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마법 같은 추수감사절 (1)
창턱에 걸린 노을이 세상을 찬란하게 빛냈다. 비스듬히 쏟아지는 황혼의 그림자가 창을 넘어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방 안의 모든 가구들이 그에 동화되어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바깥에서는 제법 시끌벅적한 목소리들이 북을 두드리듯 춤을 추고 하늘에서는 잔잔하게 구름들이 다가오는 밤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창가 바로 아래로 노을을 듬뿍 적신 정원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제라니아의 시선이 물끄러미 창밖을 향했다. 저택 2층에 자리한 이 방은 바로 아래에 정원이 있는 데다 주변에 이보다 높은 건물이 없어, 하늘을 감상하기에 좋았다. 특히 노을이 지는 시간대의 경치가 가장 아름다웠다.
담요가 덮여 있는 무릎 위로 책을 엎어놓은 채, 멀뚱히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는 제라니아의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뭘 보고 있어?”
“코디.”
활짝 열려 있는 문지방을 넘어 안으로 들어온 코델리아가 제라니아에게로 총총 걸어왔다.
“언니는 유독 이 방을 좋아하더라.”
훌쩍 뒤로 다가온 코델리아가 제라니아의 어깨에 양손을 얹고 주물렀다. 제라니아의 얼굴에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슨 일이야?”
“식사 준비 다 됐어. 언니만 오면 다 모인 거라고.”
“그래? 어서 가야겠다.”
몸을 일으킨 뒤, 담요와 책을 가지런히 정리한 제라니아가 코델리아와 함께 방을 나섰다. 복도를 걸어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코델리아가 툭 말을 털었다.
“전하께서도 빨리 오시면 좋을 텐데.”
잠깐 멈칫했던 제라니아가 곧 태연하게 답했다.
“그러게.”
추수감사절 기간이 시작되었다.
추수감사절의 시작을 알리며 왕실에서는 기사들과 병사들을 동원해 대규모의 행진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프란츠는 국왕을 보좌하기 위해 행렬에 참여해야 했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국민들에게 인지도를 높이기 좋은 만큼, 데릭이나 이안 역시 행진에 참여하게 될 예정이라 했다.
그때 마침 바이첸 공작저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이번 추수감사절을 저택에서 보낼 예정이 없냐는 정중한 요청을 담은 편지였다.
동글동글한 필체를 본 제라니아는 피식 웃었다. 이 편지 하나를 보내자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을 코델리아를 떠올리니 귀여웠다.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을 때, 프란츠는 선뜻 말했다.
‘잘 다녀오십시오.’
‘네?’
‘가고 싶은 게 아닙니까?’
‘아니, 가고 싶긴 하지만 다녀오라니. 저 혼자 가란 뜻인가요?’
당신을 두고 어떻게 혼자 가겠냐, 그렇게 말하는 제라니아에게 프란츠는 별문제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당신이 굳이 참석해야 하는 행사는 아닙니다. 얼굴이 팔려봐야 그렇게 좋을 것도 없고.’
‘불화설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알쏭달쏭하던 프란츠의 말뜻을 제라니아는 저택에 도착한 뒤 이해했다. 왕세자의 이름으로 보내진 수많은 선물들을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제라니아에게 마차를 몰고 온 이는 정중하게 말했다.
‘비전하께서 휴가 동안 불편함 없이 생활하시길 바란다 하셨습니다.’
‘고작 사흘인데, 이렇게 많이요?’
맞춤으로 제작된 온갖 드레스는 물론 보석으로 만든 장신구들과 온갖 희귀하다는 물건들이 즐비했다.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남매들의 취향을 반영한 듯한 선물들을 보니, 가문에 보내는 선물에 가깝다고 해도 무방했다.
도대체 어디서 자금을 가져오시는 거지.
전에 이렌스에게 물어봤을 때, 그는 불법으로 번 돈은 아니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상업에 손을 대고 계신 걸까. 제라니아는 나중에 제대로 날 잡고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재차 되새겼다.
그의 말을 이해했다. 곧 시찰을 갈 테니 사흘간 푹 쉬다 오라는 의미일 것이다. 정작 쉬지 않고 일할 게 분명한 프란츠를 생각하면 제라니아는 입 안이 썼다.
‘그렇게 일이 바쁜가요? 첫날은 행진을 한다지만 그 후는 그래도 괜찮은 걸로 아는데요.’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같이 가요.’
‘정말 괜찮습니다.’
자신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프란츠를 제라니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적당한 휴식이야말로 능률에 도움이 된다고 설파하는 제라니아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인 프란츠는 추수감사절 마지막 날에는 공작저에서 머물기로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곧 있을 시찰을 대비해 영지로 내려가 있는 상태였고, 자매들만 남아 있었으니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식당으로 들어서자 넓고 고급스러운 식탁에 앉아 있던 칼리아와 더불어 그 맞은편에 앉아 있던 리암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식탁 위에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은으로 만들어진 접시에 가득 담겨 있었다.
추수감사절의 첫날 저녁은 주 요리를 곡물로 먹는 게 관례인지라 빵 종류가 유독 많았다. 가운데에 놓여 있는 오리 통구이를 제하면 밀빵과 더불어 에그 타르트, 샌드위치가 주였다.
제라니아까지 리암의 옆에 앉자, 하녀들이 들어와 스튜 접시를 모두의 앞에 각각 내려놓았다. 향신료를 듬뿍 넣고 채소를 주로 넣어 만든 스튜에서 모락모락 매콤한 향기가 풍겼다.
제라니아는 차분히 포크를 들었다. 그걸 스튜에 넣고 떠올리는 제라니아에게 칼리아가 말했다.
“제라니아. 그거 숟가락 아니라 포크인데.”
“아, 그러네.”
실수했다며 숟가락을 집어 드는 제라니아를 보고 코델리아는 양손으로 턱을 받친 채 말했다.
“언니, 요즘 되게 멍하더라.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응? …아니, 그런 거 없어.”
여상하게 대꾸하며 제라니아는 조용히 스튜를 먹기 시작했다. 코델리아와 칼리아 역시 관심을 접고 음식에 진중했다.
저녁 식사는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가면서 간간이 웃음이 터졌다. 그러던 와중, 아련한 시선을 내보이는 코델리아를 보며 제라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니. 그냥….”
코델리아는 살짝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작년에는 조금 더 떠들썩했는데, 싶어서.”
“그때는 휴스타인가에서도 왔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가볍게 덧붙이며 칼리아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빵을 작게 손으로 뜯던 제라니아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고, 리암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올해는 왜 안 오는데?”
“시간이 없대.”
실제로 크리스토퍼는 정중하게 거절 답신을 보냈다. 바쁘다는 이유에서였다. 시찰이 다가오고 있으니 바쁘지 않은 게 더 이상했는지라 코델리아는 선선히 수긍했다.
칼리아가 말했다.
“보나 마나 루크한테는 안 보냈겠구나.”
“당연하지. 난 걔가 싫어.”
코델리아는 제법 단호하게 말했고, 리암은 신기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대체 어떤 녀석이길래 그래? 성격이 나쁘냐?”
“굳이 따지면 재수 없는 과야.”
루크 휴스타인과 코델리아 바이첸은 두 가문 사이에서도 인정하는 앙숙이었다. 과묵하고 조용한 크리스토퍼와 달리 루크는 활발한 성격에 속했는데, 그만큼이나 진중하지 못하다는 평 역시 많이 들었다.
언젠가 거하게 싸운 뒤로 코델리아는 그를 대놓고 싫어했다. 싸운 이유를 말해보라 해도 입을 꾹 다물기만 할 뿐이었다.
“네이선은?”
“걔야 눈치 엄청 보잖아. 못 가겠다고 거절 회신 보냈더라.”
큰형도 없는데 혼자 오는 건 눈치가 보일 만했다. 제법 소심한 성격을 가진 휴스타인가의 막내를 떠올리며 코델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셀리나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냥 기분이 묘해서. 언제까지고 다 같이 있을 줄 알았는데…. 언니도 결혼해서 집을 나간 걸 보면, 변하지 않는 건 없구나 싶달까.”
기분이 묘하다며 코델리아가 배시시 웃었다. 심각해지려는 분위기를 환기하려는지 코델리아는 박수를 짝 치며 화제를 돌렸다.
“맞다, 그거 알아? 사교계에서 묘한 소문이 돌던데.”
“소문?”
“되게 용한 점술가가 있대.”
“아, 그 얘기.”
알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칼리아와 달리 리암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직설적으로 말했다.
“뭐야, 그건. 사기꾼 아냐?”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되게 잘 맞춘다고 하더라고. 애들이 완전 신기하다며 호들갑을 떨더라.”
코델리아는 제게 그 이야기를 하던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영애들을 주 단골 고객으로 하는 점술가. 잘생긴 외모에 언변도 좋은 데다 손님들의 고민을 기가 막히게 알아맞히고 조언을 건네는데, 그게 또 그렇게 용하다고 했다.
듣기만 해도 수상했다. 아무리 봐도 속임수의 냄새가 나는데 그게 뭐 그리 신기하다고. 그렇게 말했더니 친구들은 득달같이 네가 직접 보지 않아서 그렇다고 말했다. 제법 과격한 반응에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런 거면, 메즈라든가 그런 거 아냐?”
왕국에서는 미래를 보는 자를 메즈, 과거를 읽어내는 자를 아나샤라고 불렀다. 리암의 말에 코델리아는 코웃음을 쳤다.
“그랬으면 이미 신전에서 난리가 났겠지.”
신전이 예언자에 보이는 집념은 왕국에서도 유명했다.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을 만큼 메즈와 아나샤에 얽힌 일화 역시도 상당했는데, 신화에 걸쳐 있는 이야기답게 대부분 끝이 썩 좋지는 못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칼리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묘한 소문이라…. 그러고 보니 최근, 가면무도회 얘기를 들었는데.”
“가면무도회?”
“은색 뱀이 그려진 초대장을 받으면 들어갈 수 있다는 가면무도회가 있는데, 거기에 가면 황홀한 경험을 할 수 있다던가. 그러더라고.”
“황홀한 경험?”
“나도 자세히는 몰라. 하지만….”
칼리아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확실하진 않은데, 마법이랑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있더라.”
제라니아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신전의 소관이 아닌 곳에서 마법을 부리는 건 불법이잖아. 신전은 세속적인 일에 마법을 사용해선 안 되고.”
“그렇지. 하지만 법보다 더 무서운 게 권력 아니겠니.”
“언니는 어떻게 그걸 알았는데?”
“입을 털던 인간이 하나 있어서.”
제게 구애하던 멍청이 하나를 떠올리며 칼리아는 조용히 고기를 썰어 입에 넣었다. 귀한 걸 구했다며 수줍은 듯이 초대장을 내밀던 남자에게 칼리아는 부드럽게 거절을 표했다. 듣기만 해도 수상쩍은 장소에 굳이 발을 들여놓을 필요는 없었다.
“그 얘기 좀 자세히 해줄 수 있어? 코델리아, 너도.”
뜻밖에도 흥미를 보이는 제라니아의 모습에 칼리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웬일이야. 이런 얘기에 흥미 없으면서.”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의아한 얼굴로도 선선히 설명을 늘어놓는 칼리아에게 제라니아는 온 신경을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