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45화 (46/171)

제45화. 떡잎부터 푸르던 자

프란츠의 시선을 따라 세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정중하게 예를 갖추는 티레인 보데로아를 보자마자 세라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귀족가의 수치, 가문의 배신자. 명예와 체면에 목숨을 거는 귀족 사회에서 그는 이단아 그 자체였다.

아무리 정치가 필요하다면 혈육 역시 등진다지만, 사교계의 실세 중 하나인 보데로아 후작이 티레인을 배척하는 만큼 그와 어울리는 건 아무래도 껄끄러운 면이 있었다.

부리나케 사라지는 여인의 뒷모습을 무감하게 응시하던 프란츠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티레인이 절도 있게 따라 걸었다.

“제때 왔군.”

“제가 봐도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나름대로의 칭찬에 티레인은 한껏 너스레를 떨었다.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남자의 뒤를 따르며 티레인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 화를 내실 줄 알았습니다.”

“왜 화를 내지.”

“그런 말 싫어하시잖습니까. 바람둥이 같다느니, 그렇게 보이는 거.”

정확히는 아버지와 닮아 보이는 게 싫은 거겠지만, 티레인은 말을 아꼈다. 그는 방금 전 보았던 아가씨가 보였던 표정을 이해했다.

지금이야 무심하고 건조한 모습이 본인인 걸 알지만, 과거의 자신도 프란츠를 속 모를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았던가. 저런 소리를 듣고도 싱글싱글 잘도 웃는단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프란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답했다.

“화를 내서 얻을 게 뭐가 있나. 이 바닥이 소문 퍼지는 속도 하나 빠르다는 건 잘 알 텐데.”

“예에, 어련하시겠습니까.”

평소보다 더 서늘한 프란츠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티레인은 입을 다물었다.

건물의 밖으로 나가자 대기하고 있던 리암과 기사들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프란츠와 티레인이 마차에 올라타자 그들 역시 말에 올라타 마차 주변을 호위했다.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프란츠는 마차에서 내려 제 궁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용건이 있다며 재정부 쪽으로 간 티레인과 달리 프란츠의 뒤를 따라가는 리암의 갑옷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철컥거리는 소리를 냈다.

“전하. 한 가지만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말하라.”

돌려서 말할지, 그냥 말할지 고민하던 리암은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도대체가 무슨 놈의 암살자가 이렇게 많습니까.”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랬다. 어제는 칼부림이 벌어졌다면 오늘은 돌아오는 길에 어떤 놈들이 마차의 창문을 노리고 화살을 쐈다. 그가 조금만 더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면 분명 맞았을 것이다.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다 보니 범인을 찾기도 어려웠다. 덕분에 시간이 지체되었다.

방금 목이 날아갈 뻔했는데, 눈앞의 남자는 왜 이리 태연한가. 프란츠는 돌아보지 않은 채로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외출하면 늘상 겪는 일이라.”

“제롬 경의 신경줄이 남아나지 않겠는데요.”

“전혀. 오히려 스트레스 풀이에 좋다고 하더군.”

호위를 거의 교대하지 않는 이유는 제롬의 그런 성향 덕도 있었다. 그는 생긴 것과 달리 호전적인 면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프란츠의 명만은 충직한 개처럼 칼같이 따랐다. 프란츠가 그를 중용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왜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

이 정도로 끊임없이 암살 시도가 오는데, 대대적으로 뿌리를 파헤칠 만하지 않나. 리암의 의문에 프란츠는 가볍게 답했다.

“청소는 한 번에 하는 게 편하거든. 세상이 자기 것이 될 거라 믿을 때 뒤통수를 맞는 것만큼 기분이 더러운 게 없지.”

단서를 잡지 못해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심증은 물론이거니와 물증 역시 상당했다.

하나 그냥 무작정 파고들기엔 영주들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하기도 했거니와, 신전과 유착하고 있을 가능성 역시 다분했다. 때문에 정보를 모으되 시기를 보기로 말을 맞춘 상태였다.

확실한 명분이 생길 때까지.

태연자약한 말투에 리암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저 말을 꺼내는 왕세자의 목소리에 미묘하게 즐거운 기색이 어려 있어서 더.

“전하께서는…. 어째 처음 뵈었을 느낀 것과는 성격이 좀 다르신 것 같습니다.”

“그런가?”

“예. 성격이 좀…. 꼬이신 것 같달까.”

겁 없이 대답하는 젊은 기사에게 프란츠는 답했다.

“왜 비가 그대와 친한 건지 조금은 알 것 같군.”

함의된 뜻을 알아듣고 리암은 냉큼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저는 비전하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겸손이 아닌, 다분히 진심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저를 힐끔 돌아보는 프란츠를 마주 보며 리암은 시종일관 덤덤한 안색을 유지했다. 프란츠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그거 참 흥미롭군.”

“비전하께서는 첫 만남에서부터 예사롭지 않은 분이셨으니까요.”

“첫 만남?”

그다음 대답을 원하는 듯한 표정에 리암은 아차 싶었다. 이야기를 괜히 꺼냈나?

“말씀드려야 하는 상황인 겁니까? 명령이신가요?”

“명령이었다는 핑계가 필요하다면.”

결국 말하라는 얘기였다. 리암은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낮이라 그런지 궁인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양해를 구하고 프란츠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낮게 소곤거렸다.

“열두 살 어린애가 난데없이 남의 영지로 가출하는 일이 흔하지는 않잖습니까.”

느닷없이 짐을 싸들고 성으로 쳐들어온 여자애를 처음으로 봤을 때, 아홉 살의 리암은 어안이 벙벙했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연갈색 머리카락, 반짝이는 눈동자가 꼭 다람쥐를 연상케 하는 소녀가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소파에 앉은 채로 발을 흔들다가, 제게 쏟아지는 매서운 아버지의 시선에 화급히 다리를 모았다. 들썩이려는 몸을 애써 억눌렀다. 이크, 오늘 대련은 다 끝났으니 괜찮겠지?

‘넌 누구야?’

‘제라니아 바이첸. 혹시 네가 리암 그라시아야?’

‘맞아.’

그때는 바이첸 공작이 누군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자애가 대뜸 반말을 하는데도 아버지가 제지하지 않는 걸 보면 비슷한 신분이겠거니, 하는 눈치 정도는 있었다.

제게 인사를 건넨 뒤 여자애는 대뜸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희 아버지를 골탕 먹이고 싶으시죠?’

‘…뭐라고?’

‘저를 성에 머물게 해주시면 아버지가 공작 각하께 쩔쩔매는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자신 있게 말하는 여자애의 초록색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반짝거렸다. 대체 얘는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소리를 하는 건가. 심드렁히 그걸 지켜보고 있자, 아버지가 남들 앞에서만 보이는 근엄한 표정을 내보이면서 입을 열었다. 우웩.

‘맹랑한 꼬마 아가씨. 바이첸 공작이 아가씨를 납치했다는 사유를 붙여 내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은 건가.’

아버지의 말투는 퍽 부드러웠고 나는 그게 정말로 어색했다. 다정다감한 아버지라니, 언제 봐도 소름 돋는 일이었다. 저도 모르게 팔을 문지르고 있는 자신과 달리 여자애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 그건 걱정 않으셔도 돼요. 지금쯤이면 소문이 한창 퍼졌을 거라서.’

‘…소문?’

마차에 올라타 영지를 떠나기 전, 제라니아는 제가 그간 어울리던 어린 아이들을 모아 음식을 잔뜩 사서 안겨주며 노래 하나를 불러주었다. 제라니아의 의도대로, 아이들은 소프람을 돌아다니며 그 노래를 신나게 부르고 다녔다.

- 공작님이 아가씨를 내쫓았대요~ 아가씨는 울며 호소했지만 공작님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지~ 슬픔에 빠진 아가씨는~ 쓸쓸히 짐을 싸들고 성 앞을 떠났답니다~아이작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억울하고 환장할 내용의 가사였다.

실제로 그 노래가 영지에 퍼진 걸 알게 되고 아이작은 뒷목을 잡았다. 덕분에 셀바 영지에서 돌아온 뒤 제라니아는 한바탕 크게 혼이 났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듣고 진짜…. 장난 아니다 싶었죠. 제 아버지가 그렇게 웃는 건 난생 처음 봤습니다.”

그때 제라니아는 며칠간 셀바 영지에 머물렀다. 아이작이 그를 데리러 온 뒤 돌아갔으니 대략 사흘 정도 함께 지낸 셈이다.

그 이후로도 제라니아는 간간이 성에 놀러 왔고, 다른 형제들도 데리고 왔다. 솔직히 귀찮았지만 반짝거리는 눈으로 제 검술을 칭찬해주는 건 뭐, 나쁘지 않았다. 아버지는 칭찬과는 담을 쌓은 사람이었으니까.

호탕하게 웃어젖히던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며 리암은 찌푸려지는 이맛살을 용케 도로 폈다.

소문을 진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아이작은 제라니아를 데려가야만 했다. 셀바 영지에 방문해 제 여식을 데려가겠다 말하는 아이작에게 유리는 제라니아가 며칠이고 머물러도 환영할 거라고 살살 약을 올렸다.

늘 여유롭고 온화하다 싶은 남자가 으득 이를 악무는 것을 구경하는 유리의 얼굴에는 즐거움이 만연했다.

친하기는 하지만 그만큼이나 상대의 소소한 불행을 즐기는 사이.

아이작 바이첸과 유리 그라시아의 관계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라면 그러했다. 불효자까지는 아닌 선에서, 가끔씩 아이작의 복장을 뒤집어주는 제라니아를 유리는 꽤나 아꼈다.

마찬가지로 바이첸 공작은 리암을 유독 아끼는 편이었다. 그러니 리암이 바이첸 공작령으로 도움을 요청하러 왔던 것이고, 그럼에도 거절을 한 건 본인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 공작에게 섭섭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란 영감이 속이 참 좁다는 생각은 했지만.

순종하지 않는 귀족 여성, 얼핏 듣기엔 치부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리암은 프란츠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를 기억했다. 불만스러운 얼굴로도 제라니아의 요청을 묵인하지 않던 모습을 보면 이런 이야기 정도로 제라니아를 폄하할 것 같지는 않았다.

눈치를 보듯 프란츠를 바라보던 리암은 제 예상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프란츠는 웃고 있었다. 묘하게 기분이 저조해 보이던 방금 전과는 달리, 즐거운 듯이 입꼬리를 휘어 올린 그가 다시금 걸음을 내디뎠다.

“정말 한결같군.”

작게 중얼거리는 프란츠의 발걸음이 방금 전보다 아주 약간 더 가벼웠다.

궁에 도착하자, 몰리 세자르가 나와 프란츠를 맞이했다. 리암을 원래 대기하던 장소로 보낸 뒤, 프란츠가 몰리에게 물었다.

“비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제라니아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고 있었다. 하룻밤을 자고 온다면 저녁쯤에나 도착할 거리니 당연한 일인데도 묘하게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궁에 별일 없었냐는 프란츠의 질문에 몰리는 난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비전하를 찾는 손님이 오셨습니다만….”

“손님?”

몰리가 대답하기 전, 그들의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프란츠의 뒤편을 보자마자 몰리는 입을 다물었다. 프란츠는 뒤를 돌아보고 곧장 미소를 다듬었다.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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