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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33화 (34/171)

제33화. 평행선

웃음을 터트린 상대는 다름 아닌 왕비였다. 입가를 가리고 웃는 여인의 얼굴이 제철을 맞은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다.

미인은 역시 웃는 게 제일 예쁘구나. 태평하게 그런 생각이나 하며 멀뚱히 그를 바라보는 제라니아에게 아이렌은 말했다.

“궁에 재미있는 이가 들어왔군요.”

까만색에 가까운 푸른 눈동자가 제라니아를 향했다. 아이렌의 말투에 스며들어 있는 웃음기가 저 말의 해석을 애매하게 했다. 칭찬이든 조롱이든 상관은 없었으나, 되도록 긍정적인 방향이길 바랐다.

“부족한 말솜씨로 왕비 마마를 즐겁게 해드렸다니, 저로서도 무척 기쁩니다.”

공손하게 대답하는 제라니아를 아이렌은 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왕비가 웃은 덕분일까,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는 방금 전보다 한결 풀려 있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아이렌은 선선히 말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에 마땅한 보답을 해야겠죠. 원하는 바가 있나요?”

“왕비 마마의 미소를 보았으니 그것보다 큰 기쁨은 없습니다. 다만, 다음번에는 마마의 시간을 저 혼자 온전히 독점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런 식으로 여럿을 불러다 사람을 압박하려 들지 마셨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를 담아 냉큼 대답하는 제라니아의 눈빛이 무척 단호했다. 아이렌이 그 생각을 읽지 못할 리가 없었다.

“사람이 많은 편이 단란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좋겠다 싶었는데, 내가 생각이 짧았군요.”

알겠다는 승낙이 떨어지자 제라니아는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애써 셀리나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두지 않으며 제라니아는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부드럽게 씹히는 빵과 달콤한 크림조차 지금 느끼는 심란함을 아주 지우지는 못했다.

너는 이런 생활을 3년간 견뎌온 건가.

소꿉친구인 만큼, 제라니아는 셀리나의 성격을 잘 알았다. 셀리나는 심지가 곧고 다정하며 인내심이 깊었다.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단 묵묵히 감내하는 편이었다.

성격상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제가 아는 척을 해봐야 셀리나에게 좋을 건 없을 게 분명하니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였다.

정적이 흐르는 분위기 속에서 아이렌은 입을 열었다.

“그대는 정말 독특하군요. 역시 그 아이가 선택한 사람이다 싶어요.”

그 아이, 라. 프란츠를 지칭하는 왕비의 말에 제라니아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쓸쓸해 보이는 아이렌의 눈을 들여다보던 제라니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

“말하도록 하세요.”

“방금 전에 말씀드린 이야기에서, 제가 마지막에 했던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보아도 괜찮을까요.”

저희가 꼭 이렇게 반목해야만 할까요.

아이렌 왕비가 프란츠의 정적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왕궁에서 넉 달을 지낸 만큼, 이런 말을 하는 게 얼마나 순진한 소리로 들릴지도 알았다 자신은 어쨌거나 프란츠의 사람이고, 여차하면 그의 편을 들 것이다. 이 사람과의 대치는 필연적이었다.

그렇지만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싸우는 것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 해야 하는 걸까.

“꽃에게는 자아가 없죠. 결과는 정원사의 손에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성실한 이라면 제가 관리하는 꽃밭에 잡초로 판단되는 식물을 남겨둘 리가 없겠죠.”

우리가 반목하지 않으려 한들, 당신의 부군이 그 생각에 동의할지는 의문이에요.

왕비의 대답은 단호했고, 제라니아는 설득이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군요.”

안 되는 일을 붙들기보다, 지금은 물러나야 할 때였다.

아이렌의 눈동자가 제 앞에 앉은 여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차분하고 단아한 이. 미모가 두드러지는 타입은 아니나 자꾸만 시선이 간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찍어 누르려고 한 이에게 손을 내밀고자 하는 모습은 순진하다 싶을 정도인데, 눈은 아니었다.

심지가 강하고 다정한 눈동자는 그 어떤 고난에도 꺾이지 않을 것처럼 단단해 보였다. 분명 여려 보이는 얼굴이고,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는데도 결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을 믿게 만들고 싶어지는, 눈앞의 상대는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제 대답은 변할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정치적 문제도 그렇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로, 아이렌은 프란츠를 믿지 않았다.

결혼식 날, 자신을 무기질적인 눈으로 쳐다보던 어린 소년의 얼굴을 16년이 지난 지금도 잊어본 적이 없다.

미소로 무장한다 한들 그 내면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소년에서 청년이라 불러도 될 만큼 나이가 들고, 웃는 얼굴로 깍듯이 존대를 하면서도 그의 시선만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무생물을 보는 것처럼 온기 없는 눈동자. 볼 때마다 몸서리를 치게 될 정도로 끔찍했다.

불안한 미래에 자신을 맡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16년 전에 저런 말을 들었다면, 조금은 망설였을지도 모르지만.

왕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간 보냈던 세월들이 눈처럼 켜켜이 쌓여 아이렌의 얼굴을 메웠다. 매끈한 얼굴 위로 부드러운 미소가 얹혔다.

“차가 식겠네요. 어서 들어요.”

찻잔을 드는 아이렌의 손이 다과회의 재연을 선언했다.

* * *

“이제 슬슬 끝내도 되지 않나.”

“예. 오늘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프란츠의 대답과 더불어 재상 아이작이 기나긴 회의의 종결을 선언하자, 모여 있던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떠올랐다. 어전의 문이 열리고 우르르 빠져나가는 사람들로 문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모두가 나갈 때까지 멀뚱히 서 있던 아이작에게 프란츠가 다가왔다. 비어 있는 옥좌를 뒤로한 채 프란츠는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재상.”

“어이구, 저보다야 전하께서 더 수고하셨지요.”

사이좋게 덕담을 주고받으며 둘은 텅 비어 있는 어전을 나섰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롬과 결재된 종이들을 한 아름 안고 있는 시종들이 그 뒤를 따랐다. 길을 걸어가는 아이작에게 프란츠가 물었다.

“국왕께서 불참하시는 날이 늘어가는 것 같습니다만, 착각입니까?”

“제가 들어가 있으시라 했습니다. 컨디션도 그렇지만 그분은 전쟁이면 몰라도, 정치엔 하등 도움이 안 되니까 말이죠.”

하하 웃는 아이작의 얼굴에 한이 어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전쟁으로 파탄 난 국고를 메우고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이바지한 최대 공신이 아닌가.

전쟁이 끝난 직후로 대략 2년간 파산 직전의 국가를 정비하느라 신하들과 머리를 맞대고 밤낮없이 일했던 그의 일화는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다고들 했다.

“전하께서는 피곤하지도 않으십니까.”

“나야 괜찮습니다. 아직 젊으니까요.”

“노인을 놀리시다니. 늙은이는 어디 서러워서 살겠습니까.”

장난스레 대꾸하던 아이작이 문득 걱정된다는 듯 덧붙였다.

“신혼을 느긋하게 즐기실 여력이 없어 유감입니다.”

명색이 제 사위이고 결혼한 지 이제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새신랑이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궁에는 꼬박꼬박 돌아갔다 나오던 왕세자를 생각하니, 신혼부부 사이에 낀 눈치 없고 무도한 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평소에는 30분은 설득하고 들어가야 하는 이야기가 1분 안에 척척 해결되는 쾌감을 포기하기에 아이작은 충분히 나이가 들었다. 그런 아이작의 속내를 알아챘는지 프란츠는 픽 웃었다.

“내가 지금 그랬다간 재상이 과로사로 단명할 테니 어쩔 수 없지요. 말씀하신 대로, 장인과 사위 사이가 아닙니까.”

프란츠가 능청스럽게 대답하자 아이작이 그를 쳐다보며 과장되게 고개를 숙였다.

“하해와 같은 배려 감사드립니다.”

길을 걸어가던 두 사람은 수많은 궁인들과 마주쳤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이들에게 프란츠는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귀찮을 법한데도 딱히 내색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아이작은 혀를 내둘렀다.

실제로 궁에서 프란츠의 평판은 무척 좋았다. 다른 왕족들의 태도를 생각하면 그럴 법하긴 했지만.

“확실히 전하께서 국왕 대리를 맡아주신 뒤로, 결재가 참 빨라서 좋긴 하군요.”

국왕은 호색한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귀가 얇은 편이었다. 특히 여인들의 치맛바람에 약했다. 반드시 이건 해야 한다고 강력히 진언했는데도 차일피일 미루던 정책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물론 예전에 비하면 그래도 나았다. 6년 전 참다못한 아이작이 사직서를 내미는 극단적인 수를 던진 후로, 국왕은 그래도 아이작의 말에는 못 이기는 척 넘어가는 편이었다.

그래도 쌓여가는 일거리에 비해 결재 속도가 더딘 건 사실이었다. 특히 국왕의 인가가 꼭 필요한 건이 그랬다. 국왕은 신하들이 제 이권다툼을 주장하는 것에 관대하기도 했거니와 듣기 좋은 소리에 유독 약해지는 인물이기도 했다.

다행히도, 프란츠가 국왕의 권한을 대리하며 옥새를 맡은 뒤부터는 쌓여 있던 일들이 착착 줄어들고 있었다. 일찍 정치에 뛰어든 만큼 그는 왕국의 내부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대응 역시 단호했다.

필요하지 않다 싶은 것들은 전부 반려하고 비리라 느껴지면 허투루 넘어가지 않았다. 덕분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도 나오고 있다 하나,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능숙하게 줄타기를 했다. 우유부단한 국왕과 씨름하던 아이작으로서는 박수를 치고 싶은 일이었다.

그 대신 그의 하루는 예전보다 훨씬 바쁘게 돌아갔다. 회의에 참석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결재안 처리는 물론, 궁내에서 벌어진 문제들도 보고받는 데다 외부 시찰도 간간이 다녀온다.

아이작은 그가 요 몇 달간 하루에 세 시간 이상 자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웠다.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나는 괜찮습니다. 비도 문제없이 지내는 것 같고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노파심이 들어서 말입니다.”

“쓸데없는 걱정이군요. 막말로 내가 없다고 비가 눈물로 밤을 지새울 타입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술을 싫어하는 막내딸만큼이나 상상이 가지 않는 가정에 아이작은 허허 웃음만 흘렸다.

이제 막 결혼한 이를 부려먹는 것이 양심에 찔렸는지 답지 않게 눈치를 보는 아이작을 보며 프란츠는 가볍게 대답했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곁에 없는 게 안전합니다.”

그 말뜻을 모를 만큼 아이작은 어리석지 않았다. 쾌활하던 그의 분위기가 대번에 가라앉았다.

“…아직도 덤비는 놈들이 있습니까.”

프란츠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이작은 낮게 혀를 찼다.

“그렇게 청소를 했는데도, 위아래를 모르는 놈들이 이렇게 많다니.”

그의 나이 일곱 살에 왕비가 세상을 떠난 뒤로, 어리기만 하던 왕자에게 얼마나 많은 죽음의 손길이 뻗어왔던가. 아내의 부탁을 받아 자신이 좀 들여다보기는 했다지만, 그걸 다 뿌리치고 멀쩡히 살아 있는 눈앞의 상대도 보통은 아니었다.

“내가 만만해 보이는 거겠지요. 기습하면 죽일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걸 보면.”

프란츠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미소가 피어나니 꽃이 개화한 것처럼 아름다우면서도 묘하게 서늘한 분위기를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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