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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50화 (51/171)
  • 제50화. 마법 같은 추수감사절 (2)

    그런 그들의 옆에 자리한 커다란 아치형의 창문 너머로 불빛이 흘러들어왔다.

    이미 새까맣게 변한 하늘과 달리 바깥은 여전히 환했다. 등불을 들고 돌아다니는 이도 많았지만 불이 켜진 건물들도 평소를 훨씬 상회했다.

    추수감사절 기간 동안 벌어지는 행사는 왕실의 몫만이 아니었다. 왕실이 행진하는 것이 낮이라면, 신전이 활약하는 시간은 밤이었다.

    불우한 이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것을 기본으로, 수도에 있는 대신전에서는 주신께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번제를 드린다. 밤의 어둠을 뚫고 타올라가는 불꽃들이 마법의 영향을 받아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은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수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펠레타 광장에서는 낮에는 기사들을 동원한 기마전이, 밤에는 같은 자리에서 연극이 상영되었다.

    신전에서 주관하는 만큼 연극의 주제는 주로 프란의 경전에 나오는 설화를 모티브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행사 기간, 광장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결계를 치고 상황을 통제함에도 부상자나 사망자가 늘 생기는 만큼 사람들을 흩어놓고자, 배우들은 수레를 타고 돌아다니며 연극을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고전이 명작이라고, 광장으로 몰리는 사람의 수는 여전했다.

    저녁 식사를 다 마친 뒤에도 그들은 벽난로 주변에 모여 앉아 수다를 떨었다. 넷 중 가장 외부 활동이 많은 만큼 이야기를 주도하는 건 주로 코델리아였다.

    “맞아, 나 저번에 엄청 잘생긴 남자 봤다?”

    코델리아의 눈동자에 벽난로의 불꽃이 반사되어 빛났다. 소파에 앉아 하녀장이 준비해준 간식을 먹으며 귀를 기울이던 세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칼리아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얼마나 잘생겼길래 네 입에서 엄청 잘생겼단 소리가 나와?”

    코델리아의 취향은 미남보다는 차라리 미청년 쪽에 가까웠다. 보통 사교계에서는 선이 굵고 야성미가 넘치는 남자가 선호되는 만큼 별스럽다는 소리를 듣곤 했지만 코델리아는 꿋꿋이 말했다.

    남자는 일단 잘생겨야 해!

    “음…. 그간 본 남자들 중 손꼽히게 잘생겼어. 나이는 내 또래로 보이던데…. 새빨개진 얼굴로 나한테 꽃을 주더라.”

    차려입은 옷의 재질을 보면 상당한 부자일 게 분명했다. 키는 자신을 훌쩍 넘었고 다정다감해 보이는 인상에 눈동자가 특히 예뻤다. 푸른빛이 감도는 새까만 머리카락에, 빨려들 것같이 푸른 눈동자가 특히 매력적이었다.

    “딱 봐도 너한테 관심 있네. 그래서?”

    “꽃은 받았는데…. 이름을 못 들어서. 뭐 다시 만날 일이 있지 않을까? 그때도 내가 좋으면 말 걸겠지 뭐.”

    헤실헤실 웃는 코델리아의 얼굴이 달덩이처럼 환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동생이 즐거워하는 모습에 두 자매는 격려하듯이 잘됐으면 좋겠다는 덕담을 남겼다.

    물론, 맞은편에 앉아 있던 리암은 픽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정말 안타깝다.”

    “뭐가?”

    “얼굴에 홀린 가엾은 희생양이 여기 또….”

    “야!”

    그렇게 투덕거리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창밖을 본 리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난 간다.”

    “벌써?”

    좀 더 있다 가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코델리아에게 리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만 있는 저택에 내가 오래 머물러서 뭐 해. 오해 사기 딱 좋기만 하지.”

    “집사도 있고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여자만 있긴 무슨.”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거지. 그리고, 오랜만에 시내 구경이나 좀 할까 해서.”

    “잠깐만, 나도 같이 갈래.”

    자리에서 일어나는 제라니아를 본 리암과 코델리아는 동시에 외쳤다.

    “안 돼.”

    “안 돼!”

    같은 말을 내뱉고도 떨떠름하게 서로를 마주 보는 두 사람에게 제라니아는 차분히 말했다.

    “왜?”

    “왜는 왜야. 갑자기 왜 나가겠다고 하는 건데?”

    “바람이 쐬고 싶어서.”

    리암이 진지하게 말했다.

    “너 자기 위치를 자각하고는 있는 거지?”

    “후드 뒤집어쓰면 아무도 모를걸. 게다가 나 혼자 나가는 것도 아니잖아. 네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겠어.”

    “평소의 시내라면 몰라도, 오늘은 사람이 너무 많아. 길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차라리 다른 기사들이랑 같이….”

    “내가 집에 혼자 찾아오지 못하는 어린애도 아니고, 기사분들이랑 다니면 오히려 눈에 더 띄지 않을까.”

    유독 강경한 제라니아의 태도가 리암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라니아는 늘, 자신보다 더 조심하던 사람이지 않았나.

    물론 혼자 나간다는 것도 아니고, 자신과 함께 움직인다고 하는데 이 이상 막는 것도 웃기는 그림일 것이다. 하나 왕세자의 호위를 섰을 때의 기억이 목에 턱 걸린 것처럼 찜찜함을 남겼다.

    물론 왕세자와 제라니아는 달랐다. 제라니아의 호위를 선 뒤로 위험했던 적은 없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됐다. 그런 마음을 담아 리암은 소심하게 덧붙여 보았다.

    “하지만.”

    “리암, 넌 지금 누구의 사람이야?”

    말문이 막힌 리암과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코델리아 사이에서 칼리아는 조용히 다 마신 잔을 내려놓았다. 지그시 마주 보는 녹색 시선에 리암이 머리를 헝클어뜨리다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래, 가자 가.”

    * * *

    “저택에 가는 거지?”

    낡은 망토를 걸치고 총총 길을 걸어가던 제라니아의 뒤로 리암이 걸음을 맞춰 걸었다. 시내 쪽으로 갈수록 사람이 점차 많아지고 있었다. 제라니아와 비슷한 차림새를 한 리암은 후드를 고쳐 쓰며 앞장서 걸어가는 제라니아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응.”

    리암은 시내 근처에 있는 작은 저택 하나를 거처로 두고 있었는데, 죽어도 그라시아 공작저로는 들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내를 구경한다고 핑계를 댔지만 사실 그의 생각은 뻔했다.

    답장을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그나저나 아버지가 아직도 용케 쳐들어오질 않네.”

    사실 수도에 올라오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올 줄 알았다고 중얼거리는 리암을 뒤로한 채 제라니아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그는 능청스레 대꾸했다. 리암은 별다른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는지 말없이 걸어가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고마워.”

    “응?”

    “생각해보니 말한 적 없다 싶어서. 나 때문에 고생 많았지.”

    뒤를 돌아보자 리암이 진지한 표정으로 제라니아와 눈을 마주했다.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 리암에게 제라니아는 웃으며 말했다.

    “아직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니잖아.”

    “아니야.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찾아갔어도 줄리아가 날 발로 뻥 차서 쫓아냈을걸. 걔는 참 겁도 없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리암을 보며 제라니아는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웃기만 했다. 확실히 그때 보았던 태도를 생각하면 문전박대를 당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너는 시내를 구경할 거지? 광장에 갈 생각이야?”

    광장 쪽으로 가고 있어서 그런지 점점 사람이 많아지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열심히 걸어가며 제라니아는 작게 속삭였다.

    “응. 연극이 꽤 볼만하거든.”

    “사람들한테 깔려 죽게?”

    “설마.”

    제라니아가 장난스레 웃었다. 수가 있다는 듯이.

    “내가 너보다 수도에 오래 살았거든. 그냥 날 믿고 따라와.”

    “그러지 뭐.”

    얌전히 대답하던 리암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근데 내가 사는 저택에 먼저 들렀다 가도 될까? 어차피 근처인데.”

    “응, 그러자.”

    저택이 어디에 있는지 머릿속에 떠올리며 제라니아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런 제라니아의 뒤를 별다른 생각 없이 따라가던 리암의 곁으로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하나로 묶은 새까맣고 굽슬굽슬한 머리카락이 시선을 끌었다. 창백하다 싶은 하얀 피부와 고운 옆모습까지도 낯이 익었다.

    밀드레드?

    리암의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멈췄다. 그가 황급히 옆을 돌아보았다. 까만 머리칼을 내려묶은 여인의 뒤통수가 보였다. 내가 아는 밀드레드가 맞나? 아니, 설마. 밀드레드가 수도에 왔을 리가.

    하지만 만약 정말 밀드레드라면?

    “잠깐, 제라니아. 저기 내가 아는 사람이…. 제라니아?”

    그새 사라지고 없는 제라니아에 리암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제라니아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밀드레드로 보이는 여인의 뒷모습이 먼발치에 보였다. 진퇴양난의 상황에 리암은 작게 욕설을 뇌까렸다.

    “에이씨!”

    그런 리암의 상황을 모른 채 앞장서서 걸어가던 제라니아의 귓가에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을 돌아본 제라니아는 저 멀리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이들을 목격했다.

    “어이, 형씨. 내 옷이 엉망이 됐잖아! 대체 어떻게 할 거야?!”

    “에헤이, 변상해 드린다니까요. 하지만 1케니는 솔직히 좀 바가지가 아닌지….”

    덩치들에게 멱살을 잡힌 상황에서도 남자는 넉살 좋게 웃고 있었다. 평범해 보이는 갈색 후드 사이로 진갈색 머리카락이 삐죽이 보였다. 하나같이 험악한 무리의 인상에 주변 사람들은 웅성대면서도 쉽사리 남자를 도우러 나서지 못했다. 제라니아는 눈을 깜빡였다.

    멀리서도 남자의 얼굴이 묘하게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지?

    분명 아는 얼굴인 것 같은데, 누구인지 떠올리자니 쉽사리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제라니아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리암, 저거 아무래도…. 리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에 제라니아는 살짝 당황했다. 설마 정말 인파 때문에 서로를 잃어버린 걸까.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지만 리암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제라니아는 고민에 빠졌다. 리암이 있다면 몰라도 자신 혼자 저 남자를 돕기는 어려웠다.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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