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46화 (47/171)

제46화. 데릭과 셀리나

“프란츠 전하.”

붉은빛이 감도는 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프란츠의 앞에 다가와 섰다. 그는 아버지인 국왕을 닮은 이목구비 곳곳에 고혹적인 미인으로 유명한 어머니의 흔적이 엿보이는 미남이었다.

제1왕자 데릭 리나엔이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프란츠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제 비가 이곳에 왔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입니다.”

그 핑계로 제 쪽을 탐색하러 오셨다 이건가. 그의 속내를 눈치챘지만 프란츠는 느긋하게 몰리에게 눈짓했다. 사실이라는 듯 몰리가 고개를 조아렸다. 푸른색 눈동자가 상념으로 짙게 물들었다.

손님이라는 게 셀리나 왕자비인가. 자신을 찾아왔을 리는 없으니 목적은 제라니아일 것이다. 예전에 친했던 사이라 하나, 현재 서로의 입장을 모르지 않을 텐데 무슨 속셈일까.

단순히 지인을 만나러? 아니면 무슨 부탁을 하러 왔다거나.

문득 그는 제라니아를 떠올리고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삼켰다. 제라니아라면 정말 단순히, 차 한잔하자는 이유로 저자의 처소로 놀러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묘하게 태평한 구석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만큼 배짱도 두둑하고.

“왜 웃으십니까?”

“아닙니다.”

웃은 적 없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는 프란츠를 데릭이 불만스레 쳐다보았다.

“사실 제가 이제 막 돌아와서 상황을 잘 모릅니다. 우선, 형수님께 말씀을 넣어 보겠습니다.”

프란츠의 눈짓에 몰리는 발 빠르게 궁 안으로 들어갔다. 데릭의 입가에 삐뚜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가 궁에 들어가는 건 싫으신 모양이로군요.”

“그럴 리가요. 형수님의 의사를 존중하고자 할 뿐입니다.”

여상한 대꾸가 데릭의 신경을 깔짝깔짝 긁었다. 그는 자신보다 네 살이 어린 이복동생을 고요히 노려보았다. 능구렁이 열댓 마리는 먹은 놈 같으니.

잠시 뒤, 새까만 머리칼의 미인이 몰리의 안내를 받아 밖으로 걸어 나왔다. 시녀 몇을 뒤에 대동한 채 나온 셀리나가 데릭을 알아보고 제 입가를 가렸다.

“전하, 여기는 어떻게….”

생각보다 더 놀란 듯한 반응에 데릭은 작게 혀를 찼고, 프란츠의 눈에는 흥미가 깃들었다.

몰래 나온 건가. 도대체 왜?

“그만 돌아가도록 하지, 셀리나. 언제까지 여기 있을 생각이었나?”

“…미안해요.”

추궁하는 듯한 눈빛에 셀리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꼭 모아 쥔 두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걸 눈치챘지만 프란츠는 언제나와 같이 조용히 흘려보냈다. 자신이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이었다. 이 일에 대한 보고는 마담이 알아서 할 테고.

데릭이 손짓하자 셀리나는 총총 그에게로 다가갔다. 다정하게 아내의 어깨를 감싼 데릭이 엷게 미소 지었다. 안심한 듯 셀리나가 그를 보고 마주 웃었다.

금슬이 좋다더니, 소문이 가짜는 아니군. 무심하게 생각하며 프란츠는 입을 열었다.

“용건은 다 끝나신 겁니까.”

무생물을 보는 듯한 시선이 데릭과 셀리나를 향했다. 있든 없든 상관없지만 빨리 꺼지라는 듯, 축객령을 내리는 눈빛에 데릭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제가 지금 피곤하다 보니 배웅해드리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살펴 가시길 바라겠습니다.”

되도 않을 체력 핑계를 대며 망설임 없이 돌아서는 프란츠의 등에 대고 데릭이 이죽거렸다.

“괜찮으십니까?”

“…….”

“조심하시는 게 좋을 텐데요. 전하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 꽤 있지 않습니까.”

얼핏 듣기에는 조언처럼 들렸으나, 프란츠의 눈동자는 그 순간 차게 식었다. 아주 천천히 데릭에게로 고개를 돌린 그의 낯이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처럼 미소를 그려냈다.

프란츠는 천천히, 그러나 또박또박 글자를 뱉어냈다.

“비에게, 무언가 했습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능청스레 대답하는 남자와 달리 셀리나는 당황한 듯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그 낯빛을 기억에 담아둔 채 프란츠는 생각했다.

제롬을 붙여서 다행이군.

그라면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제라니아를 보호할 테니, 걱정할 필요 없었다. 저렇게 말할 정도면 한둘을 보낸 건 아닐 터다.

다만 어떻게 제라니아가 외출하는 걸 알았는지는 의문이었다. 제라니아 역시, 눈에 띄지 않고자 일부러 적은 수의 기사만을 데리고 나갔을 텐데.

마차를 따라갔나. 보고가 들어오지 않은 걸 보면 저쪽도 보낸 자의 수가 많지는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열댓 명. 작정하고 죽이는 건 몰라도 위협용으로는 적절한 숫자였다.

본인인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이상 무언가를 하지는 않았겠지. 바이첸 공작의 눈 밖에 날 수는 없을 테니까. 눈앞의 상대는 좋게 말하면 신중하고, 나쁘게 말하면 소심한 종자였다.

그제야 왜 데릭이 얼씬도 하지 않던 제 궁에 부리나케 달려왔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와중에 자기 아내가 여기에 와 있으니 초조했던 모양이지.

셀리나의 어깨에 얹어져 있는 데릭의 손을 힐끔 본 프란츠가 온화하게 웃었다. 무슨 꿍꿍이인지 파악하려는 양 눈을 가늘게 뜨는 데릭에게 프란츠는 느릿하게 말했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그 답례로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 머리로는 알지만, 불쾌한 건 다른 문제였다.

“게임에서는 상대의 말을 잡으려다, 본인이 잡아먹히는 일이 흔하게 벌어집니다.”

“뭐?”

“그래서 위치를 잘 잡는 게 중요하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오래, 살아남아야 하니까 말입니다.”

마지막 대답에 방점을 찍자, 멍해 있던 데릭은 그 뜻을 알아들었는지 점차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주제파악을 하라는 말을 던져준 뒤, 프란츠는 잊었다는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리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희 쪽 사냥개가 만만하지는 않아서 말이지요. 형님께서 염려하지 않으셔도 좋을 듯합니다. 사냥감은 뼈째 물어뜯어 죽이니까요.”

암암리에 사신이라 불리는 제 충직한 사냥개를 떠올리며 프란츠는 그 옆에 서 있는 셀리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형수님.”

“네, 네?”

화들짝 놀라 데릭의 옷자락을 꼭 붙잡는 셀리나에게 프란츠는 정중하게 말했다.

“편하실 때, 언제든 다시 방문해 주십시오. 비한테 말을 전해 두겠습니다.”

제라니아에 대해 꺼내자 셀리나의 낯빛이 살짝 어두워졌고, 프란츠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던 차 데릭이 분을 못 이기고 입을 열었다.

“무슨….”

“전하!”

데릭의 뒤에서 제법 큰 소리가 들렸다. 그의 뒤편으로 슬쩍 시선을 둔 프란츠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복도를 따라 제라니아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는 제롬이 함께였다.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제라니아가 프란츠와 데릭, 그리고 셀리나를 바라보았다.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셀리나와 달리 데릭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제라니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다들 여기에 왜 모여 있어요?”

“형수님께서 비를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

“저를요?”

정말이냐고 묻는 듯한 제라니아의 시선에 셀리나는 슬며시 눈을 피했다. 반응을 보니 지금 물어볼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아 제라니아는 눈을 되록되록 굴리며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그러니까, 이제 둘은 돌아가려고 하는 것 같은데….

“이만 가보겠습니다. 비전하, 나중에 또 뵙죠.”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셀리나와 함께 움직이려던 데릭의 발걸음을 프란츠의 말이 물고 늘어졌다.

“제 말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형님.”

데릭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복도로 걸어 사라졌다. 제라니아가 프란츠의 앞으로 다가왔다.

“대체 무슨….”

프란츠가 손을 뻗어 제라니아를 와락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제라니아는 눈을 깜빡였다.

“전하?”

“…어서 와요.”

중얼거리듯 말하는 프란츠의 등을 제라니아는 조심스레 껴안았다. 조금 놀랐다. 걱정했다는 뜻일까. 조각같이 생겨서, 온기라고는 없을 것 같은데도 저를 꼭 끌어안는 몸은 무척 따뜻했다.

한참을 그렇게, 제라니아를 끌어안고 있던 프란츠가 천천히 손을 풀고 제라니아를 내려다보았다.

“일은 다 끝났습니까?”

“대충은요.”

“생각보다 너무 빨리 왔는데.”

“밤새 달렸거든요.”

프란츠의 손가락이 제라니아의 눈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피로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쉬는 게 좋겠군요.”

“그나저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들어가서 얘기하죠.”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프란츠의 손을 꼭 잡았다. 앞장서 안으로 들어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프란츠 역시, 걸음을 옮겼다.

* * *

제게 이런 짓을 한 범인을 찾아내라는 국왕의 요구에, 프란츠는 뜸을 들였다. 묘할 정도로 길어지는 침묵에 성질 급한 켄드릭이 왜 대답이 없냐고 윽박지르려던 찰나, 딱 그 순간에 프란츠는 입을 열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말이나 해보라는 듯 고갯짓을 하는 켄드릭을 보며 프란츠는 싱긋 웃었다. 가벼운 어투로 술술 내뱉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제게 왕좌를 주십시오.”

그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았지만.

태연하게 양위를 요구하는 아들의 얼굴을 보며 켄드릭은 헛웃음을 흘렸다.

“뭐라고?”

“위험한 일이라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대가 없이 일할 생각은 없습니다.”

거대한 침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둘뿐인 공간에서 프란츠는 국왕을 똑바로 마주 보고 나른하게 말했다.

“은퇴하셔도 나쁠 건 없겠죠. 적성에도 안 맞는 정치에 시달리실 필요도 없고 말입니다.”

오늘 날이 좋군요, 딱 그 정도로 태연한 어조였다. 국왕이 탁상 위에 올려져 있는 옥으로 된 재떨이를 집어 들어 프란츠에게로 던졌다.

제 얼굴 바로 옆을 스쳐, 벽에 부딪힌 재떨이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프란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인형 같은 무표정한 낯빛에 대고 켄드릭은 씹어뱉듯이 말했다.

“건방진 놈.”

그 말을 부정하는 대신, 프란츠는 다른 말을 꺼냈다.

“물론, 이곳을 나서는 순간 여기서 들은 이야기는 전부 잊을 겁니다. 제 입에서 비밀이 발설될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프란츠는 한 걸음 물러났다. 국왕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확신이 깃들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국왕이 왜 자신에게 이 일을 맡기려고 하는지 슬슬 감이 잡혔다. 생각해보면 이 왕궁에서 이런 문제를 맡길 만한 상대는 자신밖에 없긴 했다.

정확히는, 맡겼을 때 어떻게든 해결할 만한 인간은. 당장 왕궁 내에서 신전과 결탁하지 않았을 법한 사람부터가 손에 꼽히게 적었다.

바이첸 공작에게 부탁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나선다면 국가적인 문제가 된다. 지금 왕궁의 생태를 생각하면, 몇 년은 질질 끌어야 하는 대사건이 될지도 몰랐다.

그러고도 해결을 장담할 수 없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그들 역시 증거를 지워버릴 테니.

전쟁터에서 전사한다면 차라리 명예롭게 여겨지기라도 하지, 독에 당해서 침실에서 골골거리다 죽는다면 국왕에게는 그만한 수치가 없을 터였다.

귀족이란 그런 이들이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 무엇보다도 우선되는, 수치스럽게 사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는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족속들.

“재미있구나. 양위를 해달라…. 그 후가 어찌 될지 알고 네게 왕위를 넘길까.”

내 목을 물어뜯길 기다리고 있었지 않으냐는 눈빛에도 프란츠는 무심하게 답했다.

“계약서를 쓰면 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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