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47화 (48/171)
  • 제47화. 악몽

    “태워버리면 그만인 종이 쪼가리 따위를 믿으라는 거냐.”

    “땅문서는 믿으시면서, 계약서는 믿지 못하시겠다니 모순적이시군요.”

    “…….”

    “믿지 못하신다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어쩌시겠습니까? 냉정하게 떨어지는 목소리가 선택을 종용했다. 분명 꽉 닫혀 있는 방 안에 서늘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침묵을 아무렇지 않게 감당하며 프란츠는 국왕을 주시했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세월에 닳은 듯 주름이 지기 시작한 미중년의 얼굴을 프란츠는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치 이 순간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 지난 뒤 국왕은 낮게 신음했다. 천천히 눈을 뜬 그가 밖에서 시종을 불러들였다. 찾으셨냐고 묻는 시종에게 국왕은 조용히 말했다.

    “…펜과 종이를 가져와라.”

    프란츠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평소에 그가 짓는 미소와는 다른 비릿한 조소였다.

    * * *

    방의 문을 열고 한 아이가 쪼르르 안으로 들어갔다. 백금빛으로 빛나는 고수머리와 하늘색의 눈동자, 장인의 손으로 세공된 인형처럼 섬세한 생김새를 지닌 미소년이 방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침대로 향했다.

    침대에는 한 여인이 누워 있었다. 한때는 윤기 났을 금빛의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아이와 마찬가지로 호수를 닮은 푸른 눈을 지닌 미인이었다.

    머리카락은 퍼석해지고, 건강하던 몸은 거동이 힘들 정도로 말랐고, 안색은 해쓱해졌음에도 그는 여전히 아름답고 기품 있었다. 다가오는 아들을 여인은 반가이 맞았다.

    전보다 한층 더 얼굴이 상한 걸 본 아이의 눈망울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작게 ‘어머니’를 부르는 아이에게 여인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전하.’

    ‘부르셨다고….’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요.’

    침대 맡에 서서 눈을 깜빡이는 아들의 머리를 곱게 쓰다듬는 여인의 손이 겨울을 맞이한 나뭇가지처럼 앙상했다.

    ‘나는 이제 곧, 먼 길을 가야 한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어미를 기다리지 않아도 괜찮아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내뱉는 여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애써 순화했지만, 그 의미를 눈치챘는지 아이의 푸른 눈동자에 돌을 던진 수면처럼 파문이 일었다.

    ‘기다리지…. 말라는 말 같은 거 하지 마세요.’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던 아이가 목소리를 내었다.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아이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전서구를 보냈으니까, 곧 아버지가 오실 거예요. 계속 기다리셨잖아요. 그러니까….’

    ‘국왕 폐하는 전쟁 중이시잖아요. 아마,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오지 못하실 거랍니다.’

    ‘어째서요?’

    ‘그게 국왕의 의무니까요.’

    아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여인을 쳐다보았다. 멍한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던 아이의 조그만 입이 오물거렸다.

    ‘왜요?’

    ‘…….’

    ‘왜? 어째서. 왜 어머니가 이렇게 되어야 하죠? 이건, 부당해요. 사실 죽었어야 하는 건….’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에요.’

    아이의 입술에 검지를 올리며 여인은 해사하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본 아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입술에 닿는 차가운 손가락의 감촉이 끝을 예고하고 있었다.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아들을 본 여인은 어쩔 줄 몰랐다.

    늘 또래보다 어른스럽다 생각했던 아이였다. 언제나 의젓한 얼굴로 제 옆을 지키던 아들이 우는 모습은 여인의 가슴을 미어지게 하기 충분했다.

    손을 뻗어 눈가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며 여인은 조용히 아이를 달랬다.

    ‘울지 마세요. 이러면 이 어미가 마음을 놓고 떠날 수가 없잖아요.’

    ‘그럼 계속 울게요. 하루 종일도 울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절, 혼자 두고 가지 마세요.’

    ‘…….’

    ‘가슴이 너무 아파요. 숨이 막혀요.’

    가슴께를 부여잡고 꺽꺽 우는 아들을 왕비는 손을 뻗어 끌어안았다. 시집오기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앙상해진 팔이 살며시 떨리고 있었다. 아이가 느끼고 있을 두려움이 피부를 타고 독처럼 전신에 스며들었다.

    천천히 아이를 놓아준 여인이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아이의 맑은 눈동자가 여전히 구슬 같은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그랬어요. 어머니는 독하지 못한 게 문제라고. 여리기 때문에 당하기만 하는 거라고.’

    ‘그건….’

    ‘화가 났어요. 그래서 때리려고 했는데, 유모가 말렸어요. 문제가 커질 수 있다고, 제가 위험해질 수 있다고 그러면서요.’

    아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울음을 그치려고 노력했지만, 아직 일곱 살의 아이였는지라 쉽지 않았다.

    ‘어머니는 좋은 왕비가 되려고 노력하신 것뿐이잖아요. 어째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가요.’

    아이의 눈동자에 새까만 독기가 차올라, 하늘색에 가까운 푸른색과 어우러져 짙게 변했다.

    ‘프란츠.’

    격식을 버리고 이름을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가 정말로 다정했다.

    ‘이 어미는 프란츠가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제 행복은 여기에 있는데, 어디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요.’

    왕자는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다. 왕과 왕비 사이에서 난 유일한 소생이며, 궁에서 가장 확고한 정통성을 가진 유일한 인물. 그러나 권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정통성이란 독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쟁으로 인해 바깥으로만 나도는 왕으로 인해 왕궁의 관계도는 상당히 난장판이었다. 수많은 후궁들이 자신의 아이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치열하게 보이지 않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통성을 가진 왕자는 방해물 그 자체였다.

    귀족들은 파가 갈렸고, 왕비에게 붙으려는 이들도 꽤 있었지만 왕비가 뇌물을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다.

    왕은 백성들에게 영웅이라 불렸지만, 결코 좋은 지아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그네스는 그를 탓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수많은 행복이 있답니다. 내가 아니라도, 프란츠를 행복하게 해줄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이 왕궁에서요?’

    이제 겨우 일곱 살이 된 아이의 목소리에서 지독히도 묻어나는 회의감을 느끼고 아그네스는 목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으나, 애써 태연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는 왕을 이해하고자 애썼으나 오직 이것만은 원망스러웠다. 끝이 멀지 않았다는 점이 원통했다.

    보여주고 싶은 것도 많고, 알려주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티엘라에게 부탁을 해두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티엘라 바이첸 공작 부인. 아그네스의 유일한 말벗인 여인은 그 남편을 닮아 거침이 없었다. 복잡한 정치 관계를 알면서도 제 곁에 남아준 만큼 아그네스는 언제나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니 약속해 주세요, 프란츠. 꼭 살아남아서 행복해지겠다고.’

    고작 일곱 살의 아들이 지키기 어려운 약속이라는 것은 아그네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비겁한 말이라는 것도 알았다. 자신이 죽은 뒤 아이가 어떻게 될지 너무 걱정스러웠다.

    그럼에도 아이가 살았으면 했다.

    국왕에게 편지를 남겼지만, 과연 그가 제 호소를 들어주기는 할까. 그 전에 편지가 무사히 전해질 수나 있을까. 자조했다.

    그는 뒤에 조용히 서 있는 유모, 프리스타 부인에게 말했다.

    ‘왕자를 잘 부탁하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유모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답했다. 하지만 그 역시 얼마 가지 않아 의문의 사고를 당하게 되고, 자신은 영영 혼자 남게 된다.

    소매로 애써 눈물을 닦으며 아이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떠나는 것도 싫었지만, 걱정시키는 건 더 싫었다.

    ‘네, 알겠어요. 살아남을게요. 반드시.’

    그렇게 말하는 어린 자신을 프란츠는 멀찍이 서서 무감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꿈이라는 건 진작 알았다. 가끔 이렇게 자각몽을 꿀 때가 있었다. 색이라곤 없는 자신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반짝거리던 순간의 기억.

    그래서 더 끔찍했다. 돌아오지 않는 무언가를 반추해봐야 달라지는 건 없었다. 충분히 무뎌졌다고 생각한 감각들이 삐죽삐죽, 제 피부를 찔러대며 존재를 호소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는 참석한 사람이 몇 되지 않았다. 그나마 알아볼 만한 유명인사는 숙부인 리베라 후작과 바이첸 공작 부부 정도였다.

    공작부인은 어린 제가 혼자 왕궁에 남는 것이 걱정스럽다며, 데브론 영지에 마련된 성으로 가지 않겠냐 말했지만 우선은 거절했다. 어머니와 함께 머물던 처소를 지켜야 했으니까. 도망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갖가지 노력이 필요했다.

    우선, 시종이나 시녀들이 챙겨주는 음식은 전부 몰래 뒤뜰에 가져다 버렸다. 소량일지라도 독이 들어 있을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대신 매일 밤 시궁쥐처럼 주방에 숨어들어 가져온 음식으로 끼니를 연명했다.

    낮에는 눈에 띄지 않는 장소를 골라 다녔다. 대개 내가 선택한 곳은 숲이었다. 왕족에게 속한 숲이기도 했거니와 가끔 짐승이 출몰한다는 소리가 있어 사람들이 얼씬도 하지 않는 곳이었다.

    사람이 가하는 위협에 비하면 짐승은 별것 아니었다. 남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지도 몰랐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랬다.

    가장 문제였던 건 밤이었다. 천만 다행인 건 어머니가 머물던 곳이 본궁의 중심부라 자객을 함부로 보낼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혼자 보내는 밤이 익숙하지 않았기도 하고, 죽을지 모른다는 것이 두려웠다.

    어머니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할까봐. 다른 것보다도 그게 제일 두려웠다.

    하지만 아버지란 인간이 개선장군이 되어 모두의 환호성을 받으며 당당히 수도에 입성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이런 꼴을 보려고 계속 버틴 건가, 그런 생각을 했다.

    사흘간 승전을 만끽한 다음에야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한답시고 무덤가에 간 것에 백성들은 전쟁에 이기고도 낭보를 들어야만 했던 왕을 동정하고 안타까워했다.

    구역질이 났다.

    ‘꺄아아악!’

    ‘왕자님이 쓰러지셨다!’

    그럼에도 살기 위해 지금의 상황을 이용해야 했다.

    국왕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쓰러졌고, 깨어난 뒤에는 이미 모든 상황이 정리되어 있었다.

    사자가 없는 곳에서는 여우가 왕이라지만 사자가 돌아왔으니 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까. 왕이 불호령을 내린 덕분에 독을 먹을 걱정은 사그라들었다.

    왕과 독대했다. 그는 슬픈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얼굴만 보면 어머니의 죽음을 정말로 슬퍼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제게 무엇을 바라냐고 묻는 왕에게 죽을까 두렵다고 호소하며 억지로 눈물을 쥐어짰다. 왕은 곧장 병사들을 붙여주겠다 했고, 나는 검을 배우겠다 말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쳐다보기도 싫었지만 몸을 지킬 수단이 필요했다. 흐뭇한 얼굴로 호탕하게 웃는 왕을 똑바로 쳐다보며 같이 웃어야만 했던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래놓고 1년도 안 되어 국왕은 새 왕비를 들였다. 자신보다 고작 열 살 많은 여자에게 어머니와 함께 살던 곳을 내어주던 날,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조각조각 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얼마 있지 않아 유모마저 의문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어머니의 유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버릴 건 버려야 했다. 맨 처음으로 죽인 건 감정이고, 두 번째는 신뢰였다.

    어린 나이에도 내게는 이미 적이 많았다. 왕궁에서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죽음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걸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충분히 실감했다. 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오직 강자뿐이었다. 나는 그 강자가 되어야만 했다.

    세상은 오래전에 빛이 바랬다. 태엽처럼 돌아가는 삶이 지겨울 때도 있었다. 너무 지겨워질 때면, 생각을 비우기 위해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 했다. 목표는 분명했으므로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긴장이 풀린 걸까. 이 지겨운 꿈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는 건.

    ‘…츠.’

    아, 또다. 두통이 밀려들고 있었다. 조각날 것만 같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프란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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