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시작되는 역사
논의가 끝난 뒤, 프란츠는 병부에 들를 일이 있다며 제롬과 함께 사라졌다. 티레인은 이제 슬슬 퇴근할 시간이라며 집에 돌아갔고, 이렌스는 왕실 도서관으로 향했다.
복도를 걸어가는 이렌스의 표정은 무미건조했지만, 그 머릿속은 바쁘게 굴러갔다. 그는 오랜만에 큰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냐고 묻는 주군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건 제 실책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영지전은 양날의 검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라를 이만큼 안정시키는 데 얼마나 많은 공이 들어갔던가.
적당한 규모에서 끝난다면 몰라도, 잘못해서 판이 커지기라도 하면 그걸 중재하느라 또 많은 시간과 인력이 들 수도 있었다. 정국을 또다시 혼란스럽게 만들 가능성을 끌어안고 가야만 하는가.
수가 없을까.
왕실을 상징하는 붉은색의 커다란 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조용한 내부가 드러났다. 몇몇의 사람들만이 넓은 공간에서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그는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으니, 법전이라도 다시 살펴볼 생각이었다.
법전들이 모여 있는 책장을 찾고자 모퉁이를 돈 그는 사다리를 이제 막 오르려는 작은 체구의 여인을 발견했다. 재빨리 걸어간 그가 나무 사다리를 붙잡는 것을 도왔다. 놀란 얼굴로 자신을 돌아보는 이에게 이렌스가 묵례했다.
“안녕하십니까, 비전하.”
제라니아였다.
자신을 호칭하는 목소리에 옆을 돌아본 제라니아는 이렌스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안녕하세요, 이렌스. 무슨 일인가요?”
“법전을 좀 찾으러 왔습니다. 비전하께서는 여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저도 찾을 책이 있어서요. 어, 고마워요.”
이렌스의 도움하에 사다리를 올라간 제라니아가 손가락으로 책들을 훑었다.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연감을 찾고 있어요. 아, 찾았다. 각 영지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도 궁금한데, 그건 구하기 어려운 것 같아서요.”
두꺼운 책을 꺼낸 제라니아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그가 내려올 때까지 사다리를 꼭 붙잡고 있던 이렌스가 조용히 답했다.
“필요하시다면 제가 구해드릴 수 있습니다.”
“정말요?”
“제 소속을 잊으셨습니까.”
“아.”
열여덟 살에 재정부에 들어와 9년을 넘게 일한 만큼, 이렌스는 어지간한 자료에 대해서는 해박했다. 제라니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가 곧 심각해졌다.
“멋대로 보여주셔도 되는 건가요?”
“기밀이긴 하나, 왕족의 명인데 그 정도야 얼마든지요. 물론 외압에 굴하는 부서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늘 장관에게서 ‘자네는 외압에 굴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목숨이 여러 개인 거겠지!’라는 소리를 듣는 남자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물론 재정부는 장관을 위시해 하나같이 또라이라는 소리를 듣는 인물들 천지였다. 이는 오랜 전쟁을 겪고 국고를 정치와 분리해야겠다는 위기감을 절실히 느낀 바이첸 공작의 안배이기도 했다.
왕족이라는 말에 제라니아는 영 어색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넉 달쯤 지났으면 슬슬 적응하셔도 될 것을. 이렌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던 제라니아가 이렌스에게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얌전히 서서 그를 기다리는 이렌스에게 제라니아는 작게 속삭였다.
“그, 전하께 혹시 들으셨나요?”
“무얼 말입니까.”
“저희 결혼에 대해서요.”
멋쩍게 웃는 제라니아의 얼굴을 본 이렌스는 곧바로 맥락을 이해했다. 주변을 휙 두리번거리던 그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계약에 대한 것 말입니까.”
제라니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렌스가 조금 빠르게 덧붙였다.
“아는 건 저희 셋뿐입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라니아가 앞장서서 길을 걸어갔고, 이렌스는 얌전히 그 뒤를 따랐다. 저 멀리 보이는 넓은 책상 위에 온갖 책들이 쌓여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 책들 앞에 앉은 제라니아가 연감을 펼쳤다. 이렌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설마, 그걸 다 읽으실 생각입니까.”
족히 열 권은 넘어 보였다. 제라니아는 놀라운 속도로 책장을 넘기며 태연하게 말했다.
“네. 이제야 슬슬 시간이 나서, 본격적으로 매달릴 생각이에요.”
이미 절반은 다 읽었다며 걱정 말라 대답하는 제라니아의 목소리가 자못 쾌활했다.
이런 면도 있으셨던가. 신기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이렌스의 시선을 느꼈는지, 페이지에서 시선을 뗀 제라니아가 멋쩍게 말했다.
“전하께서 결혼을 약조하시면서, 저한테 약속하신 게 있거든요. 그걸 준비하고 있어요.”
밝은 얼굴로 말하며 제라니아는 옆에 둔 종이에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얌전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날카로운 서체가 종이 위를 빠르게 수놓았다. 필사를 직업으로 삼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그러면서도 유려했다.
인쇄술이 발달하고 있는 현재, 신전을 제외하면 필사본은 거의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사각사각, 글자를 적는 소리와 숨소리, 나무에서 나는 특유의 오래된 향. 고요한 가운데 유독 선명한 것들. 잿빛 눈동자가 제라니아의 앞에 놓여 있는 책들의 책등을 가볍게 훑었다.
“법을 좋아하십니까.”
책들 중 법전이 다섯 권은 될 것 같았다. 종류부터가 세금, 교육, 영토 등등, 척 보기에도 민법이 주를 이루었다. 상법 관련이 없는 건 좀 의외였다.
연감을 읽고 있던 제라니아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대꾸했다.
“관심이야 있죠.”
“주로 민생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군요. 어디까지 보셨습니까?”
“음…. 일단, 도서관에 있는 세법 관련 책은 다 읽었어요. 영토는 추가적으로 알아야 하는 관례가 있는 것 같아서 사례들을 먼저 봤고요. 혼자 해보려니 시행착오를 좀 겪게 되네요.”
손으로는 글씨를 적으면서도 제라니아는 성실히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지나가던 사서 중 한 명이 그들이 있는 쪽을 가볍게 살피다 고개를 돌렸다.
“법 말고 다른 분야에는 취미가 있으십니까? 저번에 이야기하실 때 느낀 거지만, 정치에도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았는데요. 혹시 유플리의 《법의 정치》를 읽어 보셨습니까.”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지식이 없다면 읽어내기 제법 난해하기로 유명한 책의 이름을 대자, 제라니아는 곧장 대답했다.
“물론이죠. 이렌스야말로, 혹시 같은 사람이 쓴 《행정의 구조》를 보셨나요?”
“행정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그 책을 접하지 않을 수는 없지요. 나온 게 언제인데, 아직도 이것보다 괜찮은 선례가 들어가 있는 책이 흔하지 않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입니다.”
“왠지 녹턴의 《행정사》도 보셨을 것 같아요. 몇 달 전에 나왔던데 꽤 흥미로운 이론을 내세우더라고요.”
“아, 그 책은 지금 읽고 있습니다. 요즘 워낙 바빠서 구해놓고도 시간이 없어서 말이죠.”
이렌스의 목소리는 무척 가벼웠으나 표정은 진지했다. 무엇을 적는 건지 온갖 숫자를 빼곡히 적은 종이를 옆에 덮어놓고, 제라니아는 새 종이를 집어 들었다.
하얀 백지에 새로이 글자를 적어가는 제라니아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이렌스가 제라니아의 앞에 놓여 있던 빈 종이들 중 하나를 슥 잡아당겼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펜을 꺼내 그 위에 글자를 썼다.
“비전하.”
“네.”
이렌스는 말없이 글자를 적은 종이를 제라니아의 앞으로 내밀었다. 녹색 눈동자가 힐끗 글자를 확인했다. 제라니아만큼 날카로운 필체이긴 했으나 글자를 꺾는 모양이 미묘하게 다른 글씨였다.
내용은 간결했다.
[만약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한다면, 비전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글자를 적던 제라니아의 손이 멈칫했다. 그 상태로 천천히 고개를 든 제라니아가 이렌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묵묵히 그 시선을 받아내는 이렌스에게 제라니아는 더없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그런 걸 묻는 이유가 뭔가요?”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그걸 제게 물으시는 게 의외로워서요.”
“충분히 질문할 법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렌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를 관찰하듯 쳐다보던 제라니아가 펜을 들어 그가 내민 종이에 글자를 썼다.
[가장 쉽게 생각하면…. 영지전이겠죠.]
역시 그런가. 이렌스가 아주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제라니아가 그 밑에 글자를 덧붙였다.
[하지만 선택하고 싶지는 않을 것 같아요.]
이렌스 역시 펜을 들어 그 밑에 대답을 적었다.
[어째서 말입니까.]
[희생이 너무 많이 날 테니까요. 물자든 사람이든. 적당한 선에서 끝난다면 몰라도, 상황이 늘 예상대로 굴러가지는 않으니까.]
차분하게 글자를 적어 내리는 제라니아의 표정이 이렌스만큼이나 진지해졌다. 이렌스의 손가락이 펜을 한 바퀴 돌린 뒤, 답변을 썼다.
[하지만 영지전이 가장 확실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래요. 아무래도 부담도 적고.]
[그걸 선택하지 않으시겠다면… 비전하께서는 어떤 선택을 하실 겁니까?]
제라니아가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렸다. 펜을 콕콕 종이에 찍으며 한참을 고민하던 제라니아가 글을 적었다.
[모르겠어요.]
[예?]
[약간 잡힐락 말락 뭔가 떠오르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한데…. 구체적인 형태는 아직.]
뭉툭한 펜 꼭지로 제 머리를 꾹 누르는 제라니아의 표정이 살짝 구겨져 있었다. 이렌스는 얌전히 대답을 기다렸다. 제라니아가 쥔 펜대가 다시금 현란하게 움직였다.
[이제부터 찾아보면 되겠죠. 전하께서 추진하려고 하시는 일인 것 같은데, 맞나요?]
이제 와서 숨길 게 뭐 있겠나 싶어 이렌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란츠와의 대화에서 가볍게 넘기기는 했지만, 그는 제라니아를 대면했던 당시 오랜만에 말이 잘 통하는 상대를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대화를 할수록 느끼는 거지만, 여러모로 재미있는 분이었다. 제 주군과는 다른 의미로.
[말씀하신 대로 손해가 너무 나서 말입니다. 잘 살고 있는 사람들 인생에 돌 던지는 느낌도 나고.]
분명 같은 글자인데 묘하게 뚱한 느낌이 났다. 그 필체를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던 제라니아가 차근히 대답을 적었다.
[제 힘이 필요하신 거라면 도와드릴 수 있어요.]
이렌스는 거절하려고 펜을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자고로 악당보다 무서운 게 상사라지 않은가. 상사의 아내를 부려먹었다는 걸 들켰다간 아무래도 귀찮아진다. 자신은 아직 쓸 만하니 죽이진 않겠지.
일이 늘어날 뿐.
뭐라 적기도 전에 제라니아가 가볍게 그 밑에 글자를 덧그렸다.
[대신 이렌스도 절 도와주시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