요.”
“혼자인 것 같은데, 좋은 곳을 알지.”
“이거 놔요!”
밀드레드가 있는 힘껏 상대의 다리를 걷어찼다. 악! 비명을 지르는 남자를 뒤로한 채 밀드레드는 사람들을 비집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금세 숨이 차올랐고, 다리에서는 자꾸만 힘이 빠졌지만 이를 악물었다. 허둥지둥 뛰어가는 여인의 머리에서 모자가 벗겨져 공중을 날아가다가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저년 잡아주쇼!”
상스러운 말이 담긴 목소리가 벼락처럼 그의 귀에 내리꽂혔다. 무작정 앞으로 달려가던 밀드레드의 팔을 커다란 덩치의 누군가가 낚아챘다. 밀드레드의 손이 반사적으로 상대의 얼굴로 향했다.
“이거 놔!”
“진정해!”
목소리를 듣자마자 밀드레드의 팔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 순간만은 북적거리던 소음이 하나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나간 손을 멈추지는 못했는지라 찰싹, 가볍게 뺨을 때리는 소리가 느릿하게 정적을 차지했다.
밀드레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저보다 한 뼘은 큰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보석을 닮은 푸른색 눈동자, 수려한 얼굴을 보자마자 밀드레드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열지 못했다. 사실 숨을 몰아쉬느라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도 있었다. 청년이 한숨을 내쉬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정말 당신이었다니.”
난처한 듯 이맛살을 찌푸리던 청년이 자신들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 짜증스레 소리쳤다.
“뭘 봐! 구경났어?!”
험악하게 소리 지르자 다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가만히 떨리고 있는 손을 애써 꾹 말아 쥐며 밀드레드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청년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밀드레드가 입을 열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리암.”
“수도에는 무슨 일로 온 거야?”
조용히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걸 본 밀드레드는 리암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움찔거리는 리암의 몸을 보며 밀드레드는 나직이 속삭였다.
“널 만나러 왔어.”
리암은 밀드레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밀드레드의 어깨를 양손으로 꽉 붙잡은 그가 돌처럼 무거운 입술을 열어 뻐끔거렸다.
“혼자서?”
“혼자서.”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혼자 여길 와.”
쇳소리를 내는 것처럼 낮아진 음색에 밀드레드는 지지 않고 대꾸했다.
“나 혼자서도 이 정도 여행은 할 수 있어. 너나 줄리아는 나를 너무 과보호해. 나는 툭 건드리면 깨지는 유리장식이 아니야.”
리암은 아무런 말이 없었고, 밀드레드는 그의 반응을 잠자코 기다렸다. 그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미치겠다는 듯 머리를 흔들다가도 밀드레드의 손을 붙잡고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부리나케 뒤를 따라가며 밀드레드가 물었다.
“어디 가?”
“저택. 일단 안전한 곳에 데려다줄게. 거기서 기다려줘.”
“기다리라는 건.”
“나는 일단 할 일이 있어서.”
“할 일?”
나중에 설명하겠다는 말을 덧붙인 뒤, 리암은 걷기 시작했다. 앞서 걸어가는 그의 표정이 비장했다.
* * *
벤자민은 난감했다.
제 멱살을 잡은 이들이 제게 공갈을 치려고 한다는 건 진즉 눈치챘다. 저런 낡아빠진 옷에 1케니나 든다니, 세상 물정 모르는 어딘가의 귀족 도련님이 아닌 이상 비웃을 이야기가 아닌가.
가급적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데, 하필이면 시내 한복판이라 행동에 제약이 컸다. 차라리 으슥한 곳이라면 낫겠는데….
바쁘게 머리를 굴리느라 말이 없었을 뿐인데,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벤자민의 멱살을 붙든 남자는 한층 더 의기양양해졌다.
“이제야 말귀를 알아들은 모….”
“눈 감아요!”
새된 목소리로 외치는 누군가에 벤자민은 재빨리 눈을 감았다. 퍽,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가루들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벤자민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으악!”
“야, 이게 뭐야?!”
“아씨, 눈에 들어갔어!”
“악!”
비명 소리가 들리며 무언가가 우당탕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남자들이 웅성거리는 와중에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던 벤자민은 제 손에 닿는 감촉에 속으로 감탄사를 흘렸다.
‘오?’
“이쪽이에요.”
자신을 끌고 움직이는 누군가를 쫓아 걸어가며 벤자민은 그제야 눈을 떴다. 저보다 한참 작은, 낡은 갈색 망토를 뒤집어쓴 누군가의 뒤통수가 보였다.
“저게 날 밀었어!”
“저기 도망간다! 거기 서!”
고함치는 남자들을 뒤로한 채 제라니아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새하얀 가루를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남자가 그 뒤를 따랐다.
방금 전, 남자를 보고 고민하던 제라니아는 곧 근처에 보이는 가게를 발견했다.
빵집이었다.
망설임은 짧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제법 덩치가 있는 주인장이 그를 맞았다. 주인에게 돈을 내밀며 밀가루 한 포대를 사겠노라 언질하자, 주인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도 은화를 보고 눈을 빛냈다.
이걸 뿌려야 한다 말하는 것에 무슨 일인가 싶어 힐끔 빵집 밖을 내다본 주인은 혀를 찼다.
‘일행이오?’
‘아니요.’
‘그런데 왜 굳이 은화를 써가면서까지?’
1케니면 지금 빵집에 남아 있는 빵 절반을 가져갈 수 있는 돈이었다. 주인의 질문에 제라니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런 치들에게 넘기는 것보다는 선량한 시민한테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요.’
‘그것도 맞는 말이구만.’
주인의 도움으로 무사히 밀가루 세례를 쏟아부은 제라니아는 남자를 이끌고 골목길로 뛰어들었다. 수도에서 6년을 살았고, 그만큼 오래 나다닌 만큼 제라니아는 수도의 곳곳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예상하지 못한 게 있다면.
“…이런.”
건축 자재들로 막혀 있는 길을 보고 제라니아는 살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결혼한 뒤로 몇 달간 수도를 나다닐 일이 없었다 보니, 여기에서 공사가 벌어지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급히 뒤로 돌아서자 밀가루를 털어내고 있는 남자의 얼굴과 더불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 하얀 가루를 본 제라니아는 침음을 흘렸다.
흔적이 남았겠네.
발걸음 소리가 요란스레 골목 밖에서 들렸다. 침착한 표정으로 빠져나갈 길을 궁리하는 제라니아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에 흥미로운 기색이 완연했다.
자재들이 쌓여 있는 구조를 보니, 조심한다면 밟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는 몰라도 제 키에는 꽤 높다 싶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걸 넘어가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바로 맞은편 시내가 나오거든요? 그쪽으로 숨어들면 따돌릴 수 있을 거예요.”
침착하게 설명하며 자재를 붙잡고 올라가려는 제라니아의 팔을 남자가 꽉 붙잡아 제지했다. 가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젓는 남자를 보며 의아해할 틈도 없이, 시끄러운 발소리들이 들렸다.
“이쪽이야! 이쪽에 흔적이 있다!”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 남자들이 하나둘씩 골목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긴장한 채 남자의 앞으로 나선 제라니아는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없잖아?!”
“그럴 리가 없는데? 야, 흔적이 분명 여기서 끊겼다고.”
“벽밖에 없잖아! 야, 이거 낚인 거 아니야?”
코앞에 있는 자신들을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는 이들을 놀란 얼굴로 쳐다보던 제라니아의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가실까요.”
제 어깨에 얹어진 손의 감촉을 느낀 순간, 제라니아는 제 시야가 변하는 것에 눈을 깜빡였다. 어느샌가 자신은 골목 입구에 서서 두리번거리는 남자들을 보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그다음이었다.
“뭐야? 입구가 막혔잖아?!”
“이게 무슨…!”
우왕좌왕하는 남자들의 얼굴이 황당함에 질려 있었다. 경악한 것 같기도 했다.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살며시 얹혔다.
“눈속임에 가깝습니다. 이만 가도록 하죠.”
제라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를 쳐다보았다. 수더분한 인상을 가진 진갈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변이 꽤 어두워 윤곽이 제대로 구분되지는 않았지만, 웃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걷기 시작하는 남자를 따라 제라니아 역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도, 아까와 달리 북적인다는 느낌이 없었다. 아니, 마치 저기 있는 사람들과 다른 공간을 걷는 것 같았다. 분명 움직이고 있음에도 묘하게 정물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낯설었다.
문득, 미아가 될 것 같은 느낌에 제라니아는 뛰듯이 걸어 남자의 옆에 나란히 섰다.
“어떻게 한 거죠?”
“결계 속이라 그렇습니다. 결계 내에서는 결계사가 인식하는 범위 내에서 마음대로 상황을 조작할 수 있으니까요, 비전하. 개입하는 사람이 없어서 수월한 감은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