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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37화 (38/171)
  • 제37화. 결투

    제라니아는 고민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눈앞의 남자는 말로 해서 들어먹는 상대가 아니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권위로 찍어 눌러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런다고 다음에는 이렇게 나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나.

    그가 왕실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는 이상 다음에 또 마주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피하는 것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순 없다.

    더없이 잔잔한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여자를 윌터는 재미있다는 듯이 응시했다.

    조금만 겁줘도 금방 눈물을 터트릴 것같이 생긴 주제에, 꼬박꼬박 눈을 맞대고 대꾸하는 꼴이 재미있었다. 한입거리도 안 되는 주제에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는 것이 딱 그 바이첸의 영감과 똑같았다.

    사실 눈물을 보였다면 흥미는 곧장 식었겠지만, 반항적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저런 눈빛이 순종적으로 변하는 게, 그렇게 유쾌할 수가 없거든.

    제게는 그렇게도 목이 뻣뻣하던 여자가 목숨 부지에 급급한 왕세자를 선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참 끼리끼리 만난다 싶다가도 궁금해졌다.

    여전히 그때와 같은 눈을 하고 있을까, 같은.

    “그러고 보니, 훈련 시간 아닌가요.”

    제라니아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재빨리 덧붙였다.

    “제게 말을 걸기 전에, 기사의 본분부터 다하시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엇인지 잘 모르시는 것 같긴 하지만요.”

    주군은 보호를, 기사는 충성을.

    왕족에게 이 이상 무례하게 굴지 말라는 경고와 더불어 실력이나 쌓으라는 중의적인 대답에 윌터는 낮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다시금 제라니아에게 손을 뻗었다. 제라니아는 그 손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노려보았다.

    제라니아의 코앞에서 손이 우뚝 멈췄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뇌까리는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어느새 나타난 크리스토퍼가 서늘한 눈동자로 윌터의 팔을 꽉 붙들고 있었다.

    훈련을 막 마치고 뛰어온 건지 숨이 꽤 거칠었다. 온기 한 점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 윌터를 돌아보며 잇새로 짜증을 내뱉었다.

    “갑자기 어디로 갔나 했더니, 여기 계실 줄 몰랐군요.”

    “비전하와 옛이야기를 좀 나누고 있었습니다.”

    “나눌 만한 이야기라니, 그런 게 있었던가요.”

    무심하게 대꾸하는 크리스토퍼의 표정이 서릿발처럼 냉랭했다. 윌터는 그의 손에서 팔을 빼내며 당당하게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명색이 혼담이 오갔던 사이기도 하니까 말이죠.”

    추문이라도 붙이려는 건지 목소리가 꽤 컸다. 주변을 지나가던 몇몇 이들이 잰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을 제라니아는 조용히 곁눈질했다.

    성가신 무언가를 보듯 윌터를 쳐다보던 크리스토퍼가 입을 열었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비전하의 의견은 경과는 다른 것 같은데요.”

    모욕을 당한 것처럼 윌터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뒤에 서 있던 시녀들이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참아냈다. 크리스토퍼와 윌터를 번갈아 쳐다보는 제라니아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더 곤란해 보였다.

    “훈련이나 하러 돌아가죠. 아무리 경의 차례가 아니라 하나, 다른 기사들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역시 대련 중이었던 모양이었다. 기사들이 서 있는 쪽으로 고갯짓을 하는 크리스토퍼에게 윌터는 기꺼이 표정을 수습하고 말했다.

    “그러는 경이야말로 웬일입니까? 평소에는 나 따위는 상대도 하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이렇게 제 앞에서 말을 많이 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아무런 말이 없는 크리스토퍼 대신 제라니아는 입을 열었다.

    “윌터 경. 이대로 돌아가기 전에, 나와 끝낼 이야기가 있을 텐데요.”

    “이야기?”

    “예전에도 분명 말했습니다. 남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지 말라고.”

    “아아, 전하의 여인이신 분께 제가 더없이 실례를 저질렀군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용서를 빌어도 되겠습니까.”

    존댓말인데 이토록 빈정거리는 느낌이 드는 것도 재주였다. 크리스토퍼의 입매가 실룩거렸다. 그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려 했다.

    “대체 그 무슨 무례한….”

    “그만둬요, 크리스토퍼 경.”

    낮지만 차분한 목소리가 크리스토퍼의 귓가를 붙잡았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대할 필요 없다. 그런 생각을 담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제라니아의 눈동자에 크리스토퍼는 멈칫했다. 그런 둘 사이를 윌터의 말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비전하와 크리스토퍼 경은 어릴 때부터 친하던 사이라 들었습니다만.”

    윌터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는 뭔가를 알아챈 것처럼 씩 웃고 있었다. 묘한 불길함에 제라니아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건.”

    “제가 실수를 했군요. 진짜 소문이 날 만한 상대는 따로 있었… 어이쿠.”

    윌터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크리스토퍼가 무언가를 그의 얼굴에 던졌다. 그게 장갑이라는 걸 알아본 순간 윌터의 입꼬리가 쓱 말려 올라갔고, 제라니아는 비명처럼 외쳤다.

    “크리스토퍼!”

    “이거 재미있군요.”

    “받아들일 겁니까.”

    머리끝까지 화가 났음에도 크리스토퍼의 눈빛은 평온했다. 마치 겨울철에 꽁꽁 얼어붙은 호수를 보는 듯했다. 그 괴리감이 오싹하면서도 짜릿했다. 윌터의 등골에 전율이 내달렸다.

    곰곰이 생각하는 시늉을 하던 크리스토퍼가 느릿하게 말했다.

    “그냥 하기는 시시하니 조건을 걸까요.”

    “조건?”

    “이긴 사람의 소원을 무엇이든 하나 들어주는 걸로.”

    무료하게 중얼거리는 크리스토퍼의 손이 검자루를 움켜잡았다. 윌터를 주시하며 입꼬리를 멋들어지게 올리는 그의 시선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왜, 질까 봐 두렵습니까?”

    차분하지만 비아냥거리는 태도가 윌터의 신경을 긁었다. 윌터는 하하 웃으며 검을 빼 들었다.

    “그럴 리가요.”

    * * *

    “저 둘이 결투를 한다고?”

    “세상에, 크리스토퍼 경이 드디어 승부를 받아들이신 거야?”

    “그나저나 크리스토퍼 경이랑 같이 오신 분, 비전하 아니야? 저분이 여길 왜…?”

    “야, 조용히 해! 시작한다!”

    왁자지껄 떠드는 기사들이 시녀들을 대동하고 서 있는 제라니아를 살폈다. 제 뺨을 콕콕 찌르는 시선들에도 제라니아는 말없이 연무장과 거기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분위기에 뒤돌아서 그냥 갈 수도 없었는지라, 얼떨결에 연무장까지 따라오고 말았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대신, 방금 전 훈련을 마친 기사들에게서 번지는 열기가 연무장을 가득 휘감았다.

    공기 중으로 번지는 땀 냄새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열기, 고막을 흔드는 우렁찬 목소리들. 역동적이고 선명한 풍경 가운데서 괴이할 정도로 정적인 여인의 모습은 오히려 그렇기에 더 시선을 끌었다.

    “먼저 검을 놓치거나, 더 이상 싸움이 불가능해졌다 생각되면 끝나는 겁니다.”

    둘의 손에는 기사단에서 기본으로 지급하는 장검이 들려 있었다. 침착한 목소리로 선언하는 크리스토퍼에게 윌터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가볍게 악수를 한 두 사람의 뒤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기사단 내에서도 파벌이 갈리는지, 기사들이 양 갈래로 나뉘어 서 있었다. 기사들의 면면을 제라니아는 하나하나 조용히 살폈다.

    시합이 시작되었다.

    둘은 검을 치켜들고 고요히 대치했다. 천천히 서로를 바라보며 원을 한 바퀴 돌던 중, 윌터가 한 발짝 나서더니 그의 머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크리스토퍼는 침착하게 뒤로 물러나며 검을 맞댔다.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강렬했다.

    몇 번 검이 부딪히더니, 윌터의 검이 크리스토퍼의 허리를 향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크리스토퍼가 손목을 꺾어 검을 막아내면서 윌터의 검을 있는 힘껏 밀어냈다.

    빈틈을 놓치지 않고 재차 날아오는 검을 막아내는 크리스토퍼의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히죽거리며 웃던 게 언제냐는 듯 웃음기가 싹 가신 진지한 표정이 윌터의 얼굴 위에 자리했다. 갑옷을 입어 유독 덩치가 커 보이는데도 그의 움직임은 전혀 둔해 보이지 않았다.

    “와, 진짜 상극이다.”

    “윌터 경은 공격 위주라면, 크리스토퍼 경은 진중하게 상대의 틈을 파고드는 분이니까.”

    “그런 것치고 힘으로도 딱히 밀리시진 않는데.”

    “그랬음 진작 승부는 끝났지.”

    팽팽하게 검을 맞대는 둘을 보며 기사들이 한마디씩 주절거렸다. 제라니아는 굳은 얼굴로 결투하는 두 사람을 응시했다.

    십자 모양으로 검을 맞대고 힘겨루기를 하던 중, 크리스토퍼의 검이 부드럽게 그의 검을 흘려보내며 앞으로 파고들었다. 갑작스러운 공격 태세에도 윌터는 당황하지 않았다.

    검으로 챙, 소리가 나게 올려치며 오른쪽으로 몸을 피한 뒤, 곧바로 그의 얼굴을 노렸다. 날카로운 검 끝이 크리스토퍼의 얼굴로 파고들려는 찰나였다.

    “윽!”

    그때를 기다렸다는 양 한 손으로는 검자루를, 다른 손으로는 검날을 잡은 크리스토퍼가 윌터의 검을 막아냈다. 옆으로 검을 쳐내는 동시에 크리스토퍼는 곧장 검자루의 끝을 윌터의 목에 가져다 댔다.

    예기가 어린 눈동자로 그를 쳐다보는 크리스토퍼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승부는 난 것 같은데.”

    “아직이다!”

    윌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래로 내려졌던 검을 움켜잡은 그가 옆으로 검을 휘둘러 크리스토퍼의 허리를 찍어내려 했다. 승부가 끝났다며 방심하고 있던 기사들 사이에서 비명과도 같은 탄성이 내질러졌다.

    “아악!”

    그가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크리스토퍼가 검자루의 방향을 바꿔 그의 손목을 대각선으로 세게 내리찍었다. 혼신의 일격이라 해도 좋을 만큼 강한 충격에 윌터의 손이 검을 놓쳤고, 그 반동으로 검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팽글팽글 공중을 돌아 날아간 검이 바닥에 챙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갑옷을 입은 육중한 몸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고하게 서서 윌터의 목에 검을 들이대는 크리스토퍼의 푸른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끝났군요.”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주변에 와아아! 함성이 우렁차게 터졌다. 윌터의 뒤에 서 있던 기사들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한 한편, 크리스토퍼를 지지하던 기사들은 즐거운 기색으로 고함을 질렀다.

    시끌벅적한 가운데 크리스토퍼는 검을 검집에 갈무리한 뒤, 무릎을 굽히고 그의 앞에 앉았다.

    소리의 장막 속에서 분한 듯 그를 노려보는 윌터에게 크리스토퍼는 그만이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만족했습니까. 그토록 원하던 승부의 결과는.”

    기사에게 명예란 곧 생명과도 같았다. 사람들 앞에서 처참하게 깨진 만큼 윌터의 기분이 바닥을 치고 있으리라는 건 자명했다. 그걸 알면서도 굳이 그에게 말을 건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소원. 이 빌어먹을 결투의 상품으로 내걸었던 것.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한 기사의 얼굴 위로 옅은 조소가 떠올랐다. 이를 으득 가는 윌터의 모습이 무감한 눈동자에 가득 비쳤다. 크리스토퍼는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말했다.

    “두 번 다시 제라니아에게 접근하지 마.”

    역겨운 무언가를 바라보듯 윌터를 쳐다보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간 크리스토퍼가 말없이 서 있는 제라니아의 앞에 섰다. 흥분한 기사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한쪽 무릎을 굽힌 그가 제 승리를 바친다는 의미로 제라니아의 손을 조심스레 잡고 손등에 입맞춤을 남겼다. 제라니아를 올려다보는 크리스토퍼의 입술이 천천히 말을 그려냈다.

    “배웅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비전하.”

    그는 할 말이 있어 보였다. 부풀어 오른 주변의 기대 속에서 제라니아는 조용히 대답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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