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38화 (39/171)
  • 제38화. 의문

    “뭐야, 미친 새끼 아니야?”

    크리스토퍼의 배웅을 받아 궁으로 돌아온 뒤, 시녀들에게 입단속을 시킨 제라니아는 곧바로 리암을 불러들였다.

    그가 제라니아와 같이 올 때부터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했던 리암은 대체 무슨 일이냐고 득달같이 질문했고, 제라니아는 차근히 상황을 정리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저속한 욕설을 입에 담는 리암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저도 모르게 반말을 내뱉는 리암을 제라니아는 제지하지 않았다. 마침 주변에 사람이 없기도 했고, 제라니아로서도 속 시원히 말을 꺼낼 사람이 필요했다.

    “무슨 그런 미친놈이 다 있어? 왕족한테 그래도 돼?”

    “그러게.”

    “케라온 공작은 도대체 자식을 어떻게 키우는 거야?”

    황당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리암의 모습을 보며 제라니아는 말없이 쿠키를 베어 물었다. 그들은 서재 한 구석에 마련된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아 있었는데, 쿠키를 깨작거리는 제라니아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리암이 툭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너, 표정이 별로네.”

    “응?”

    “문제는 어쨌거나 잘 해결된 거 아니야? 묘하게 표정이 그저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어?”

    “그….”

    물끄러미 리암을 바라보던 제라니아가 입을 달싹거렸다가, 도로 닫았다. 애매하게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 말하던 제라니아는 리암이 더 캐묻기 전에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틀 뒤야. 잊지 않았지?”

    “물론이지. 오랜만에 몸 좀 풀겠네.”

    프란츠를 호위하러 가달라는 말을 전할 때, 리암은 드디어 때가 온 거냐는 듯 애잔한 표정을 지으며 알겠다는 대답을 남겼다. 사고를 친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도, 그는 무어라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제법 의연하게 구는 리암을 보며 제라니아는 일이 의외로 잘 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뭐, 다른 사람들 입장에선 좋은 구경거리라면 구경거리였겠네. 공작가의 후계끼리 경쟁한 거니까 말이야.”

    잘못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결투의 특성상, 이런 승부가 성사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둘 다 신분이 같고 장남이긴 하지만 남자 형제가 있는지라 허용된 일이었다.

    리암과 같이 외동인 경우, 결투를 하려는 의지를 표한다 해도 대부분은 주변에서 말렸다. 하나뿐인 후계자를 잃어버리게 되면 가문으로서는 낭패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장난 아니긴 했지.”

    제라니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제로 무척 치열했고 거의 순식간에 승부가 났다. 그렇게 떠들던 기사들이 시합이 시작되자마자 숨을 죽이던 것만 봐도 그 무게를 짐작할 수 있었다.

    결투가 끝나고, 같이 궁으로 돌아올 때 제라니아는 시녀들을 세 걸음쯤 더 뒤로 물렸다. 딱 한 발자국 뒤에서 걸어가던 크리스토퍼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자는 걱정할 필요 없어. 다시는 네게 접근하지 않을 거야.’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바로 알았다. 제라니아는 잠깐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소원이라는 조건을 왜 거나 했는데, 그래서였어?’

    ‘기사의 명예를 건 승부야. 무엇을 걸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 더 체면을 구기고 싶진 않을 테니까.’

    ‘결과가 반대로 나왔을 수도 있잖아. 그랬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던 건데.’

    ‘질 거라고 생각한 적 없어. 그자는 분명 강하지만, 약점이 분명하거든.’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제라니아가 머무는 왕세자궁의 모습이 저 멀리 보였다. 입구 앞에 멈춰 선 제라니아는 크리스토퍼를 돌아보았다.

    ‘도와줘서 고마워. 그리고 이긴 거 축하해.’

    ‘고마워.’

    그제야 크리스토퍼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무뚝뚝하던 얼굴에 웃음이 떠오르니 순식간에 표정이 확 밝아졌다. 덤덤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던 제라니아의 입이 살짝 열렸다가 도로 닫혔다.

    ‘조만간 얼굴 보러 가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얼굴은 봤네.’

    홀가분한 얼굴을 하고 있는 크리스토퍼에게 제라니아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망설임을 꾹꾹 눌러 담은 푸른색 눈동자가 제라니아를 쳐다보았다. 크리스토퍼는 입을 열었다.

    ‘제라니아, 나.’

    당분간 얼굴 보기 어려울 것 같아서. 벙긋거리던 입술에 담긴 말은 차마 형체를 갖추지 못하고 스러졌다.

    ‘크리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제라니아에게 크리스토퍼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뭔가 말을 하려던 것 같았는데, 그게 뭐였을까.”

    “뭐?”

    “쿠키 먹을래?”

    제대로 듣지 못했는지 뭐냐고 반문하는 리암의 입에 쿠키를 물려주며 웃는 제라니아의 얼굴 위로 심란함이 스치고 지나갔다.

    * * *

    그렇게 한참을 더 떠들던 중, 프란츠가 돌아왔다는 몰리의 전언에 리암은 화급히 일하던 장소로 복귀했다. 제라니아 역시도 그를 맞이하러 갔다.

    그도 그럴 게, 여행에서 돌아온 뒤로 그가 이런 대낮에 궁으로 돌아오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궁 앞으로 나가자 제롬을 포함해, 기사들을 등 뒤에 세운 채로 프란츠가 서 있었다. 밖으로 나오는 제라니아를 발견한 프란츠가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갔다.

    제 얼굴을 꼼꼼히 살피는 프란츠의 시선에 제라니아는 어리둥절했다. 프란츠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소동이 있었다고 하던데, 괜찮습니까.”

    “설마 그걸 듣고 일찍 돌아오신 건가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라니아는 별일 없었다는 대답과 함께 그와 안으로 들어갔다. 두 시간 뒤쯤에 일정이 있어 다시 나가봐야 한다 말하는 프란츠에게 제라니아가 말했다.

    “어디까지 들으신 건가요?”

    “윌터 경이 당신에게 시비를 걸었고, 그걸 본 크리스토퍼 경이 윌터 경에게 결투를 신청했다는 것 정도. 결과는 들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객관적인 사실을 읊는 것처럼 무미건조했다. 별다른 질문 없이 넘어가는 프란츠에게 제라니아는 신기하다는 듯 질문했다.

    “더 묻지 않으세요?”

    “제가 알아야 하는 일이라면 당신이 이미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프란츠의 얼굴을 제라니아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슨 일입니까?”

    “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이는데.”

    눈치가 빠른 건 여전했다. 그와 눈을 맞추며 제라니아는 세 번째로 망설였다. 말해도 괜찮을까.

    프란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가 입을 열기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그의 시선에 제라니아는 차근히 입을 열었다.

    “기사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의외의 질문에 프란츠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가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됩니까.”

    “네.”

    “겉멋 든 인간들의 낭만화라 생각합니다.”

    어떠한 색도 없는 목소리에 차가운 한기가 스며들었다. 냉랭하다고 해도 될 만한 그의 대답에 제라니아는 조용히 반문했다.

    “어째서요?”

    “검은 누구도 살릴 수 없으니까요. 죽이는 것밖에 할 수 없죠. 살기 위해 잡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나는 검이 싫습니다.”

    그의 음성은 흔들림 없이 단호했다. 제라니아는 조금 놀랐다. 그도 그럴 게 제라니아는 이제껏 프란츠가 무언가를 싫다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말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호불호가 지극히 적다고 생각한 남자의 입에서 이런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물론, 밖에서 할 만한 소리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덧붙이는 말과 달리 프란츠는 딱히 거리낄 게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라니아는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전해 들으신 대로, 오늘 윌터 경과 시비가 붙었거든요. 전에 만났을 때도 묘하게… 절 신경 쓰는 것 같았고.”

    “전이라면.”

    “4년 전 사냥대회에서 만났어요. 그때 이후에 만나는 건 처음이에요.”

    당시에 자신은 셀리나와 함께 크리스를 구경하러 갔었다. 혼자 가기는 불안하다며 제 손을 붙잡는 셀리나를 따라 사냥대회에 참석했다.

    크리스는 그날따라 의욕이 넘쳐 보였고, 셀리나와 함께 그를 배웅하고 난 직후 윌터를 만났다. 셀리나의 팔을 붙잡고 수작을 거는 그를 저지하면서 문제가 생겼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크리스의 일행이기 때문에 말을 걸었던 건지도 몰랐다. 기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꽤 전부터 크리스와의 승부에 집착한 것 같았으니까.

    “사실,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치맛단을 꼭 그러잡은 제라니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 스스로 그 남자를 해결할 방도가 정말 없었을까.”

    “…….”

    “이건 어디까지나 나와 그 사람 사이의 문제인데, 남의 손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게 과연 옳았을까.”

    크리스가 나타난 뒤, 시녀들의 얼굴에는 안도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드디어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 생각이 적혀 있는 듯한 표정들. 당연한 일인데도,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제가 이상한 건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 마음이 놓이기보단 심란해지고 마는 건.

    제라니아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가 그자에게 얕보였다는 걸 알아요. 아마 크리스가 오지 않았다면 한참을 더 실랑이를 해야 했겠죠. 대화로 해결되기 힘든 상대라는 것도 알고요. 알지만, 그래도.”

    전하의 여인. 자신의 입으로 말할 때는 아무렇지 않았던 말이 그토록 거슬리는 건 그 의미가 명백하기 때문에. 아주 오래전 떠올렸던 고민이 다시금 제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구깃구깃해진 치맛단을 놓으며 제라니아는 프란츠를 쳐다보았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제라니아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그 시선에 역설적으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남아 있던 작은 불편함을 털어내려는 듯 그는 살며시 고개를 흔들었다.

    “누군가가 나서줘야 한다고 생각될 만큼 내가 나약해 보이는 걸까. 그런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요.”

    “…….”

    “크리스는 저를 위해서 나서준 건데, 정말 고마운데…. 그것만이 아니라는 게 어려워요. 이런 감정을 느끼는 제가 문제인 걸까요.”

    말없이 이야기를 듣던 프란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의 입장이 되어본 적이 없으니, 무어라 말한들 온전한 정답은 아닐 겁니다.”

    사람을 살피는 건 그 역시도 숨 쉬듯이 하는 일이었지만, 언제나 변수란 존재했다. 감안하고 들으라는 프란츠의 말에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긴 합니다.”

    아리송한 얼굴을 한 제라니아에게 프란츠는 덤덤히 말했다.

    “질문을 해볼까요. 당신과 내가 길을 걸어갈 때 살수가 나타났습니다. 내 뒤에는 제롬 경이 있습니다. 이 경우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 제롬 경한테 맡기고 뒤로 물러나겠죠?”

    “왜 그렇습니까?”

    “위험하기도 하고…. 이런 일은 제롬 경이 전문이니까요.”

    “맞습니다.”

    프란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직접 움직이는 것보다 사람을 쓰는 게 더 익숙했다. 어릴 때는 의지할 이가 없어 홀로 지냈다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런 방식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권력을 쥐려면 사람을 부릴 줄 알아야 했다. 제게 필요한 사람과 배신하지 않을 자를 걸러내 제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건 그래서였다.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으나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 말대로입니다. 모든 걸 혼자 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가령 내가 아무리 유능해도 왕세자와 왕세자비로 몸을 나누어서 궁의 안팎에서 동시에 활약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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