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48화 (49/171)

제48화. 사랑의 형태

눈을 번쩍 떴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말간 얼굴이 보였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시야가 금세 선명해졌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가 누구인지 그제야 분간이 갔다. 은은하게 방을 비추는 등불의 빛이 상대의 얼굴에 음영을 지웠다.

잔뜩 눌려 있던 목소리가 프란츠의 입술 사이로 나직이 흘러나왔다.

“…제라니아.”

“식은땀을 흘리길래…. 악몽을 꾸는 것 같아서 깨웠어요. 괜찮아요?”

정말 놀랐는지 제라니아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프란츠는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꿈에서 느꼈던 두통이 실처럼 가늘게 이어졌다.

방심하면 그때의 꿈을 꾼다. 잊어서는 안 되지만, 그만큼이나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나약하던 어린 시절을 들여다보는 게 무엇이 즐거울까.

제라니아는 급히 종을 울렸다. 시종에게 물을 가져오라 지시한 뒤, 시종이 가져온 물컵을 받은 제라니아가 그것을 프란츠에게 내밀었다. 프란츠는 사양하지 않고 그가 내미는 걱정을 받아마셨다.

둘만 남자, 프란츠는 조용히 사과의 말을 건넸다.

“보기 좋지 않은 꼴을 보였군요.”

“네? 아니에요.”

제라니아는 손을 뻗어 프란츠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에 온기가 담겨 있었다. 침대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아 프란츠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제라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꿈을 꾸셨길래, 그런 표정을 하세요.”

“어떤 얼굴을 말하는 겁니까.”

“음, 굳이 비유하면…. 비밀을 들킨 어린아이 같은 느낌?”

조용하게 울리는 대답에 프란츠는 입매를 굳혔다. 그가 낮게 탄성을 흘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당신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습니다.”

비유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제라니아의 지적은 타당했다. 이런 꼴을 보일까봐 가급적 제라니아보다 늦게 잠들고자 했던 것도 있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는가.

대답을 고민하는 프란츠에게 제라니아는 조용히 질문했다.

“말하고 싶지 않으신 건가요?”

“말하지 못할 이야기는 아닙….”

“아니에요, 말하지 마세요.”

제라니아는 단호하게 말하며 프란츠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고 시선을 마주했다. 따스하지만 단단한 녹색 눈동자에 프란츠의 모습이 비쳤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라 생각했는데, 제라니아는 망설임 없이 대꾸했다.

“말하기 싫은 표정이잖아요.”

“…내가 말입니까?”

“네.”

말이 없어진 프란츠를 보며 제라니아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이 사람은 정말 자기 자신의 감정에는 둔하다 싶었다.

누가 봐도 싫어하는 표정이지 않은가. 평소보다 침묵이 긴 것도 그렇고.

“싫어하는 사람한테서 억지로 뭘 듣는다고, 무언가 나아질 거라는 기대 같은 건 하지 않아요.”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당신이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기다리겠다고. 제라니아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프란츠는 힘없이 웃었다.

“잠시만, 기대도 되겠습니까.”

“네?”

얼떨떨한 얼굴로 프란츠를 바라보던 제라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툭, 제라니아의 어깨에 제 얼굴을 내려놓았다. 제법 무거웠지만 제라니아는 내색 없이 그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손끝에 착착 감겼다.

이 사람은 뭘 먹었길래 머릿결까지 좋은 거지. 생뚱맞은 생각을 하면서도 제라니아는 프란츠의 뒤통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심란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늘 무심하고 강하다 싶으면서도, 이런 식으로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당신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무엇이 그렇게….”

두려우신 건가요.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프란츠는 지극히 건조한 음성으로 답했다.

“아니요. 그런 건 없습니다.”

그런 감정은 과거에 전부 던져버리고 왔다. 눈물은 이미 말라붙은 지 오래였다.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기 위해 이 자리까지 온 거니까.

제라니아의 어깨에 가려져 있던 프란츠의 눈동자가 무언가의 감정으로 새파랗게 불타올랐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지만.

“제라니아.”

“네.”

“…당신은, 오래 살 겁니까.”

“예? 갑자기 그게 무슨….”

제라니아는 의아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고, 프란츠는 묵묵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제라니아는 고민 없이 선뜻 대답했다.

“당연히 오래 살 건데요.”

“…어째서입니까?”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프란츠의 얼굴을 보며 제라니아는 어떤 감정이 묵직하게 제 가슴께를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느낌은, 왠지 공포와 닮아 있었다. 가슴 한편에서 서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째서?

“그거야…. 전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전하랑 약속한 것도 있고요.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오래오래 살고 싶은 건 당연하죠…?”

말을 꺼내면서도 제라니아는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제라니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은요?”

고민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프란츠는 바로 대답했다.

“당연히, 오래 살 겁니다.”

프란츠는 부드럽게 입가를 올려 웃었고, 제라니아는 그 미소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제껏 본 얼굴 중 가장 편안해 보이는 미소였다.

맥박이 빨라지는 소리가 귓가에 쿵쿵 울렸다. 속이 답답해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꾹 눌렀다. 마주 웃어줘야 하는데,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뇌리를 꿰뚫은 직감이 제라니아를 짓눌렀다. 동시에 확신했다.

당신은 거짓말을 할 때 그렇게 웃는구나.

“슬슬 다시 잘까요.”

나 때문에 잠을 설치게 하고 싶진 않으니까. 가볍게 대답하며 불을 끄는 프란츠에게, 제라니아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을 꽉 끌어안는 온기를 마주 끌어안을 뿐.

누구의 것인지 모를, 불안하게 울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만이 잔상처럼 남았다.

* * *

새까만 장막이 저 멀리 수평선까지를 곱게 덮었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하늘을 따라 별들이 반짝였다.

제법 쌀쌀해진 바깥 공기를 몰아내려는 듯 벽난로의 불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등불 안에서 환히 타오르는 불빛이 유리에 달라붙어 밖으로 손을 뻗었다.

오렌지색으로 빛나는 불빛에 의존해 여인은 편지를 읽었다. 구불거리는 길고 새까만 머리카락이 그의 허리까지 내려왔다.

편지를 다 읽은 뒤, 여인은 곱게 편지를 접어 다시 봉투 안에 넣었다. 탁자 위에 봉투를 올려둔 여인이 제 맞은편에 앉은 동생 줄리아에게 말했다.

“수도로 올라가야겠어.”

“언니!”

미쳤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줄리아를 밀드레드는 묵묵히 올려다보았다. 노려보듯 두 눈을 번뜩이는 줄리아와 미동 하나 없이 그를 바라보는 밀드레드의 시선이 차분하게 엉켜들었다. 줄리아가 세차게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답장을 보내고 싶어 할 거라는 건 예상했어. 하지만 직접 만나겠다니? 공작가랑 다시 얽히겠다는 뜻이야?”

밀드레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될지는 알 수 없지. 하지만 리암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내가 그냥 물러설 수는 없잖아.”

“걔 사정 따위를 알 게 뭐야!”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를 내지르던 줄리아가 차분히 호흡을 진정시켰다. 어떻게든 제 언니를 구슬리기 위해 줄리아는 입을 열었다.

“언니, 내가 말했지. 걔는 타고난 게 많아. 언니가 아니어도, 주변에 걔를 신경 써줄 사람은 많다고.”

“…….”

“리암이 노력하는 거? 열심히 하는구나 싶지. 하지만, 노력한다고 무조건 보답이 돌아오는 건 아니잖아. 그럴 필요도 없고! 제발 언니를 먼저 생각해.”

줄리아의 호소를 밀드레드는 덤덤히 듣고 있었다. 제 몸을 감싼 숄을 끌어안으며 밀드레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리암이 싫은 거니?”

“아니. 하지만 언니랑 리암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나는 무조건 언니 편이니까.”

단호한 음성에 밀드레드는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입가를 가리고 웃던 밀드레드가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알아. 네가 날 걱정해서 그런 소리를 한다는 거.”

[안녕하세요, 밀드레드. 편지를 쓰는 건 오랜만이네요.]

“하지만, 줄리아. 이건 내 의지야.”

[이 편지가 무사히 당신에게 도착했길 바라요. 당신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나는, 지금 수도에 있어요. 어쩌다 보니 친구를 돕게 되어서요.]

방금 전 읽었던 편지를 떠올리며 밀드레드는 숄을 꼭 움켜쥐었다. 리암은 언제나 솔직했다. 체면과 명예에 연연하는 귀족가의 도련님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당신이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편으로는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만큼, 당신도 날 그리워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해요.]

행동도 그렇지만 그런 그의 성격은 편지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밀드레드가 받은 편지 역시, 그 연장선이었다.

[매일, 당신이 그리워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낮에 근무를 설 때도, 사람들을 만날 때도.]

“사실, 리암이 날 포기할 줄 알았어. 그래서 더 꽁꽁 숨고 싶었던 거고.”

한때의 유희일 뿐일 거라던 공작 각하의 말을 믿은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안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너는 가진 게 너무 많아서. 네가 나로 인해 무언가를 포기하게 될까 봐, 혹은 포기하기 싫어서 나를 먼저 도려낼 것이 두려웠다.

상처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공작 각하는 놀랍도록 너와 닮아 있었으니까. 미래에 네가 그런 차가운 눈을 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상처받았고,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너를 정말 좋아한다는 걸.

지금 끊어내지 않으면, 아마 분명 나중에는 네가 헤어지고 싶다 말하더라도 매달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도망쳤다. 모든 것으로부터.

[오색으로 빛나며 찬란히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볼 때도, 새까만 밤이 하루의 종언을 고할 때도, 나는 언제나 당신 생각뿐이에요.]

괴로운 듯이 웃는 밀드레드의 얼굴에 줄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알아요. 편지에 이런 말을 쓰는 건 비겁한 거겠죠. 하지만 밀드레드, 나는 언제나 당신에게 솔직하고 싶었어요.]

“언니….”

“너도 알잖아. 내가 마음 편하게만 지낸 건 아니라는 걸.”

[당신이 날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요. 하지만 얼굴조차 보지 못하는 건 역시 괴롭네요. 꿈에서 보는 당신의 얼굴이 점차 흐려져가는 게 싫어서, 밤이 돌아오는 게 두려워요.]

“…신분이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난, 언니가…. 상처받는 게 싫어.”

그렇게 많이 울었잖아. 힘들어했잖아. 어째서, 그런데도…. 횡설수설 말하는 줄리아를 바라보는 밀드레드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래도, 넌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줄 거잖아.”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깨무는 줄리아를 보며 밀드레드는 엷게 미소 지었다. 다정하고 상냥한 눈. 그 아래에는 단단한 심지가 있었다.

사랑만으로 모든 게 해결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만나러 간다 해도, 결국 헤어져야만 한다는 결론이 날지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제대로 모든 걸 매듭짓는 정도는 할 수 있을 테니까.

[이 정도 그리움을 담는 건 허락해 주겠죠.]

“그러니까, 다녀올게.”

[…만나고 싶어요.]

걱정 말라는 듯 웃는 밀드레드를 보며 줄리아는 목이 메었다. 목에서 치받고 올라오는 말들을 도로 꿀꺽 삼키며 줄리아가 천천히 말했다.

“언제…. 출발할 건데?”

“내일 바로.”

단호하게 말하는 밀드레드의 얼굴을 비추며 불빛이 춤을 추었다. 줄리아는 힘없이 말했다.

“언니 몸 상태를 생각하면, 수도까지는 이틀쯤 걸리겠네. 이틀 뒤면 추수감사절 기간이 시작되잖아. 수도에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 알 수 없어. 그래도 갈 거야?”

밀드레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알았어.”

[당신의 리암으로부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