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43화 (44/171)
  • 제43화. 그의 비범한 전직

    석연치 않은 이렌스의 대답에 제라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정도예요? 대체 뭐길래….’

    ‘제 입으로 말하기보다는, 비전하께서 경한테 직접 말씀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대외적으로 말할 수 없는 일이라지만…. 비전하께서 질문하시는 거라면 어쩌겠습니까.’

    심드렁하게 말하고 있지만 꽤 재미있어 보이는 이렌스의 얼굴이 인상 깊었다. 마침 기회도 왔겠다, 제라니아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롬 경, 궁금한 게 있는데요.”

    “하명하십시오.”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젊은 기사를 빤히 쳐다보던 제라니아가 입을 열었다.

    “전하와는 어떻게 만나게 되신 거예요?”

    “아.”

    제롬은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부석 아래에서 꾸물꾸물 기어 나온 마부를 제외하고는, 근처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그는 조용히 소곤거렸다.

    “빈즈 씨로군요. 제 전직이 궁금하신 겁니까?”

    머쓱한지 눈꼬리를 한껏 내리며 뺨을 긁적이는 제롬을 보고, 제라니아는 서둘러 덧붙였다.

    “딱히 곤란하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암살자였습니다.”

    “…네?”

    순간 제라니아는 제 귀를 의심했다. 내가 방금 잘못 들은 건가? 지그시 그를 쳐다보자 대답을 재촉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제롬이 서둘러서 이야기를 부연했다.

    “전하의 침실에 숨어 들어갔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죠. 그 뒤에 회유당해서 호위기사가 된 거고요.”

    가벼운 투였지만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엄청난 소리를 술술 내뱉는 제롬을 보며 제라니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농담이라 생각하기엔 제롬의 눈이 너무나도 진지했다.

    “정말요?”

    “네.”

    단호하게 돌아오는 대답, 또렷한 눈동자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서늘한 밤공기가 피부에 닿는 것을 느끼며 제라니아는 말했다.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전하께서는 정말….”

    “보통이 아니시죠.”

    정말 극적으로 순화한 대답에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 어느 왕족이 자길 죽이러 온 암살자를 자신의 호위로 삼을까. 왕족이 아니라 귀족이어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농담이냐고 되묻지도 못하는 이유는 프란츠라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신들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하께서는 사실 목숨이 여러 개이신 건가요?”

    기어코 속엣말을 내뱉는 제라니아에게 제롬이 그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쓰는 일에 기가 막힌 추진력을 가지고 계시긴 합니다. 저도 제가 이러고 있을 줄 몰랐으니 말이죠.”

    제롬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이렇게 번듯한 차림새로 이런 곳에서 일하게 될 줄 5년 전의 자신이 과연 알았을까.

    제 인생은 흔해 빠졌다면 흔해빠진 이야기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돈을 벌기 위해 10대 초반부터 용병단에서 굴러먹었던 인생.

    그래도 나름 싸움에는 두각을 드러낸 덕분에 어디 한 군데는 기본으로 잘려 있는 놈들과는 달리 그럭저럭 멀쩡한 몸으로 살아왔다.

    설마 왕족 암살에 가담하게 될 줄은 몰랐다. 왜 하필 자신이 씹어 먹어도 모자랄 귀족 나리의 눈에 띄었을까. 성공해도 문제고 실패하면 죽는 것밖에 더 있나?

    당연히 거절했지만 백작이란 놈은 곧장 제 집을 습격해 가족을 인질로 잡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 정말이지 개 같았다.

    ‘찌를 거면 망설이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어찌어찌 침실까지 진입하는 건 성공했으나, 왕자가 깨어 있을 줄은 몰랐다. 눈을 감은 채 말을 거는 상대에게 기겁해 곧바로 심장에 칼을 찔러 넣으려 했지만 무언가 막에 부딪힌 것처럼 칼끝이 슬쩍 빗겨 나갔고, 왕자는 몸을 굴려 그 칼을 피했다.

    종이 딸랑거리는 소리에 아차 싶어 다시 칼을 휘두르려 했으나 곧장 문이 열리고 병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순식간에 붙들려 포박당해 무릎을 꿇은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고고해 보이는 미청년이 어둠 속에서 눈을 빛냈다. 어차피 죽을 거 비굴하게 굴고 싶지는 않아 그를 마주 노려보자,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제법 맹랑하군.’

    그 말과 함께 남자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무슨 소리를 하려고 저렇게 웃나 싶은 순간 그의 입에서 희대의 개소리가 튀어나왔다.

    ‘눈을 보니 쓸 만해 보이는데, 내 밑에서 일할 생각 없나?’

    당연히 심문을 하리라 생각했는데,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이제 갓 붙잡은 암살자를 앞에 두고 할 말이라기엔 모든 면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소리였다.

    ‘감히 날 죽이려 들었냐.’라든가, ‘배후가 누구냐.’라든가, 당연히 그런 소리가 먼저 나오는 게 정상 아닌가?

    ‘제정신인가요?’

    이게 대체 무슨 놈의 미친 소리인가.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되묻자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보시다시피 멀쩡하지.’

    퍽이나. 그런 시선으로 올려다보자 왕자는 픽 웃으며 몸을 움직였다. 부드러워 보이는 실크 잠옷 위로 보이는 작은 목걸이가 시선을 끌었다.

    귀퉁이가 깨져 있는 납작한 목걸이가 그의 몸을 보호하는 마법이 담긴 수호부였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일회용이라 한 번의 공격밖에 튕겨내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더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망설이지 말라고 했던 거였구나. 곧바로 한 번을 더 찔렀으면 성공했을 테니.

    ‘그 철통같은 경비를 뚫고 내 침실까지 들어올 정도의 실력자는 오랜만이거든. 비록 실패했다지만, 그냥 죽이기는 아깝고 말이지.’

    ‘…….’

    ‘존재가 드러난 암살자는 그 효용가치를 잃는다던데, 전직을 생각해서 나쁠 건 없지 않겠나. 인생역전 수준이 아닐까 싶은데 말이야.’

    꿀처럼 달콤한 말이 제 귀로 술술 흘러 들어왔다. 순간 혹할 뻔했으나 깊어가는 밤의 스산한 공기와 밧줄에 꽁꽁 묶인 몸, 제 무릎에 닿는 차가운 맨바닥이 현실을 일깨웠다.

    ‘절 살려서, 당신 곁에 두겠다고요? 제가 언제 당신 목에 칼끝을 들이댈지 모르는데도?’

    이를 악물고 대답하자 남자는 말했다.

    ‘잘 키운 사냥개는 주인에게 충성하는 법이지. 주인을 물어뜯으려 한다면, 내가 제대로 키우지 못한 걸 테고.’

    ‘그렇겠죠. 사냥이 끝나면 잡아먹히기도 할 테고 말입니다.’

    ‘배신하지 않는 사냥개를 죽일 이유는 없지.’

    안 그런가? 곱게 눈을 접어 웃는 얼굴과 달리 지극히 서늘한 푸른색 눈동자를 덤덤히 마주 보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오만해 보이기도, 한없는 무저갱처럼 보이기도 했다.

    돌려 말하고 있지만 결론은 저쪽이 날 키워보겠다 이거였다. 대놓고 개 취급 당하는 건 화도 나지 않았다. 실제로도 인간보단 개처럼 살긴 했으니까. 어쩌다 보니 지금은 목줄이 매였을 뿐.

    목줄의 주인을 바꾸라는 말은 퍽 유혹적이었다. 정착할 수 있다면 정착하고 싶기도 했고, 위험이야 용병 일을 할 때도 지긋지긋하게 겪었는데 새삼 두려울까.

    백정 같은 삶보다야 겉이라도 번듯한 직책이 낫지 않겠는가. 개도 몸 하나 피할 곳 없는 추운 밖에서 뼈다귀만 남은 밥을 먹는 것보다는 따뜻한 보금자리에서 살코기를 뜯는 걸 더 선호하는 법이다.

    고작 암살자 따위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눈앞의 남자는 아무래도 역시 미친 것 같지만.

    왕자는 병사들을 뒤로 물린 뒤, 무릎을 굽혀 자신과 시선을 맞추었다. 어둠 속에서도 상대의 이목구비는 선명하게 잘 보였다. 미끈한 얼굴은 딱 봐도 고생과는 인연이 멀어 보였다.

    ‘그럼, 협상을 해볼까.’

    꽁꽁 묶인 채로 협상이라는 단어를 쓰다니, 가당치도 않았다. 그러나 그걸 물고 늘어지기보단 남자의 말에 주목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저를 필요로 합니까? 실력 좋은 기사들이 지천에 널려 있을 텐데요.’

    ‘물론 그렇지. 하지만 나는 고고하게 검을 휘두르는 기사보다도, 무슨 수를 써서든 날 지켜줄 만한 실력자를 필요로 하거든.’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말이지. 자신을 회유하려는 듯 목소리가 은근하게 낮아졌다.

    말하는 걸 보니 아마 자신 말고도 수많은 암살자가 다녀간 모양이었다. 처소 주변에 무슨 병사가 그렇게도 많은지, 들키지 않고 순식간에 이동하느라 애를 먹었다.

    적이 많은가? 싶다가도 눈앞의 남자에 관해 아는 건 얼굴과 이름 정도밖에 없었는지라 섣불리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보통 자길 죽이려고 하던 인간을 옆에 두겠다고 하나?

    순진한 건지, 철저한 건지 모를 상대였다. 나중에 돌이켜 보고는 그를 한 순간이라도 순진하다고 생각한 자신에 놀라웠지만 말이다.

    ‘널 보낸 게 누군지는 몰라도, 그 인간보다 더한 대우를 약속하지. 그러니 날 따라라.’

    당당하게 말하는 게 참 왕족답다 싶었다. 비아냥거리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퉁명스레 말했다.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내가 바라는 건, 당신이 줄 수 없는 겁니다.’

    ‘인질인가?’

    날카롭게 훅 들어오는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고, 왕자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인질이군.’

    턱을 잡고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젊은 왕자를 노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성공하지 못하면 죽기라도 하나? 아, 뭐. 얼굴을 보니 빤하군. 그럼 조건을 더하지.’

    ‘무슨….’

    ‘배후의 이름을 대라. 놈을 처단하고 인질을 되찾아 주지.’

    단칼에 대답하는 남자의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차갑다는 느낌은 들지만, 잔혹해 보이지는 않았다.

    ‘계약 조건을 뭘로 할까 했는데, 적합한 게 생겼군.’

    자신을 보낸 게 누구인 줄 알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걸까. 이제 갓 성인이 된 왕자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머리와 달리 입은 정직했다.

    ‘인질들은 모두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해야 합니다. 그 조건이 아니라면 받아들일 생각 없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실패한 이상 가족들은 어차피 죽은 목숨이었다. 제 목숨이라면 차라리 던져줄 수 있었지만 가족들은 달랐다. 그들을 살릴 방도가 있다면야 자존심 같은 건 얼마든지 꺾을 수 있었다.

    ‘협상 성립이군.’

    그는 배부른 맹수처럼 만족스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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