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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34화 (35/171)
  • 제34화. 다른 듯 닮은 둘

    지나가던 중 홀린 듯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궁인들과 달리, 오소소 돋는 소름을 무시하지 못하고 아이작은 팔을 벅벅 긁는 시늉을 했다.

    프란츠의 뒤를 묵묵히 따라가는 제롬의 발걸음 소리가 묵직하게 복도를 울렸다.

    “비전하한테 말씀은 하셨습니까.”

    프란츠는 고개를 내저었다.

    “걱정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내게는 일상이나 다름없는 일이라지만, 아무래도 비한테는 충격이긴 하겠죠.”

    걱정은 여행을 갔을 때 시켰던 것으로 족했다. 직접적으로 묻는다면 말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 전까지는 일단 지금의 상황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벨루인 장관이랑 또 한바탕 하겠군요.”

    이번 여름에는 비가 상당히 적게 내린 탓에 수확된 곡물의 양이 예년보다 적었다. 문제를 대응하기 위해 관개 시설을 보충하자는 결론으로 마무리했으니, 이제 재정부와 예산안을 협상할 일만 남았다.

    “그러면서 신나할 인간이지 않습니까.”

    허리가 꼿꼿하기로 유명한 젊은 재정장관의 얼굴을 떠올리며 아이작은 헛웃음을 흘렸다. 제가 천거한 상대기는 하지만 여러모로 천직이었다.

    외압에 절대 굴하지 않으며 뇌물은 모두 문밖으로 집어 던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왕족 앞에서도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거절을 표하는 재정부의 우두머리.

    그의 허가가 떨어지지 않는 한, 누구도 국고에서 돈을 빼낼 수는 없었다. 그는 장관에 취임한 다음 그간 통과되었던 예산안을 받아 보자마자 침묵했다.

    무어라 말하는 대신, 벨루인은 곧장 재정부의 구조를 싹 개편하고 인재를 등용했다. 기존의 멤버 중 유일하게 재정부에서 살아남은 건 이렌스 빈즈뿐이었다.

    “왕족들에게 편달하는 예산도 매해 줄여나가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간이 너무 많았던 겁니다.”

    불필요한 지출이 참 많더군요. 웃는 얼굴로 돌려 까는 프란츠의 대답에 동의하지도 반박하지도 못하고 아이작은 애매하게 웃었다.

    재정부가 자리하고 있을 건물의 복도로 들어서자 제복을 갖춰 입은 이들이 하나둘씩 눈에 띄었다.

    복도를 걸어가던 중 아이작이 불쑥 입을 열었다.

    “억울하지는 않으십니까.”

    “무엇이요.”

    “왕국이 이만큼 안정될 때까지 전하께서 노력하신 것들이 있는데, 국민들은 태평성대라며 국왕 폐하를 칭송하니까요.”

    아이작은 지금보다 앳된 얼굴이었던 프란츠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직 성인이 되지도 않았을 당시부터 그는 평범한 소년과는 거리가 멀었다. 3왕자는 늘 침착했고, 차분했으며 어떤 불합리한 요구도 덤덤한 얼굴로 수행했다. 그랬기 때문에 국왕이 그를 자식들 중 가장 중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왕세자가 되기 전까지 얼마나 힘든 길을 걸어왔는지 아이작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알려주지도 않는데 어떻게 알겠습니까. 원래 정치란 그런 것을요. 국왕 폐하의 과시욕을 맞춰 드리자면 내가 너무 튀어도 곤란합니다. 이 정도가 딱 적당하죠.”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하는 프란츠의 얼굴엔 어떠한 미련도 떠올라 있지 않아, 아이작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왕위에 집착하는 것치고 눈앞의 상대는 한결같이 권력에는 냉정했다. 과시욕도 없었거니와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기이하다면 기이했다. 권력욕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가.

    왕족으로서의 의무감일까. 아니면….

    “누구든 부당하다 생각하면 분노하지 않습니까. 데릭 전하처럼 말입니다.”

    아이작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왕족들 중에서도 데릭과 프란츠는 유달리 사이가 나빴다. 정확히는 데릭이 프란츠한테 일방적으로 짜증을 부리는 것에 가까웠다.

    열등감 때문일 것이다. 자식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지만, 후궁의 소생이기 때문에 정통성이 다소 부족한 것이 그의 가장 큰 흠이었다.

    권력의 유무를 떠나 계승 서열로 따지면 프란츠가 가장 1순위기는 했으나, 데릭에게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주어져야만 했던 것을 프란츠가 가져갔다는 점이 중요했다.

    “글쎄요. 그렇게 따지면, 세상에 부당하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일이 화내고 있어봐야 끝이 없지요.”

    실제로 데릭이 시비를 걸어도 프란츠는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웃는 얼굴로 조목조목 받아치는 모습에 데릭이 잔뜩 약이 올라 있다는 이야기를 건너 들었다.

    왕궁 내에서 데릭을 제외하면 프란츠는 누구하고도 원만하게 지내는 편이었다.

    새어머니인 아이렌 왕비와는 미묘한 사이를 유지했지만, 정작 소생인 이안 왕자는 어린 시절부터 프란츠를 잘 따랐다. 형님, 하고 부르면서 따라붙는 이복동생의 태도를 이해하지는 못하면서도, 프란츠는 가끔씩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이런 얘기 하기 되게, 좀 그렇습니다만. 비전하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말을 꺼내면서도 나뭇잎을 씹는 것처럼 떫은 안색을 한 아이작을 보며 프란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비랑 내가 말입니까.”

    아이작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둘의 성격은 극과 극이었지만 사람을 대하는 태도 자체는 꽤 비슷한 면이 있었다. 눈앞의 상대가 훨씬 인간미가 없긴 했지만, 파격적으로 구는 건 제라니아도 만만치 않았다.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정말 이런 한 쌍이 또 있을까. 더 있으면 그것대로 골머리가 아플 것 같았다.

    그래서 눈이 맞았나.

    “오랜만에 일이 일찍 끝났으니, 비한테 같이 산책이나 가자고 제안해도 좋겠군요. 일정이 더 없다면 말입니다.”

    무표정하던 얼굴 위로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왕세자를 보니 아이작은 옆구리가 시렸다.

    티엘라, 보고 싶어. 여보.

    주책바가지라는 소리나 들을 생각을 속으로 주절거리며 아이작은 재정부의 문을 벌컥 열었다.

    “어이, 나 왔네.”

    열 몇 쌍의 눈들이 일제히 두 사람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방의 맨 끝, 중앙에 위치한 책상에 앉아 있던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적발의 미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깔끔하게 제복을 차려입고 머리를 뒤로 넘긴 이가 웃는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재상께서도 오셨습니까.”

    깍듯이 인사를 건네는 장관을 제외한 나머지는 조용히 하던 일에 몰두했다. 프란츠가 가볍게 방 안을 훑었지만, 이렌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외출이라도 한 건가.

    아이작의 뒤로 따라 들어온 시종들의 품에 안겨 있는 서류뭉치들을 본 벨루인이 눈을 빛냈다.

    “일거리를 들고 온 모양이군요.”

    “그래, 자네들이 또 부지런히 예산안을 짜줘야 할 것 같네.”

    “그래도 요즘은 일이 째깍째깍 와서 마음이 편합니다.”

    엄청나게 한가하거나, 엄청나게 바빠서 야근을 해야 하는 극단적인 일상보단 지금이 낫다며 그는 넉살 좋게 웃었다. 돈보다 정시퇴근을 좋아하는 부하들을 데리고 일하려니 고생이라며 너스레를 떠는 장관에게 앉아 있던 일꾼들이 작게 야유를 보냈다.

    장관과 가볍게 몇 마디를 주고받던 중, 달칵거리는 소리를 듣고 프란츠는 힐끔 시선을 돌렸다. 재정부 안쪽에 자리하고 있던 나무문을 열고 누군가가 밖으로 나왔다.

    익숙한 얼굴에 프란츠는 꽤 놀랐다.

    “제라니아.”

    “전하?”

    제라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뒤에서 두툼한 서류철을 들고 있던 이렌스는 프란츠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서류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았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밖으로 나온 제라니아가 세 사람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그 뒤를 이렌스가 말없이 따랐다. 아이작 역시 갑자기 튀어나온 딸을 발견하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으나, 다른 이들이 보기 전에 근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버님까지…. 회의가 빨리 끝나셨나 봐요.”

    “예, 그렇습니다. 비전하.”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

    “이렌스가 재정부를 구경시켜 준다고 해서요. 전하께서는 어쩐 일로 오셨나요?”

    정말이냐는 듯이 프란츠가 그 뒤에 선 이렌스에게 눈짓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렌스의 표정이 정말로 태연자약했다. 수상하긴 했지만 프란츠는 일단 내버려 두기로 했다.

    자료실로 보이는 곳에서 나온 걸 보니 필요한 정보라도 있는 건가.

    …신경이 쓰이기는 하지만 무시할 수 있었다.

    “저는 장관한테 의견을 구하고 싶은 게 있어 왔습니다. 일정은 다 끝난 겁니까?”

    “저녁에 다과회 하나가 남긴 했어요. 요즘 차를 원 없이 마시는 것 같아요.”

    제라니아는 엷게 웃어 보였다. 평상시와 같은 미소에는 별다른 그늘이 없었다. 생각보다도 더 궁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왕비가 초대장을 보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걱정스럽게 이야기를 전하던 몰리와 달리 프란츠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왕비는 기싸움을 할지언정 독 같은 걸 사용해 상대를 괴롭히는 비열한 인간은 아니었다. 궁에서 온갖 일을 겪고도 양심을 아주 놓지는 못하는 점이 특이하다 할 만했다.

    ‘역시 왕비 마마셨군요.’

    ‘너….’

    ‘저랑 거래해요. 어제 낮의 일은 묻어드릴 테니, 제게 이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말아주세요.’

    ‘뭐?’

    ‘왕비 마마께도 그게 낫지 않을까요. 왕비 마마가 아니더라도 제 목숨을 탐내는 사람은 이미 너무 많거든요. 아마 제가 죽으면 분명 이안이 표적이 될 텐데요.’

    ‘…….’

    ‘이안의 평온한 생활을 위해서라도, 왕비 마마라도 절 내버려 두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전 아직 죽을 생각이 없거든요. 방패로는 꽤 쓸 만하죠.’

    ‘…말하지 않겠다는 말을, 내가 어떻게 믿지?’

    ‘약속은 지켜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신이 그걸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그 말을 감춘 채 어리던 자신은 조용히 웃어 보였다. 나름대로 신뢰를 주려고 한 일이 아무래도 역효과가 났는지 왕비는 그 후로 자신을 더욱 피하긴 했지만, 어쩌겠나.

    물론 왕비가 위협적이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직접적인 위협이 아니더라도 사람의 피를 말릴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여유로워 보이는 제라니아의 태도를 보니 헛수고로 끝난 것 같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거쳐야 할 일. 미래에는 왕궁 내부를 다스리는 자리에 앉아야 하는 만큼 이 정도 위협에 굴해서는 곤란했다. 제가 나선다면 일은 조금 더 쉬울 수 있으나 존경을 얻긴 어렵겠지. 제라니아도 그걸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먼저 말을 꺼냈을 테니.

    “그래서, 구경은 다 했습니까?”

    짐짓 아무렇지 않게 묻는 프란츠에게 제라니아는 멋쩍은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일단은요.”

    “…같이 산책을 하고 싶은데, 한 30분 정도만 시간을 내줄 수 있겠습니까.”

    “그 정도야 얼마든지요. 그것보다는, 쉬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제라니아가 손을 뻗어 프란츠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피로가 켜켜이 쌓여 살짝 어두워진 눈 아래 때문인지 평소의 화려함이 다소 죽어 있었다. 프란츠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제 조금은 쉴 수 있을 겁니다.”

    ‘아마도’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조심히 손을 거두는 제라니아의 눈빛에 불만이 어려 있었다.

    “며칠 전에 뵈었을 때도 비슷한 소리를 하셨잖아요. 그 후에도 제가 잠든 뒤에야 궁에 들어오셨으면서.”

    “내가 그랬던가요.”

    능청맞게 대답하는 프란츠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지그시 살피던 제라니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둘을 보며 고집 센 것까지 똑같다는 생각을 하는 아이작은 덤이었다.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는 딸의 시선을 그는 애써 외면했다.

    “아까 장관께 볼일이 있으시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될까요?”

    “예, 10분이면 될 것 같습니다.”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벨루인에게 프란츠는 가자는 듯 고갯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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