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습격
“걔는 알아서 하겠죠. 밀드레드 씨만 옆에 있으면 다 좋다고 할 것 같던데요.”
장난스럽게 말하는 목소리는 여태껏 무거웠던 분위기를 끌어올리려는 듯 무척 쾌활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줄리아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머물렀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비전하.”
부드럽게 대답하는 줄리아를 향해 제라니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줄리아가 가볍게 대답했다.
“리암 정도로 유명하면 싫어도 소식을 듣게 되죠. 공작가의 후계자를 대놓고 이름으로 부를 만한 신분이라면 뻔하니까요.”
도련님이라는 호칭 대신 리암이라 부르는 목소리에 한숨이 섞여들었다. 피로해 보이는 젊은 여인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둠 속으로 묻혀가는 줄리아의 새까만 머릿결이 바람에 나부꼈다. 그 뒷모습을 제라니아는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정말 곧장 수도로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제라니아가 마차의 문을 닫고 출발을 명하자, 말에서 내린 제롬이 그 앞으로 다가와 걱정스레 말했다.
“밤이 늦었으니, 하룻밤 머물고 가셔도 좋을 텐데요.”
“그래도 좋겠지만, 아무래도 전하께서 걱정하실 것 같아서요.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고요.”
제롬과 함께 데려온 기사들은 도시의 외곽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거창하게 움직이면 오히려 겁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제라니아는 오직 제롬만을 데리고 도시로 들어왔다.
이미 깜깜해진 주변으로 간간이 점을 찍은 듯한 불빛 몇 개가 반짝거렸다. 밤새 달려가면 오전이 끝나기 전에 수도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밤중이라 아무래도 좀 위험할까요?”
도적 떼가 나타난다든가, 하는 위험이 있을지도 모른다. 수도까지 연결된 길은 평지였으니 밤에 달리는 것 자체는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제롬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니요. 그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마차의 쿠션이 푹신하다 하나, 밤새 앉아 있으려면 아무래도 피곤하시지 않을까 합니다.”
“그 정도는 괜찮아요.”
배시시 웃어 보이는 제라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혹 피곤하시다거나 몸에 이상이 있다 싶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깍듯하게 대꾸한 제롬이 뒤로 물러났다. 그가 말에 올라타며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고, 마차는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도시를 나서 양옆으로 나무가 우거진 넓은 길이 드러났다. 대기하는 기사들이 머물고 있을 장소로 향하는 제롬의 귓가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재빨리 고삐를 확 잡아당겼다.
말이 앞발을 높이 들고 푸르릉 울어대는 것과 동시에 핑,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바닥에 푹 꽂혔다.
어둠 속에서도 그게 화살이라는 걸 바로 알아본 제롬은 곧바로 말에서 뛰어내려 마차로 달려갔다. 스르릉, 검이 뽑히는 소리가 어딘가로 뛰어가는 말 울음소리와 섞여 고막을 긁었다. 그가 마차에 가까이 붙으며 소리쳤다.
“창을 닫으십시오!”
창문 밖으로 달려오는 제롬을 본 순간, 제라니아는 재빨리 반대편 창을 닫았다. 철로 된 판에 비슷한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비처럼 쏟아졌다.
그래도 줄리아를 만났을 때 나타나지 않아서 다행인가.
오직 마차의 불빛만이 빛을 발하는 어둠 속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게 차려입은 살수들이 하나둘씩 마차로 다가오고 있었다.
대여섯쯤 되는 저쪽과 달리 이쪽은 제롬 혼자였다. 긴장하는 제라니아의 앞에서 제롬이 낮게 속삭였다.
“걱정 마십시오, 비전하.”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해치우면 그만이었다. 제롬은 가만히 적의 수를 헤아렸다.
보이는 건 여섯. 근처에 보이는 나무 위에 기척을 숨기고 대기하고 있는 놈 셋. 아홉이면 충분히 상대할 만했다.
그는 가만히 머리를 굴렸다. 그렇다고 해도 적의 수가 예상보다 많은데,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간 거지? 도시를 벗어나, 딱 기사들과 만나기로 한 지점 중간에서 매복하고 있었던 걸 보면 눈에 띄게 움직일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마부에게 마차 아래로 숨으라고 손짓한 뒤 제롬은 검을 고쳐 쥐었다. 마차에서 두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둔 상태로 선 채 제롬은 가만히 챙겨둔 무기의 수를 속으로 헤아렸다.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던 중, 셋이 동시에 제롬에게로 달려들었다. 하나는 짧은 검과 장검 하나, 둘은 장검 하나씩을 들고 있었다.
제 머리로 내려치는 검을 가볍게 피한 제롬이 곧바로 그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었다. 고깃덩어리를 찌르듯 물컹한 감촉이 손끝에 전해진다 싶은 순간, 제롬의 옆구리로 파고든 이가 단검으로 그의 급소를 찌르려 했다.
제롬은 곧장 검을 쥔 손을 놓고 몸을 틀어 그의 손목을 붙잡아 위로 올린 뒤 비어 있는 그의 배를 발로 세게 걷어찼다.
“아악!”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복부를 파고드는 고통에도 어떻게든 다른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제 허벅지에 찔러 넣으려는 이의 손목을 제롬이 무자비하게 꺾었다.
뚜둑,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살수의 손에서 장검이 떨어졌고, 그를 끌어당긴 제롬이 제게 휘둘러지는 또 다른 검에 그를 들이밀었다. 살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축 늘어지는 상대를 바닥에 팽개치는 제롬의 손에 그가 쥐고 있던 짧은 검이 들려 있었다. 팔에서 팔꿈치 정도까지만 될 정도로 검신이 짧고 뾰족했다.
상대가 바닥에 쓰러지는 그 짧은 시간, 제롬은 방금 전 제게 검을 휘두른 남자에게로 파고들어 그의 가슴에 검을 꽂았다. 베어내면 편하겠지만 그러면 피가 튀는 게 성가셨다. 비전하를 놀라게 해드릴 생각은 없었다.
가슴에 칼이 꽂힌 남자의 손에서 장검을 집어 들자마자 그의 머리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곧장 검날로 그것들을 쳐내고 뒤로 물러났다.
호위할 놈이 하나라도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자신 혼자뿐이니, 마차에서 멀리 떨어져서는 안 되었다.
그는 옆구리에 차고 있던 단검 중 하나를 정확하게 화살이 날아왔던 방향으로 집어 던졌다. 순식간에 대각선으로 날아간 단도가 무언가에 꽂히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 하나가 나무에서 바닥으로 추락했다.
수풀 위로 둔탁하게 떨어진 몸이 요란스레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제롬은 나머지 살수들이 휘두르는 검을 막아냈다. 둘이 그를 상대하고, 나머지 하나가 마차로 접근했다.
접근하려고 했다, 가 맞겠지만.
“컥!”
제 목으로 날아오는 검을 고개 숙여 피한 제롬이 검을 휘둘러 한 놈의 복부를 베어낸 뒤 그를 발로 차 다른 놈한테로 밀었다.
쓰러지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린 제롬이 단검 하나를 더 뽑아 마차로 뛰어가는 놈의 머리로 던졌다.
뾰족한 단검이 꼬챙이처럼 남자의 관자놀이에 푹 꽂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풀썩 쓰러지는 남자를 확인하자마자 제롬은 장검을 제 머리 위로 들었다.
화살촉이 검에 튕겨져 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바닥에 넘어졌던 이가 일어나 제롬에게로 달려들었다.
서늘한 검 끝이 어둠 속에서 그의 어깨로 날아들던 찰나, 제롬은 검으로 그것을 막아낸 뒤 몸을 숙여 상대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잡았다.
움켜잡은 살수를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홱 돌린 뒤 그 아래로 몸을 낮췄다. 화살 몇 개가 방패처럼 내민 살수의 몸에 꽂히는 소리가 들리고, 붙잡은 몸이 힘없이 널브러지는 것과 동시에 곧 기척이 사라졌다. 나머지 둘은 도망친 모양이다.
쫓아갈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자신이 지금 제일 우선해야 하는 건 따로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이들을 하나하나 확인해보며 제롬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놈쯤은 살렸어야 하는데 다 죽여버렸군. 전하께 한 소리 듣겠다며 속으로 한탄하던 그는 터벅터벅 마차로 다가갔다.
은은하게 불빛이 감도는 마차의 창문 밖으로 제라니아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왜 창을 닫지 않으셨습니까.”
마차에서는 계속 불빛이 어른거렸다. 그 말은 창을 제대로 닫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화를 당하셨으면 어쩔 뻔했냐고, 그렇게 묻는 진중한 눈동자를 마주하며 제라니아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미안해요. 그렇지만 저도 모르게….”
여행을 갔을 때도 어두운 마차 안에서 상황이 끝나가는 걸 기다렸기 때문에, 제롬이 직접 싸우는 걸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창문을 닫기 전 보이는 모습에 호기심이 일었고, 조금만 지켜봐야지 하는 순간 이미 다 끝나 있었다.
절도 있게 검을 휘두르던 크리스토퍼나 제법 자유롭고 유연한 느낌으로 움직이던 리암과 달리, 제롬의 움직임은 무척 거칠고 무자비했다.
분명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했지만 정식으로 검을 배운 기사라기보다는 날것의 느낌이 났는데, 그러면서도 강하다는 게 어둠 속에서도 느껴졌다.
대련이 아니라 육탄전으로 싸운다면 과연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틀에 얽매이지 않았고 무척 변칙적이었다. 혼자서 순식간에 대여섯을 처리하고도 멀쩡한 걸 보니 왜 프란츠가 그를 호위로 두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단정한 얼굴과는 전혀 다른 난폭한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도서관에서 이렌스와 나누었던 대화의 한 귀퉁이가 제라니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전하에 대해서 말입니까?’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이렌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걸 왜? 의문이 가득한 눈동자에 제라니아는 차분하게 답했다.
‘그…. 제가 생각보다 프란츠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는 사실이 떠올라서요.’
결혼한 사이인데도 아는 게 너무 없었다. 애초에 계약으로 성립된 관계기는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프란츠는 자기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일까.
묻는다면 대답해줄 것 같았지만, 결혼 전 들려오던 소문들을 생각하면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때문에 일단 우회책을 시도하기로 했다. 마침 정보를 알려줄 만한 사람이 곁에 있지 않은가.
‘왜 직접 묻지 않으십니까. 딱히 숨기시는 것도 아닐 텐데요.’
‘물론 그럴 거긴 한데, 사전 정보가 있으면 그것대로 좋잖아요.’
‘일리 있는 말씀이군요.’
선뜻 대답한 뒤 이렌스는 책을 내려놓고 고민에 빠졌다.
‘전하라….’
잠시 말끝을 흐리던 그가 곧 대답했다.
‘평범한 분은 아니시죠. 티레인 경과 같은 인간을 아무렇지 않게 수하로 부리는 것부터가 그걸 증명하지 않습니까.’
언제 봐도 입담 한번 걸출했다. 돌려 말하고 있지만 직설적으로 요약하면 ‘제정신은 아니다.’라는 뜻이었다.
사람은 가린다고 하던데, 이렌스가 자신을 편하게 여기는 건지 어디에 떠들어도 상관없어서 저렇게 말하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벨루인 장관이 왜 그를 두고 골머리를 앓는지는 알 것 같았다. 제라니아는 무심코 덧붙였다.
‘그래도 제롬 경은 평범하지 않나요.’
정적인 후작의 하나뿐인 후계자, 재정부의 신랄한 괴짜를 생각하면 확실히 수수하다 싶을 정도로 제롬은 눈에 띄지 않았다. 젊고 단정하고 말수가 적은 기사. 딱 그런 이미지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순간 이렌스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가 무척 떨떠름한 투로 답했다.
‘제롬 경이…. 평범하다고요? 아, 뭐. 지금은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