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마땅히 필요한 것
대화를 한다고, 설득을 하려 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통하는 것은 아니다. 논리보다 더 강한 건 감정이었다. 감정은 쌓여서 관념을 만들고, 관념이 모여 사회를 이룬다.
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만큼 자신 역시 편견과 아주 동떨어질 수는 없었다. 제가 보는 시야를 남들이 똑같이 바라보지 않는 건 당연했다.
아버지와 아무리 진지하게 대화를 하고 말을 나누더라도, 결코 이해받지 못할 부분이 있는 것처럼.
그걸 알지만, 지레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에 가치가 있다고, 제라니아는 그렇게 믿었다.
프란츠는 그런 의미에서 재미있는 상대였다. 분명 이리도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데, 그는 절대 제 의견을 무시하지 않았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신분과 위치를 가졌음에도.
그는 설득이라는 게 가능한 상대였다. 감정을 앞세워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라니아는 그를 대할 때는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이 사람이라면 괜찮겠다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존중이라…. 언니다운 이유인걸.”
코델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어?”
“존중 좋지. 언니가 전하를 왜 마음에 들어 하는지도 알겠고. 하지만 언니가 그런 이유로 굳이 결혼을 하겠다고 나설 사람이야? 몇 번 보지도 않은 상대랑?”
“…….”
“언니 성격이면 적어도 1년은 여유를 두고 차근히 고민해서 결정했겠지. 결혼 적령기를 신경 쓸 거였다면 바로 직전에 봤던 맞선을 단칼에 파투 내지도 않았을 거잖아.”
“…….”
“이유가 더 있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그건….”
생각보다 동생의 눈썰미가 더 날카로운 것에 제라니아는 속으로 조용히 침음했다.
이게 아닌데.
어쩐지 코델리아에게 말려드는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일까. 문제는 조목조목 맞는 말이라 둘러대기도 애매했다.
제라니아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칼리아를 쳐다보았다.
“언니는 어때?”
칼리아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이렇게 나올 거냐는 시선에 제라니아는 조용히 언니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코델리아의 시선까지 한 몸에 받게 되자, 칼리아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찻물에 비치는 얼굴 위에 고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표정을 보니, 방금 전 자신도 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 같아 제라니아는 조금 웃고 말았다.
“…누군가를 진지하게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일까.”
한참 뒤에야 칼리아가 내놓은 답은 그것이었다. 그 어조가 자못 진지하고 차분했다. 예상 밖의 대답에 제라니아와 코델리아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코델리아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언니한테 고백한 남자들 중에는 그런 사람 없었어?”
“뭐….”
칼리아는 묵묵히 제 앞에 놓여 있는 딸기 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입에 넣었다.
“세상사가 그렇게 쉽겠니.”
달콤한 것을 먹으면서도 쓴 약을 삼키는 것처럼 웃는 칼리아의 모습에, 두 자매는 더는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 * *
즐거웠던 야외 다과회를 마치고 궁으로 돌아오자,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제라니아를 반갑게 맞았다.
“이제야 끝나셨나 봅니다.”
제복을 입은 채 반듯한 자세로 서 있던 리암이 말했다. 그의 존댓말은 언제 들어도 참 생경했다. 처음에는 신분의 차이 때문인지 어색해하던 다른 호위들도 이제는 제법 그에게 적응해 지나가다 농담을 걸기도 했다.
말수 없고 무뚝뚝하게 굴지만 꼬박꼬박 반응을 보이는 그를 기사들은 신기하게 여겼다.
불평할 만한데도 잘 적응하고 있는 리암을 보고 있자면 든든하면서도 괜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계약서라도 썼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내가 약속을 못 지키기라도 하면 어떤 불이익이 있다거나, 그런 거.”
제라니아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사실 찾은 뒤에 약속을 이행하는 것도 아니고, 선불을 내고 기약 없는 기다림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지 않은가. 묵묵히 제가 약속한 바를 지키는 리암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별생각이 다 들었다.
어지간히 그 여인을 좋아하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암한테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리암이 왜 호위기사로 들어오게 된 건지는 프란츠와 같이, 셋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아니, 굳이 따지면 한 명이 더 있긴 하지만.
“굳이 왜? 네…. 비전하께서 약속을 어길 리가 없지 않습니까.”
자연스럽게 나오려는 반말을 쿡 찍어 누른 그가 능청스레 대꾸했다. 제라니아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걱정을 아주 떨치지는 못했다. 물론 약속은 지킬 거지만, 그래도 기분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솔선수범해서 계약서를 적자고 해야 했는데.
아는 얼굴이라 그런지 별생각이 없었는데, 돌이켜 보면 경우가 없었던 것 같아 제라니아는 조용히 반성했다. 그렇게 경계심이 많으면서 제게 이렇게도 믿음을 보여주는 리암을 보니 괜히 멋쩍은 기분도 들었다.
힐끔 저편을 돌아보는 리암을 따라 제라니아는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 궁으로 통하는 복도 쪽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비전하!”
초록빛이 감도는 제복을 입은 새까만 머리칼의 소년이 제라니아의 앞에 서서 묵례했다. 이제 제법 시동 일에 익숙해진 건지, 활기찬 분위기를 보이는 소년에게 제라니아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핀. 무슨 일이니.”
왕궁으로 그를 데려온 뒤, 프란츠와 제라니아는 곧바로 이렌스와 대면해야 했다. 머리를 다듬고 깨끗한 옷을 입히기는 했지만, 핀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쓱 훑어보던 이렌스는 딱 한마디를 남겼다.
‘엉망이군요.’
말하는 어투도 그렇고 태도도 그렇고, 그럴듯한 차림새를 하더라도 입을 열면 3초 만에 들킬 거라며 그는 신랄하게 감상을 쏟아냈다. 움찔 몸을 떠는 핀의 어깨를 제라니아는 꼭 붙잡았다.
‘이미 족보는 구해 뒀습니다만, 이대로 궁에서 일하게 시킬 순 없습니다. 두 분께서도 아시겠지요.’
‘허면….’
이렌스는 딱 잘라 말했다.
‘제가 맡겠습니다. 어떻게든 그럴듯해 보이도록 만들죠.’
당분간 자신과 함께 생활하도록 하겠다며 선뜻 핀을 데려갔던 그는 2주 만에 선언했던 바를 지켰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억양부터 자세까지 이전과 확실하게 달라진 핀의 모습에 제라니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뻣뻣하게 긴장해 있는 얼굴과 달리 눈에도 제법 총기가 있었다.
놀라는 제라니아의 앞에서 이렌스는 대수롭잖다는 듯이 대답했다.
‘시간이 모자라 글자는 아직 영 서툴지만, 제법 기억력이 좋아 다행입니다. 곤란해질 때는 어떻게 하라고 매뉴얼을 숙지시켜 뒀으니 문제가 벌어지진 않겠죠.’
‘뭘 어떻게 한 건가요?’
‘궁금하십니까?’
유쾌하게 웃는 이렌스의 표정과 달리 핀의 입매가 부르르 떨렸다. 그걸 본 제라니아는 질문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궁금하긴 했지만 모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혹시 괴롭힘을 당한 건 아니냐고 넌지시 물어봤지만 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척 친절하고….’
‘친절하고?’
‘…무서우셨어요.’
힐끔 이렌스의 눈치를 보며 작게 속닥이는 목소리에 제라니아는 튀어나올 뻔한 웃음을 애써 삼켜야 했다. 제 욕을 하는 걸 알았을 텐데도 이렌스는 그저 무심한 어투로, 핀에게 주에 한 번은 여기로 오라는 말을 남기고 대화를 마쳤다.
“편지가 왔다고 해서, 가지고 왔습니다.”
이제는 제법 의젓하게 말하며 핀은 가지고 온 편지들을 공손히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들고 제라니아는 조용히 웃었다.
“수고했어. 이제 그만 가봐도 괜찮아.”
“네!”
씩씩하게 인사한 소년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돌아나갔다.
리암에게 마저 수고하라고 인사를 남긴 뒤, 궁에 마련되어 있는 작은 서재로 들어온 제라니아는 핀이 건넨 편지들을 하나하나 뜯었다. 발신인은 전부 달랐지만 담고 있는 내용의 주제는 같았다.
편지에 동봉된 종이들을 책상 위에 좌르륵 펼친 뒤 제라니아는 곰곰이 머릿속으로 정보를 조합해 결과를 냈다. 제라니아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좋아. 이거라면….”
약속을 지킬 날이 머지않은 것 같았다.
그때 서재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종이를 전부 갈무리한 뒤 들어오라 허락하자 몰리 세자르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표정이 평소보다 진지했다.
“비전하.”
“말씀하세요.”
“왕비 마마께서 초대장을 보내셨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제라니아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책상에 두고 가세요.”
“예.”
나긋하게 대답한 몰리가 책상 앞에 붉은 봉투를 올려둔 뒤 서재를 나갔다. 붉은색 바탕에 금색 문양들이 그려져 있는 화려한 편지가 밀랍 인장으로 봉해져 있었다.
인장 위에 찍혀 있는 왕가의 문양을 지그시 바라보던 제라니아가 책상 위에 마련되어 있는 날이 둔한 나이프를 꺼내 그것을 뜯어내 내용을 확인했다.
편지의 내용은 짧고 평범했다. 나흘 뒤 열릴 소규모 다과회에 자신을 초대하는 내용이었다.
제라니아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편지만 봐서는 별달리 이상한 점이 없었다. 고민에 빠진 제라니아의 손가락이 편지지 위를 가볍게 덧그렸다.
곧 책상 서랍에서 크림색 종이와 만년필을 꺼낸 제라니아가 답신을 적기 시작했다.
* * *
“그래서, 디나이안 왕국의 상황 보고는 이 정도입니다.”
무뚝뚝하고 침착한 목소리가 닫혀 있는 집무실 내에 울려 퍼졌다. 차분하게 보고를 마친 이렌스가 결재를 기다리는 것처럼 프란츠를 쳐다보았다. 티레인과 더불어 프란츠의 뒤에 서 있는 제롬 역시 프란츠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셋이서 둘러앉은 테이블 앞에 커다란 지도가 놓여 있었다. 6년 전 끝난 전쟁 이후로 새로 만들어진 왕국의 지도였다. 북쪽을 쳐다보던 시선을 거둔 프란츠가 왕국 동쪽에 그려져 있는 나라를 힐끔 쳐다보았다.
“리하르타넨 공국의 상황은.”
“계승권 문제가 슬슬 끝날 것 같습니다. 울프 메디나가 승기를 잡은 것 같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곧 다음 공작이 결정 날 거라 생각됩니다.”
이렌스가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리하르타넨을 다스리던 메디나 공작이 갑자기 급사한 뒤, 계승권을 가진 두 아들 사이에서 공작위를 두고 내전이 벌어졌다. 몇 년을 끌어온 싸움이 이제야 슬슬 마무리가 되어가는 모양이었다.
“하루빨리 정리되었으면 좋겠군. 공국의 상황이 정리되면 케라온도 그쪽을 견제하지 않을 수 없겠지.”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 짧게 덧붙이는 프란츠를 바라보던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레이츠 왕국에는 네 개의 공작가가 있었다. 남쪽을 다스리는 바이첸과 서쪽을 다스리는 그라시아, 북쪽을 다스리는 휴스타인과 동쪽의 케라온.
여기까지는 평범했으나 휴스타인과 케라온을 둘러싼 정치적 배경은 다소 복잡했다. 그도 그럴 게, 그들은.
“생각보다는 오래 끌었군.”
“덕분에 생각보다 오래 기다리기도 했고 말입니다.”
전쟁으로 인해 통합된 가문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