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44화 (45/171)

제44화. 부동심의 남자

결과적으로, 왕자는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백작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마자 그는 곧바로 누군가를 불렀고 무언가 지시를 내렸다. 하룻밤이 지나기 전에 상황은 종료되었다.

그의 부하들은 날이 밝기 전 백작이 머무는 저택을 습격한 뒤, 백작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인질들의 위치를 알아냈다.

왕궁에서 한참 먼 지방에 있는 영지를 그토록 신속하게 쳐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남자의 수하들이 공간이동 스크롤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풍문으로만 들어본, 비싸고 귀하기로 유명한 물건을 고작 암살자 하나를 위해 아낌없이 쓸 줄이야.

날이 밝기 전 재빠르게 행동을 개시한 덕분에 다행히도 가족들은 무사했다. 제게 지시를 내렸던 자는 용병들 사이에서도 질이 나쁘기로 유명한 자였다. 자신처럼 백작에게 인질을 잡혀 울며 겨자 먹기로 그 밑에서 일하던 이들도 많았다.

제일 악질인 건 누군가 자기를 거슬리게 하면, 그를 벌하기보다 인질에게 해를 끼치는 방식을 고수한다는 점이었다.

어린 두 동생은 백작의 저택에 마련되어 있는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벌벌 떨면서도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고 했던 남동생과 달리 훨씬 어린 여동생은 혼절한 상태였지만, 둘 다 다친 곳은 없었다고 한다.

소식을 들었을 땐 정말로 안도했다. 꽁꽁 묶인 채, 반지하로 된 감옥에 끌려가 지상 쪽에 작게 난 창문을 통해 멍하니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을 때였다.

동생들이 무사할지 걱정되어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안심한 건지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백작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그 후로 그에 관한 소문이 뚝 끊긴 걸 보면 아마 그가 말한 대로 ‘처단’된 게 아닐까 싶었다.

감옥에서 불려 간 뒤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박박 씻겨진 다음 화려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는 왕자의 옆에는 회색 머리칼의 남자가 서 있었다. 계약은 성립되었다고 말하며 운을 떼는 왕자에게 그는 서늘한 낯빛으로 말했다.

‘제정신이 아니시군요. 암살자를 호위로 쓰시겠다는 배짱을 부리는 건 이 왕궁에서 전하밖에 없을 겁니다.’

왕족 앞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기함하는 자신과 달리 왕자는 익숙한 듯 제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가르쳐. 좀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제가 보모 노릇이나 하자고 전하의 수족이 된 줄 아십니까.’

‘못 하겠나?’

‘할 수 있습니다.’

냉큼 대답하는 남자의 얼굴에 곧 분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보기보다 도발에 잘 걸리는 건가, 생각하던 자신에게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빤히 시선을 주었다.

그다지 강해 보이지도 않는 상대인데 이상하게 긴장이 되었다. 그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렌스 빈즈입니다. 이름은?’

‘…제롬.’

‘신분은?’

‘평민입니다.’

‘왕족의 호위기사는 최소 귀족부터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오늘부터 귀족이 되어 줘야겠습니다. 제대로 출세하겠군요.’

‘…예?’

예전이나 지금이나 설명이 불친절한 남자는 그렇게 말한 뒤 자신을 끌고 갔다. 족보를 사들이고, 글자를 배우고, 여러 가지 예절들을 익히고…. 몇 달간의 노고를 거친 뒤에야 제법 그럴 듯하게 보일 수 있었다.

이야기를 마치며 제롬은 고요하게 제라니아를 응시했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는 있지만 그것에 혐오감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퍽 신기하다고 여기면서도, 제롬은 제 주군이 눈앞의 여인을 선택한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제 좀 궁금증이 풀리셨습니까.”

“네.”

“그럼 이만 출발하시는 게 어떨까요. 피곤하실 테니 눈이라도 붙이십시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한 자신보다는 제롬이 더 피곤할 것 같았지만 제라니아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라니아가 다시 자리에 앉자, 제롬은 시체를 한 자리에 모아 쌓아둔 뒤 천천히 마차 주변을 둘러보며 꽂혀 있는 화살들을 뽑았다.

힘들이지 않고 화살을 뽑아낸 그가 화살을 뚝뚝 꺾어 던져버린 뒤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잠시 뒤 말이 수풀을 헤치고 나타났다. 훌쩍 말에 올라탄 그가 마부에게 출발하자고 신호했다.

이랴, 소리와 함께 마차는 다시금 어둠을 헤치고 나아갔다. 마차의 움직임을 따라 가볍게 흔들리는 은은한 등불이 마차가 지나가는 길 위로 빛의 궤적을 흩뿌렸다.

* * *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들고 있던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프란츠는 우아하게 말했다.

화려하게 빛나는 금빛 머리카락, 부드럽게 휘어지는 입매,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주변에 남자들과 더불어 아름답게 차려입은 여성들이 서 있었다. 여인들 중 한 명이 아쉬운 듯 프란츠의 팔을 붙잡았다.

“정말 한 곡도 추지 않으실 생각이신가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프란츠의 손이 조심스럽게 여인의 손을 제 팔에서 떼어냈다.

“예, 아무래도 예전과는 상황이 다르니까요.”

이만하면 충분히 예의는 지켰겠다, 슬슬 돌아가도 될 것 같았다. 부드럽게 웃어 보이는 프란츠의 얼굴을 보며 새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리 결혼하셨다지만, 춤 한 번 추지 못하게 하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요?”

그 음성에 섞인 미묘한 비난을 눈치챈 프란츠는 다시 한번 정중하게 말했다.

“비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어째서 그런 결론으로 귀결되는 걸까. 원래도 그는 딱히 춤을 자주 추는 편이 아니었다. 남성이 여성에게 춤을 신청하고 여성이 받아들이는 방식을 보통으로 하는 사교계의 관습이 이럴 때는 편했다.

예의상 연회를 주최한 이의 여식이나 마담과 가볍게 춤을 추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사실상 그는 여인들과 늘 거리를 두었다.

결혼도 했으니 사람이 덜 몰릴 거라 생각했지만 그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오히려 예전보다 제게 다가오는 여인의 수가 늘었다.

오늘 파티만 해도 그랬다. 오스프리드 후작의 초대라 거절할 수 없어 오긴 했지만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은.

뒤쪽에 서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티레인은 속으로 느릿하게 수를 셌다. 열, 아홉, 여덟….

“전하께서 드디어 임자를 만나신 모양입니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어찌나 놀랐던지.”

“하긴, 바이첸 공작가라면 그럴 만도 하지요.”

일곱, 여섯.

정치적인 결합이 아니냐는 의미를 다분히 풍기는 말에도 프란츠는 선선히 웃고 있었다. 뒤로 물러나려는 그의 낌새를 눈치챘는지 남자들 중 하나가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비전하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드시는 겁니까?”

“말하기가 난감하군요.”

“어째서죠?”

“너무 많아서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다간 날이 샐지도 모릅니다.”

능청스러운 대답에 신사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다섯, 넷, 셋.

“모쪼록 좋은 시간들을 보내길 바랍니다. 그럼.”

둘, 하나….

그 말만을 남기고 뒤돌아서 연회장을 빠져나가던 프란츠의 뒤를 여인 중 한 명이 급히 쫓아왔다. 제 팔을 붙드는 손길에 프란츠는 멈춰서 옆을 돌아보았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여인은 연회장에 있던 여인들 중에서도 유달리 아름다웠으나, 그를 바라보는 프란츠의 시선은 지극히 무감했다. 프란츠의 팔에 가볍게 팔짱을 낀 여인이 살며시 고개를 들어 프란츠를 올려다보았다.

“조금만 더 있다 가시면 안 될까요?”

꽤 노골적인 유혹에도 프란츠는 덤덤했다.

“일이 있습니다.”

“그럼, 다음에는 언제 시간이 나시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제 남은 시간은 모두 비의 것이라서 말입니다.”

돌려 말하고 있지만 분명한 거절에 여인은 눈을 깜빡거리다 곧 눈웃음을 쳤다. 뭇 남자들을 홀릴 만큼 고혹적인 미소가 여인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본디 한 가지 음식만 먹으면 질린다지 않나요.”

세라의 녹색 눈동자가 수려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름답고 젊은 왕세자. 그는 유력한 차기 국왕 후보면서 그의 아버지인 국왕과는 여러모로 다른 길을 걷는 상대였다. 비를 맞기 전부터 이미 후궁을 두었을 정도로 정력적인 국왕과는 달리 이렇다 할 염문설 하나 없던 남자.

그는 모든 여인에게 다정한 태도를 고수했지만 그만큼 선을 그었다. 귀족들이 그에게 온갖 혼담을 보내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어디 한 군데가 문제 있다거나, 특이한 성벽이 있는 게 아니냐는 상스러운 뒷말이 오갈 정도로 여자 관련 소문은 깨끗했다. 여성들이 그렇게 관심을 보이는데도 말이다.

그런 그가 열렬한 사랑에 빠져 바이첸 공녀에게 청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교계의 모두는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한테도 기회가 올지 모른다.

결혼식장에서 본 공녀는 상당히 수수했다. 화려하고 고아한 외모로 사교계에서 이름을 날린 칼리아 바이첸,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로 데뷔탕트 때부터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코델리아 바이첸과 달리 이렇다 할 특징이랄 게 없었다.

얌전하고 차분한, 전형적인 귀족 여성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온갖 여인을 돌을 보듯 보던 남자가 굳이 저런 여자를 선택하다니. 왕실은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된 이유를 사랑 때문이라고 공표했지만, 귀족들 중 정말 사랑 때문에 결혼 상대를 고르는 이들이 몇이나 있던가.

보나 마나 정략적인 이유일 게 분명했다. 바이첸 공작가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러니 공작이, 사교계에서 유명한 딸들 대신 이름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둘째 딸을 그에게 보낸 게 아니겠는가.

“음식을 가려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누구보다 고급스러운 음식만을 입에 대었을 것만 같이 우아하게 생긴 남자의 말에 세라는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가요? 다른 음식을 입에 대보지 않으셔서 그런지도 모르죠. 국왕 폐하께서도 동의하실 테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프란츠의 눈동자에 짙은 혐오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여인의 팔을 떼어냈다.

“저는 국왕 폐하가 아니지 않습니까.”

건조해진 음성에 여인은 저도 모르게 프란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가 세라의 고막을 두드렸다.

“레이디 세라. 그대에게 더 어울리는 상대가 있을 겁니다.”

그게 자신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선을 긋는 얼굴조차 무척 아름다웠다. 세라는 홀린 듯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어라 더 말을 꺼내려는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이만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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