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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39화 (40/171)

제39화. 반쪽짜리 정답

시큰둥한 얼굴로 농담을 던지는 프란츠의 모습에 제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가를 가리는 제라니아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가 재차 말했다.

“나는 하지 못하는 것에 미련을 두기보단,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합니다. 그게 효율적이니까요. 당신이 하지도 못하는 자수보다는 책을 읽고 사람을 다루고 호감을 얻어내는 일에 능한 것처럼 말이죠.”

방심하고 있다가 훅 들어오는 직격타에 머리를 얻어맞고, 제라니아는 조금 억울한 얼굴이 되었다.

“전하까지 이러시긴가요.”

“…….”

“물론 제가 그런 걸 전혀 못 하긴 해요.”

제라니아는 선선히 인정했다. 결혼하기 전, 제가 만든 자수를 궁금해하는 프란츠에게 예전에 만들었던 자수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프란츠는 물끄러미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개성이 넘친다는 평을 남겼다.

굳이 돌려 말하시지 않아도 괜찮은데. 가족들조차 제 손재주에는 차마 긍정적인 평을 주지 못했다.

분명 그림을 참고해서 만들었는데 왜 머리로는 되는 게 손으로는 구현을 못 하는 걸까.

프란츠는 나직하게 말했다.

“아무튼, 내 의견은 그렇다는 겁니다. 당신이 해결하기 어려운 범주의 일에 지나치게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모든 걸 완벽하게 잘해낼 수는 없으니까요. 나 역시 당신에게 그런 걸 바라서 청혼했던 것도 아니고, 당신도 내게 완벽함을 바라진 않았죠.”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족속은 이 궁에 널리고 널렸다. 윌터 케라온은 그 다수 중 한 명일 뿐이었다.

당신이 나약해 보이기 때문에 그가 나선 것은 아닐 것이라고, 프란츠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힘을 내세우는 자는 힘으로 누르는 게 가장 간편하니까.

물론 그는 제라니아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저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리라는 것도 알았다.

“당신이 그런 방식에 불쾌감을 느끼는 건 당연합니다.”

돌아가게 되더라도, 더 괜찮은 길을 찾고자 하는 당신이라면 분명 그렇겠지.

프란츠는 여전히 제라니아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었다. 그가 덧붙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바꾸면 됩니다.”

“네?”

“말했잖습니까. 나와 이 나라를 바꿔볼 생각이 없냐고.”

청혼을 할 때 꺼냈던 말에 제라니아는 멍한 얼굴이 되었다. 까먹고 있었다는 그 반응에 프란츠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뭘 하고 싶다면, 하면 됩니다. 권력은 그러라고 있는 거니까. 당신이 조금 더 권력을 휘두를 줄 알게 되면 좋겠군요.”

“…하지만 그건, 전하께서 가진 권력이잖아요. 제가 가진 권력이 아니라.”

제라니아의 지적에 프란츠는 불쾌한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라니아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이래도 되는지. 제가 전하의 여인인 건 사실이지만….”

무어라 말을 꺼내려던 제라니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대신 다른 말을 입에 올렸다.

“보호받기만 하는 건 솔직하게 말해서, 내키지 않아요.”

“그건 이미 첫날 체감했습니다.”

프란츠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떠올랐다. 불안함으로 일렁이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제라니아는 의문에 빠졌다. 무던하다 싶을 정도로 냉정한 남자는 유독 제 안전에 대해서만은 강박적인 반응을 보였다.

궁의 병사 태반이 그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증원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첫날 나누었던 대화 이후 그런 식으로 자신을 억류하는 일은 그만뒀지만, 그게 그가 가진 불안감이 해소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지금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라도, 나중에는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고민하는 제라니아를 보며 프란츠가 가볍게 부연했다. 그러니 너무 고민하지 말라는 걸까.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제라니아의 시선에 프란츠는 말끝을 흐렸다. 당혹스러운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프란츠의 입이 다물렸다. 어색한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휘감았다.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프란츠를 본 제라니아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 감사합니다, 전하. 진지하게 들어 주셔서요.”

고민이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기분이 나았다. 말로 털어놓으니 한결 생각이 정리되는 것도 같았다.

제라니아의 얼굴 위로 부드러운 미소가 머물렀다. 그 미소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프란츠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런가요.”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라고 말하며 프란츠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젖히고 피곤한 듯 눈가를 손가락으로 누르는 프란츠에게 제라니아는 걱정스레 말했다.

“쉬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조금만 자고 나가겠습니다.”

“주무실 거면 침대에서…. 어라.”

눈을 감은 채로 움직이지 않는 프란츠의 앞으로 다가간 제라니아가 손을 뻗었다. 가만히 뺨을 매만졌지만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잠드신 건가.”

뭐라도 덮어줄까 생각하면서도 제라니아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잠든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기도 하거니와, 지금의 얼굴이 이제껏 본 얼굴 중 가장 편안해 보였다.

위병에게 말해 침대로 데려가는 게 맞을까 싶다가도, 몸을 크게 움직이면 그가 깰 것 같아 그만두었다.

“새삼스레 느끼는 거지만, 정말 조각같이 생기셨네.”

흐트러진 금빛 머리카락과 선명한 이목구비, 번듯한 이마를 손으로 천천히 쓸어 올렸다. 잡티 하나 없이 매끈하고 하얀 피부가 손끝에 닿았다. 무척 하얗지만 창백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 게 신기했다.

피곤할 텐데도 자신을 걱정해서 보러 온 걸까. 깃털이 닿은 것처럼 간질거리는 기분이 가슴속으로 퍼져나갔다.

그의 귓가로 다가간 제라니아가 살며시 속삭였다.

“고마워요, 프란츠.”

* * *

제법 짧아진 낮이 지나가고 순식간에 차가운 어둠이 사방을 잠식했다. 은단추를 닮은 둥그런 달과 그 주변에 흩뿌려진 별들이 까만 비로드를 닮은 밤하늘 위를 수놓았다.

어두운 방, 창틀에 걸터앉은 크리스토퍼가 무료한 시선을 하늘에 두었다.

와인이 담긴 잔을 한 손에 들고 달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옆얼굴을 밝은 달빛이 비스듬히 비췄다. 가벼운 옷차림에 단추를 목까지 채워둔 그의 머리카락이 바람을 따라 살랑거렸다.

평온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그의 머릿속은 다소 복잡했다. 누구와 상의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더 그런 건지도 몰랐다.

얼마 전의 일이었다.

“임무라고요?”

부름을 받고 어전으로 향하자, 몇 명의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기사단 내에서도 성실하기로 유명한 이들이었다. 그 외에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었다.

계단 위 높이 솟은 옥좌에 앉은 켄드릭 왕과 계단 아래에 서 있던 프란츠 왕세자가 그를 맞이했다. 주변에 시종이라고는 일체 없는 데다, 커튼을 쳐두어서 그런지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어전 내부는 묘하게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기사들이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다들 모인 것 같으니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며 왕세자가 입을 열었다.

맡길 임무가 있다고.

헤네스의 질문에 왕세자는 고개를 까닥였다.

“그렇습니다. 그대들은 이제부터 2주간 있을 시찰에 참여한 것으로 하고, 극비리에 다른 임무를 맡게 될 겁니다.”

절대 외부에 발설해선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왕세자의 눈빛이 진지했다. 옥좌에 앉아 있던 왕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국왕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역모와 관련된 일이다.”

왕세자는 들고 있던 두꺼운 종이다발과 주머니를 기사들에게 넘겼다.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자료를 넘겨받은 기사들이 하나둘씩 페이지를 넘겼다. 자신은 물론, 다른 이들의 눈에도 경악이 들이쳤다.

개중 가장 활달한 성격을 가진 보노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뭡니까, 이건.”

이 자료의 근간은, 티레인이 시트라움으로 가 고아원 원장의 여동생을 찾아낸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영주에게 부탁해 기록을 열람한 뒤 그 기록을 기반으로 여자를 찾았다.

보통 어떤 영지에 소속된 평민이 다른 영지로 옮겨 가는 경우는 드문 만큼, 티레인은 그의 여동생이 여전히 시트라움에 살고 있을 거라 추측했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그 미친 인간이 드디어 죽었소?’

에밀리 로페. 결혼 전 이름이 에밀리 모레인이었던 여성은 티레인의 방문을 당황스러워했다.

제법 부유한 농민의 아내로 삶을 보내고 있던 여성은 세월에 닳아 거칠해진 손과 마른 골격, 걸걸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 위로 회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오빠의 소식에 놀랄 만큼 덤덤한 태도로 대답한 여자는 티레인이 탁자 위에 슬그머니 내민 은화를 보며 눈을 빛냈다.

치즈를 물고 가는 쥐보다 더 잽싼 솜씨로 돈을 낚아챈 그가 입을 열었다. 슬그머니 말투를 존대로 바꾸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맥스 모레인이 집을 떠난 건 대략 12년 전의 일이었다. 다행히도 여자는 그때 있었던 일을 어느 정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당시 맥스의 태도는 쉬이 잊히지 않을 정도로 괴상했다.

맛이 간 인간이었다며 신랄하게 내뱉는 여자의 회색 눈동자에 상념이 스며들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든 건지, 좋은 기회가 들어왔다면서 제게 같이 가자고 설득하더군요.’

‘기회라고요?’

‘예, 무슨 높으신 분들이랑 연관된 일이라고는 하던데. 인생역전을 할 수 있다나? 들으면 들을수록 수상해서 거절했지만. 그랬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새벽에 떠나더라고요. 매정한 놈 같으니!’

‘어디로 갔습니까?’

‘동쪽으로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엄청 큰 도시라고 하던데…. 이름은 모르겠고요.’

‘그 도시에서 뭐가 유명하다든가, 그런 소리는 없었습니까. 아니면 뭔가를 챙겼다거나.’

‘그건 잘 모르겠고, 낫이라든가 도끼를 챙기긴 했어요. 그 망할 놈이 내가 모아뒀던 비상금은 언제 봤는지, 그것까지 홀랑 챙겨서 내뺐지 뭐예요. 물론 나중에 돈을 보내기는 했다지만, 정말이지 도리깨로 후려쳐도 시원찮을 놈이!’

‘잠깐, 돈을 보냈단 말입니까? 혹시 어디에서 보냈는지 적혀 있다거나.’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요? 정기적으로 돈주머니를 문 앞에 두고 가는 정도인데! 세크렛도 그놈보다 음침하진 않을 거예요. 그놈은 어릴 때부터 그랬지, 앞에 나서기보단 뒤에서 수작질을….’

온갖 욕설을 내뱉는 여인을 달래가며 정보를 얻은 끝에, 티레인은 동쪽에 있는 세 개의 도시로 범위를 잡는 것에 성공했다.

사람을 많이 쓸 수 없어 시간은 꽤 걸렸지만, 느리지만 꾸준한 조사 끝에 그는 진네프 영지에 있는 도시 아렌타를 지목했다.

당시 동쪽의 상황을 생각하면 낫이나 도끼를 챙긴 것도 납득이 되었다. 그때는 아직 프로모 왕국이 건재할 때였고, 동쪽 경계에서는 크고 작은 충돌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세 개의 도시 중, 브론스와 넬핀에는 명백한 결격 사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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