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32화 (33/171)
  • 제32화. 왕비와의 만남

    이건 좀 흥미로웠다. 제라니아의 앞에 쌓여 있는 책들에 저절로 시선이 돌아갔다. 이렌스는 빠르게 답을 휘갈겼다.

    [무엇을 말입니까?]

    [프란…. 전하께서 그것까지는 말씀 안 하셨나요?]

    [뭔가 계약서를 쓰셨다는 것만 압니다. 그 이상 알 필요도 없고요.]

    대답을 적는 이렌스의 표정이 더없이 심드렁했다. 굳이 알아야 하냐는 그 태도에서 제라니아는 새삼 프란츠와 가신들 사이가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신뢰가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제라니아의 표정에서 그런 생각을 짐작했는지 이렌스가 냉큼 말을 적었다.

    [저희는 전하의 손발이니까요. 손이나 발이 생각하거나 말하는 거 보셨습니까. 그런 거죠.]

    프란츠가 무슨 말을 하든 그들은 듣기만 할 뿐, 지시가 없다면 그를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다. 애초에 프란츠는 그러지 못하는 인간을 옆에 두는 성격도 아닐뿐더러, 배신을 한 놈들은 이미 다 죽고 없었다.

    물론 그걸 떠나서 셋은 각기 다른 의미로 프란츠에게 충성하는 인물들이기는 했다.

    오묘한 무언가를 보는 얼굴로 이렌스의 표정을 살피던 제라니아가 천천히 글자를 적어 내밀었다.

    [수락하시는 건가요?]

    [예.]

    [일단….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대신 저도 방금 전까지 이렌스가 종이에 적었던 걸 남한테 말하지 않겠어요.]

    답변은 빠르고 간단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라니아가 새 종이 두 장을 꺼냈다. 글자를 빠르게 휘갈기는 제라니아의 손이 순식간에 무언가를 완성했다. 그것을 본 이렌스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약식이었지만 분명 저건 계약서였다.

    순식간에 계약서를 만들어 사인을 하라는 듯 건네는 제라니아를 보던 이렌스가 입가를 가리며 웃음을 삼켰다.

    이거 참.

    이런 유쾌한 기분은 간만이었다.

    * * *

    세련된 무늬가 조각된 문을 열자, 넓은 방의 모습이 드러났다.

    왕궁의 중심부답게 방의 내부는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부셨다. 크림색 바탕에 금색 문양들이 화려하게 수놓아진 벽의 중간중간 명화들이 걸려 있었다.

    방의 가운데에 둥그런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위로 새하얀 수정으로 만들어진 샹들리에가 자리했다.

    커다란 아치형의 창문 너머로 들이치는 햇빛이 내부를 한층 화사하게 물들였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이들의 시선이 열린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연 당사자는 차분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제라니아의 인사에 몇몇이 화답했다. 느릿하지만 우아하게 걸어온 제라니아가 자신의 자리로 안배된 것 같은 자리에 앉았다.

    소규모라고 하더니, 이 넓은 방에 모인 사람은 제라니아를 포함해 단 여섯뿐이었다.

    다만 인사가 예사롭지 않았다. 제라니아의 눈동자가 참석한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디제 후작 부인에…. 오르테가 백작 부인, 셀리나에다가 비비안 콕스 부인이라….’

    모두 사교계에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제라니아 역시 왕세자비가 된 뒤 한 번씩은 얼굴을 조우했던 적이 있었다.

    제대로 교류했던 상대가 셀리나밖에 없고, 대다수가 왕비의 사람으로도 유명한 게 문제일 뿐이었다.

    자신을 압박하려고 이렇게 안배를 한 걸까. 그렇다면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긴 했다. 부담스럽다면 부담스러웠으니까.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제법 침착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셀리나에게서 시선을 옮겨, 이 쟁쟁한 인물들의 중앙에 앉아 있는 이의 얼굴을 응시했다. 마침 위치도 딱 맞은편이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왕비 마마.”

    “와줘서 고마워요.”

    새까만 머리칼을 하나로 틀어 올린 미인이 그에 답했다. 이 다과회의 주최자, 아이렌 왕비였다.

    아이렌 리나엔.

    보데로아 후작의 맏딸이자 티레인 보데로아의 누이이기도 했다. 자신과 고작 아홉 살 차이 나는 젊은 왕비의 얼굴은 무척 고아했다.

    처음 결혼식에서 봤을 때도 느꼈지만,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하얀 피부 때문일까. 아름답긴 하지만 미소를 지을 때조차 묘하게 초연한 인상을 주는 여인이었다.

    왕비의 친가인 보데로아 후작가는 여러 의미에서 유명했다. 현 왕비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도 그렇지만, 맏아들에 얽힌 일화가 특히 그랬다.

    티레인 보데로아. 작위를 이어받아야 할 적장자인 아들이 6년 전, 가문을 등지고 정적인 3왕자 프란츠의 밑으로 들어간 일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당시 후작은 크게 노했고 그 후로 티레인을 아예 없는 취급 한다고 들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소개할 때 꼭 성을 붙여 말하는 티레인의 모습은 흡사 후작의 그런 태도를 조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후작이 여전히 아들에게 미련을 못 놓고 있다는 소문이 간간이 들려오긴 했지만, 제라니아가 봤을 때 적어도 티레인은 가문에 별 미련이 없는 것 같았다.

    처음 그를 마주했을 때 어찌나 놀랐던지. 온갖 소문과 연관된 것치고 그에게는 별다른 그늘이 느껴지지 않았다. 쾌활하고 능청맞다는 인상이 강한 남자였다.

    창백한 피부와 냉엄해 보이는 짙은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눈앞의 미인과는 영 매치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제라니아가 자리에 앉자 곧바로 시녀들이 들어와 테이블에 세팅을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몇몇 시선들에 제라니아는 웃음으로 일관했다.

    다과회는 전반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예상과는 달리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주였다.

    굉장히 노련하게 대화를 이끌어가는 왕비의 말솜씨에 제라니아는 상황도 잊고 감탄했다. 말을 많이 해봐야 좋을 게 없으므로 그는 우선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 주목했다.

    “그나저나 전에도 생각했지만, 비전하께서는 수줍음이 많으신 편인가 봅니다.”

    왕비의 바로 오른편에 앉은, 푸른 기가 섞인 금발을 가진 여인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케이크를 자르려던 제라니아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렇게 보이셨나요.”

    비비안 콕스, 예전의 이름은 비비안 보데로아. 왕비의 하나뿐인 여동생은 언니와 달리 티레인과 묘하게 인상이 비슷했다.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비전하께서는 몇 마디 하지 않으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말할 시간을 주긴 했나요.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제라니아는 싱긋 웃으며 포크로 케이크를 잘랐다.

    “딱히 재미난 이야기가 없다 보니 그런 것뿐이랍니다.”

    “다행입니다. 혹시 불편하신 건 아닌가 싶어 염려되었습니다.”

    불편하진 않았다. 은근하게 자신을 소외시키는 주제로만 이야기를 나누어서 그렇지.

    사교계에 오가는 소문이라든가, 그들 사이에서나 알 법한 각종 사적인 이야기들.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교묘할 정도로 깨작깨작 신경을 긁는 느낌을 줄 만큼.

    간간이 제게 의견을 묻기도 했지만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다 말을 끊어냈다. 무엇을 말하든 분명 여길 나가면 은밀하게 소문이 퍼질 터였다. 책잡힐 여지를 줄 필요는 없었다.

    미소를 띠고 있는 네 쌍의 눈동자가 자신을 탐색하듯 쳐다보고 있는 것에 제라니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기를 죽이겠단 심보인 걸까. 참 여러모로 음습하기 짝이 없구나.

    셀리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자신만큼이나 대화에 끼어들 여지를 받지 못했음에도 셀리나는 무척 초연했다.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라는 뜻이겠지.

    솔직한 말로는 이대로 다과회를 끝내도 상관없었으나, 셀리나가 눈에 밟혔다. 곰곰이 생각하던 제라니아가 입을 열었다.

    “저야말로 괜히 신경 쓰이게 해드린 것 같네요. 그런 의미에서, 괜찮으시다면 한 가지 이야기를 해드려도 괜찮을까요?”

    “어머나, 무슨 이야기인가요.”

    기대한다는 투로 말을 흘리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제라니아는 태연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름이 아니라, 며칠 전 산책을 하다가 기이한 꽃밭을 봤어요.”

    “꽃밭이요?”

    “네, 꽃밭.”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여인들에게 고아원의 아이들을 투영하며 제라니아는 말을 계속했다.

    “양옆에 자리한 꽃밭과는 달리 그 꽃밭에는 꽃이 듬성듬성 피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눈이 갔답니다. 처음 보는 꽃이라 지나가던 정원사를 붙잡고 무슨 꽃이냐고 물었죠.”

    낭랑한 목소리에는 이목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동화 구연을 하듯이 튀어나가려는 말투를 제라니아는 조용히 다듬었다.

    “근데 알고 보니, 꽃이 아니라 잡초라지 뭐예요.”

    “잡초요?”

    “네. 바람을 타고 날아온 모양이에요. 원래 심겨진 꽃은 따로 있는데, 그 구근의 영양분을 빨아먹고 저만치 자라난 거죠.”

    듬성듬성 노랗게 피어난 꽃들. 그 모양새를 묘사하는 녹색 눈동자가 총기를 담고 반짝거렸다.

    “사실 초반에 자라났을 때 뽑아줬으면 되는데, 정원사가 의무를 소홀히 했다고 하더라고요.”

    “…….”

    “잡초라고는 하지만, 근처에 다른 식물이 없으면 크게 문제 되는 식물은 아니라고도 하고.”

    이것은 간단한 비유였다. 맥락을 안다면 아이들조차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쉬운 비유.

    “정원사의 말로는, 꽃밭을 방치한 정원사는 해고되었고 곧 새 정원사가 올 거라고 했어요.”

    정원을 관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원사. 아무리 잡초들이 기승을 부려도, 정원사의 손짓 한 번이면 싹둑 잘려 나가게 된다. 잘려 나갈 잡초가 누구이고, 그걸 잘라낼 정원사는 과연 누구일까.

    굳어가는 여인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제라니아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듣자 하니 새 정원사는 성실한 사람이라 하던데, 어떻게 될지 기대되지 않나요.”

    “무슨….”

    더없이 상냥한 투로 제라니아는 쐐기를 박았다.

    “그 꽃들을 뿌리째 뽑아서 다른 식물과 닿지 않는 곳에 옮겨 심어줄지, 한꺼번에 모아 불에 태울지 말이죠.”

    꽃들을 빙 둘러보는 제라니아의 표정은 더없이 온화했다. 악의가 전혀 없는 깨끗한 눈동자는 정말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보였다. 말문이 막힌 여인들 중, 오르테가 부인이 조용히 목소리를 내었다.

    “…그거 참, 신기한 이야기기는 하네요.”

    “그렇죠? 사실 전 조금 안타까워요.”

    “무엇이 안타까우신 건가요.”

    “그 꽃들이 욕심을 부려 다른 꽃들을 말라 죽이지 않았다면, 제대로 피어난 꽃들 사이에 숨어 있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잖아요. 조금 덜 화려하고, 덜 생생하더라도 서로가 공존하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에요.”

    “…….”

    그 말을 꺼내는 제라니아의 얼굴은 정말로 진지했다. 조마조마한 얼굴로 눈치를 보는 셀리나와 달리, 나머지 여인들의 얼굴은 더없이 떨떠름했다. 아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뭐 이런 게 다 있지?

    그때,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섯 쌍의 시선들이 일제히 소리가 난 방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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