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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30화 (31/171)

제30화. 때를 기다리는 이들

왕국의 북쪽에 자리했던 카르멘 왕국이 함락된 건 16년 전, 동쪽의 프로모가 멸망한 건 고작 6년 전의 일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내수가 파탄 나기 직전이 아니었다면 국왕은 지금쯤 리하르타넨 역시도 정복하겠다고 날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바이첸 공작이 목숨 걸고 진언한 덕에 프로모를 마지막으로 전쟁은 마무리되었다.

유화 정책의 일환으로 켄드릭 왕은 함락시킨 나라의 왕들에게 공작위를 수여하고 그 영토의 통치권을 부여했다. 나름 왕국에 어떻게든 스며들고자 애쓰는 휴스타인과 달리 케라온의 행보는 종잡을 수 없는 편에 속했다.

“하지만, 전하.”

“뭐지.”

“어째서 휴스타인보다 케라온을 더 신경 쓰시는 건진 궁금합니다. 지금 정치판만 보면, 아무리 봐도 그쪽보단 휴스타인이 더 문제 아닙니까? 데릭 왕자와 인연을 만든 것만 봐도, 권력을 잡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걸로 보이는데 말이죠.”

티레인의 질문에 이렌스는 특유의 ‘진짜 뇌가 근육으로 되어 있는 겁니까.’라는 듯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프란츠가 가만히 입을 열어 말했다.

“아론 휴스타인의 속내야 뻔하다. 그는 강한 전사이긴 하나, 허투루 분쟁을 일으킬 만한 자가 아니야. 유화책이 통하지 않는 상대가 아니라는 뜻이지. 그 결혼에 권력을 잡겠단 의도가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아마 그것보다는 왕실과의 결합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높겠지.”

“…….”

“하지만 알란 케라온은 아니지. 그가 항복을 선언한 계기를 잊었나.”

프로모 왕국은 용맹을 중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강인한 그는 불리한 전황 속에서도 저항의 기미를 늦추지 않았다. 수도의 벽을 둘러싸고 긴 대치가 이어지려는 찰나, 켄드릭 왕은 서신을 묶은 화살을 쏘아 보냈다.

계속 대치하다간 죄 없는 병사들만 죽어나갈 뿐이다. 차라리 남자 대 남자로 국왕끼리 나와 승부를 겨루자. 내가 지면 깔끔하게 전쟁에서 물러날 것이고, 그쪽이 지면 대치를 그만두고 항복하라.

며칠의 상의 끝에 프로모의 국왕, 알란 케라온은 그 제안을 수락했다. 전쟁의 동태가 명백하게 이쪽에 불리하기도 했거니와, 그의 제의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둘은 치열하게 싸웠고, 켄드릭의 칼이 알란의 창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승부는 결정되었다. 강한 자가 곧 법이라는 프로모의 정서대로 알란은 켄드릭과 크레이츠에 충성을 맹세했다.

실제로 6년간 내수를 정비하고자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케라온 공작의 동태는 무척 잠잠했다. 다소 성질이 급하고 언사가 거칠기는 하나 유의미한 말썽을 부리지는 않았다.

“지금은 국왕의 치세이기 때문에 발톱을 숨기고 순한 고양이처럼 구는 거다. 하지만 국왕이 물러나면?”

피식 웃으며 프란츠는 거만한 자세로 등을 소파에 기댔다. 푸른색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였다.

“자기 위에 서는 남자가, 자기가 충성할 만큼 강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순간 그를 물어뜯으려고 할 게 분명해.”

약육강식의 논리에 충실한 자. 강한 자에게 굴복해 충성을 바치는 자의 머릿속이야 뻔하지 않겠는가.

“설마, 반역을 우려하시는 겁니까?”

티레인의 목소리가 확 낮아졌다. 프란츠는 고개를 내저었다.

“최악의 상황이라면 그렇겠지. 허나 그게 아니더라도 사사건건 귀찮게 굴 법한 놈들이다. 나중에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 없지.”

그러니 더 세력을 키우도록 내버려 두기는 곤란했고, 공국의 상황이 안정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했다. 공국의 위협으로부터 국경선을 지금보다 더 견제해야 할 테니, 여러모로 제약이 걸릴 테니까.

“무엇보다 케라온은 후계자라는 놈도 공작을 쏙 빼닮은 것 같더군. 특히 그 무력에 대한 욕망이.”

공작은 그래도 정치에 조예가 있다지만, 후계자인 장남 윌터는 프로모 왕국의 가치관을 그대로 투영한 듯한 남자였다.

강한 자와의 승부를 중시하는 그가 현재 가장 몰두하고 있는 상대가, 같은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는 크리스토퍼 휴스타인이라는 사실은 왕궁 내에서도 유명했다. 물론 그는 윌터가 걸어오는 모든 시비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지금 국왕의 치세라면 몰라도, 내가 즉위한 뒤에도 왕궁에 그런 놈들이 설치고 돌아다니는 걸 내버려둘 생각은 없으니까.”

과하게 북적거리는 왕궁과 수없이 많은 권력의 거미줄들, 프란츠는 그것을 전부 싹둑 잘라낼 계획을 짜고 있었다.

정리는 빠를수록 좋았다. 이런 제 움직임을 눈치챈 건지, 암살의 위협도 예전보다 한층 늘어난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다행히도 집요하게 노리는 건 자신 혼자인 것 같았다. 제라니아를 노리는 정황이 있었다면, 세자궁을 지키는 병사를 지금의 두 배로 늘렸을 것이다. 굳이 일을 만들어 침실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도 그래서였다. 제라니아와 함께 있을 때 습격을 받는 건 여러모로 곤란했다.

자신이 제라니아를 총애하는 것을 여실히 내보이는 건 어디까지나 왕궁 내부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외부에서 날아오는 암살은 제라니아가 업고 있는 바이첸 공작가라는 배경이 막아주고 있었다.

바이첸 공작은 일견 온화해 보이지만, 기어오르는 인간을 봐줄 만큼 우유부단하지는 않았다. 그가 사교계에서도 유명한 애처가이며 가족을 아끼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왕권이 강해지고 있다 하나 여전히 영주들의 힘이 강한 시대였다. 자신을 협박하기 위해 제라니아를 인질로 삼겠다는 발상을 하기엔 바이첸이 가진 권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인질극 한번 잘못 벌였다가 집안이 몰살당하고 싶지는 않겠지.

국외의 정세도 그렇거니와, 내수도 어느 정도 안정되고 있는 만큼 슬슬 움직이기 시작해도 될 것 같았다.

이제껏 야금야금 그들이 가진 권력의 기반을 누르고자 수없는 준비를 해왔다. 국왕이란 인간이 시키는 일들을 묵묵히 수행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깔아둔 것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만한 시기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장 문제는 아무래도 현재 귀족들의 세력이 너무 크다는 점이겠죠. 사병도 너무 많고 말입니다. 그러니 시간을 두고 세력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왕권이 강하다 하나, 귀족들의 영향력 역시 요 몇 년 새 만만치 않게 커졌습니다. 내수를 키우고자 부득이하게 그들에게 특혜를 준 게 있으니까요.”

독살에 대해 조사할 것을 명받은 날, 프란츠는 국왕에게서 자신을 대리할 권한 역시 함께 받았다. 하나 그것에도 한계가 있는 만큼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간 리하르타넨에서 벌어지고 있는 내전이 남의 일이 아니게 될 것이 분명했다.

“법을 제정한다 해도 명분이 있어야겠죠. 너무 의도가 노골적이면 반발이 상당할 테니 말입니다.”

무사히 법을 제정한다 할지라도 제대로 실행되게 하려면 그 또한 기구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 여러모로 손이 가는 일이었다.

프란츠가 툭 말을 꺼냈다.

“간단하다면 간단한 방법이 있지.”

이렌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제 주군에게 그는 더없이 차분한 어투로 고했다.

“영지전을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계기만 있으면 터질 만한 곳들이 지금도 꽤 될 텐데.”

바이첸과 케라온의 영지가 맞닿아 있는 경계 쪽만 봐도 그랬다. 바이첸 공작이야 이 정도는 꿰뚫어 볼 테니 말려들진 않을지라도 케라온을 도발해 움직이도록 한다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전쟁이란 그랬다. 싸우다 보면 어느 쪽이든 세력이 약화되는 것은 당연했다. 희생 없는 승리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 계산을 책사인 이렌스가 모를 리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비전하께서 썩 좋아하지는 않으시겠군요.”

프란츠는 잠시 침묵했다.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

“이미 경고는 했어. 여차하면 가문을 적으로 돌려야 할지도 모른다고. 그들이 정도를 지킨다면 문제가 생길 일은 없지.”

“그게 말처럼 쉽겠습니까. 밟으려고 하면 지렁이도 꿈틀하는 게 생리입니다.”

권력 구도를 아예 재편하고자 하는 일이었다. 반발이 튀어나오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프란츠 역시 그걸 알 텐데도 그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변화에 희생이 없을 수는 없다. 고여가는 물을 그냥 썩게 내버려 둬봐야 나중에 더 큰 문제만 불러오겠지.”

“저희가 살얼음판을 걸어가고 있다는 자각은 있으신 겁니까?”

“물론. 모험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전하.”

“더 나은 방법이 있다면 가지고 와라. 지금 시점에서 이보다 최선인 방도가 있나?”

“…….”

대답이 없는 이렌스에게서 시선을 돌린 프란츠가 티레인을 쳐다보았다.

“보고로 올릴 만한 건 다 정리했나.”

“물론입니다.”

기합이 든 목소리로 대답하며 티레인은 정리한 서류를 그에게 내밀었다. 티레인이 몇 달간 열심히 뛰어 모은 정보들로, 고아원에 대한 정보는 물론 신전에 대한 이야기도 상당했다.

그것을 읽어 내리며 프란츠는 몇 개의 종이를 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는 국왕에게 보고할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그가 나른한 어투로 말했다.

“늘 생각하지만, 신을 섬긴다는 놈들이 세속에 너무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들어오는 헌금만도 상당할 것을, 수호부 판매는 또 뭐란 말인가. 마법이 걸려 있어 여러 가지 운을 보장해 준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수호부가 엄청난 양으로 팔려나가고 있는 걸 보며 프란츠는 헛웃음을 뱉었다. 심지어 수호부마다 가격도 크게 차이가 났다.

크레이츠의 종교, 프란의 종교관에는 내세가 없었다. 질서를 주관하는 주신 펠리시에와 인간의 악의가 모여 만들어졌다는 혼돈의 이름 세크렛.

펠리시에보다 세크렛의 힘이 커지면 세상에는 혼란이 온다고들 한다. 때문에 바르게 사는 것이 결과적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고, 그로 인해 병이나 재해의 위험이 줄어들어 결과적으로 본인의 인생을 평안하게 만든다는 것이 프란의 기본 교리였다.

내세가 없기 때문에 더욱 현재에 집착하는 건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악의로 점철되어 있던 제 인생을 떠올리며 프란츠는 참 재미있다는 듯 중얼거렸다.

“왕실에서 분명, 수호부 판매를 그만하라 권고했을 텐데.”

“그래서 이제 대놓고 팔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프란츠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대놓고 팔지 않는 게 이 정도라면 이전에는 어땠을까. 티레인의 옆에 앉아 있던 이렌스가 덧붙였다.

“아, 그러고 보니. 신전에서 또 전하께 사절을 보냈더군요.”

“거절해.”

“당연히 거절했습니다. 참 여러모로 끈질긴 작자들입니다.”

왕세자가 된 이후로 자신에게 힘이 되어 주겠다며 꾸준히 서신을 보내는 게 참 거머리를 떠올리게 했다. 그 대가로 요구할 것들이 있겠지. 속셈을 아는 만큼 휘말려줄 생각은 없었다.

“사병도 그렇고, 신전도 문제고…. 산적한 게 산더미네요. 어휴, 이게 무슨 일인지.”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다며 티레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종이들을 한데 모은 뒤, 프란츠는 그것을 다시 티레인에게 내밀었다.

“이걸 좀 더 깊게 파보도록. 보고는 가급적 대면으로.”

“네, 알겠습니다.”

티레인이 공손하게 그것을 받아 들었다. 더없이 무심한 목소리가 가신들에게로 떨어졌다.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해. 때가 오고 있으니.”

“예, 전하.”

셋은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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