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작은 다과회
돌아오자마자 제라니아는 제가 지내던 저택에서 사람 몇을 데려와 제 곁에 두었다. 리암 역시도 무사히 기사 서임식을 마치고 왕궁에 합류했다. 사람을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적응력은 뛰어난 만큼, 그는 금세 왕궁에 적응했다.
몰리에게는 미안했지만 제 일거수일투족을 프란츠에게 고할 것 같은 상대만을 옆에 두기는 곤란했다. 걱정과는 별개로 그런 갑갑함은 두 번은 사양이었다.
다행히도 그 이후 독살 시도라든가 그런 문제는 일절 사라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묘하게 불안함이 감돌았다. 꼭 공연 시작 전에 흘러나오는 전주를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프란츠 역시도 무척 바빠진 탓에 밤이 아니면 서로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다. 물론 자신보다는 대체로 프란츠가 더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왔다.
그렇게 순식간에 넉 달이 흘렀다.
“맞다, 리암이 언니 호위기사로 들어왔다는 거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게? 진짜 오늘 안 봤으면 내가 못 믿었지.”
“많이 컸더라. 옛날엔 훨씬 더 애 같았는데 말이지.”
처음에 리암을 본 두 사람 역시 크게 놀랐다. 5년 전과는 확실히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기도 했고, 그가 멀쩡하게 제복을 입고 근무를 서는 모습에 두 번 놀랐다.
코델리아는 너도 드디어 철이 들긴 한 거냐고 놀리다가, 정중한 존댓말로 코델리아의 예전 흑역사를 읊는 리암에게 역풍을 맞았다.
둘 다 그만하라는 제라니아의 한마디가 없었다면 멱살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코델리아가.
셋이 모이면 주로 이야기를 꺼내는 건 코델리아였다. 칼리아는 의외로 제라니아만큼이나 말이 없는 편이었다. 오늘도 그런 법칙에 충실하던 차, 코델리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또 나만 말하고 있잖아!”
“그러게.”
“그렇지.”
선선히 납득하는 두 사람에게 코델리아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코델리아의 푸른 눈동자가 제라니아를 향했다.
“언니 이야기를 들으러 온 건데! 잘 지내고 있는 거 맞지?”
코델리아의 푸른 눈동자가 불꽃을 담은 것처럼 이글거렸다. 동생의 기세에 제라니아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해달라는 요청에 제라니아는 차근히 그간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마침 인간관계에 관해서 두 사람에게 조언을 얻고 싶은 것도 있었다. 사교계에 대해서는 원체 관심이 없었던 터라, 차를 마시며 만나는 정도로는 아무래도 정보가 부족했다.
“아만다 트리만? 걔는 별로야. 내숭을 그렇게 잘 떠는데 속은 음흉해. 근데 거기에 넘어가는 남자들이 있다는 게 더 신기하다니까. 환상이란 참 무서워.”
“산드리체는 나쁘지 않아. 무뚝뚝한 데다 말솜씨가 부족하긴 한데, 뒤에서 수작을 부리는 타입은 아니거든.”
칼리아와 코델리아는 제라니아의 질문에 충실하게 조언을 건넸다. 가끔 이야기를 하다 보면 프란츠에 대해서 말을 꺼내게 될 때도 있었는데,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 칼리아도 그렇지만 코델리아의 반응은 특히 유별났다.
“언니, 사랑받고 지내네.”
“그…런가? 그렇겠지?”
“그럼. 사랑하니까 그렇게까지 하지!”
코델리아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역설했다. 세상 모든 일을 로맨스로 치환하는 경향이 있는 제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라니아가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또 새로운 소설을 쓰고 있는 거야?”
“아직은 구상 단계. 영 감이 안 잡히네.”
코델리아가 테이블에 팔을 쭉 뻗고 늘어졌다. 다른 곳에서라면 교양이 없다며 혼날 법도 했지만, 지금은 셋뿐이었으므로 두 언니는 그런 막내의 모습을 그러려니 넘겨주었다.
자매들끼리만 아는 사실이지만, 코델리아에게는 또 다른 이름이 있었다.
로렌스 블랑.
최근 귀족 영애들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로맨스 소설, 《낭만의 여인》을 집필한 작가의 이름이었다. 그 밖에도 《그 공작님의 밤에는 무슨 일이》, 《사랑에서부터, 사랑으로》 등을 집필했다.
코델리아가 글을 쓴다는 건 자매들과 편집자인 루터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다.
고지식하고 꼬장꼬장한 아버지한테 이런 걸 쓴다고 했다간 기함할 게 분명했고, 어머니는 더 곤란했다. 여인의 행복은 좋은 남자를 만나 시집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께서 자신이 글을 쓰는 걸 좋게 볼 리가 없었다.
프레드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밀로 해주기는 하겠지만 못마땅해하겠지. 새언니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오라버니의 사람이라는 점이 불안했다.
물론 코델리아도 처음부터 작가가 되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적극적으로 제 글을 좋아해주던 작은언니와 말없이 종이와 펜을 선물로 건네주던 큰언니가 없었다면 로렌스 블랑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여인이 쓰는 글을 누가 읽겠나. 그런 인식이 팽배한 사회인만큼.
“그렇게 사랑 이야기를 적어대면서, 정작 네 연애 이야기는 가뭄인 게 참 신기하단 말이지.”
사랑에 큰 관심이 없는 칼리아나 제라니아와 달리, 코델리아는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는 쪽에 속했다. 그만큼이나 인기 역시도 많은데, 어째서 지금까지 연애에 대해서는 별다른 소식이 없는 걸까.
“하지만, 꼭 잘될 것 같다 싶으면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보이는데 어떡해.”
이게 마음에 들면 저게 마음에 안 들고, 저게 괜찮아 보이면 또 이게 별로였다.
코델리아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입 간수를 못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남자들은 왜 이렇게 괜찮다 싶으면 깨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싶었다.
나직이 푸념을 털어놓던 코델리아가 제라니아를 돌아보았다. 불길함에 재빨리 남은 차를 마시는 척하려던 제라니아에게 코델리아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언니, 도대체 어떻게 왕세자 전하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거야? 응? 응? 알려주라. 궁금하단 말이야.”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여동생을 바라보며 제라니아는 싱긋 웃었다.
“말 안 해.”
“왜!”
“소설 소재로 쓸 게 아니라고 맹세할 수 있니?”
“힝.”
확답을 못 하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코델리아를 바라보며 제라니아는 차를 마셨다. 동생은 귀여웠지만 제라니아의 눈에는 아직 어렸다. 사고를 쳐도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면모가 특히 그랬다.
“난 낭만적인 사랑을 할 거라고!”
“그러라니까.”
“칼리아 언니야말로 왜 아직도 소식이 없어? 솔직히 어느 파티에 가도 언니한테 고백한 남자가 하나씩은 있을 정도잖아.”
칼리아는 말없이 차를 마시기만 했다. 차마 사랑에 로망을 가진 어린 동생 앞에서 제 신랄한 사랑관을 말할 수는 없었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내 사랑보다 너부터 걱정하지 그러니. 대체 어떤 남자가 좋길래 그렇게 고민하는 거야?”
“그러게. 이상형이 확고해서 그런 건지도. 어떤 사람이 좋은데?”
“내 이상형? 글쎄.”
언니들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던 코델리아는 맨 처음 떠오른 생각을 읊었다.
“우선…. 나보다 술을 잘 마시는 사람?”
“음, 그건….”
“독신으로 살 생각이니? 나쁘지 않지.”
웃는 낯으로 말끝을 흐리는 제라니아와 달리 칼리아는 대놓고 쐐기를 박았다. 그게 말이 되냐는 양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칼리아에게 코델리아는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아니, 언니! 그 말은 좀 심하지 않아?”
“주량으로 아버지를 이겨먹은 것부터 넌 틀렸어. 보는 눈을 낮춰.”
새침을 떨 것 같은 우아한 얼굴과는 다르게, 코델리아는 대범한 성격도 그렇지만 특히 술을 사랑했다.
성인이 되기 전부터 조금조금씩 마시기 시작하더니, 성인이 되는 생일날 코델리아는 작정하고 바이첸 공작과 대작을 했다. 주량을 알아보겠다는 핑계를 댔지만, 결국 술을 여한 없이 마셔보고 싶다 이거였다.
이 귀여운 도전은, 막내딸의 도전장을 껄껄 웃으며 받아들였던 공작이 벌게진 얼굴로 식탁에 머리를 쿵 찧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다음 날 아침 그 사실을 알게 된 가족 모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역시 내 딸이라며 나름대로 좋아하던 공작과 달리 티엘라는 뒷목을 잡았다. 공작은 그 후로도 코델리아와 가끔씩 대작을 했는데, 물론 티엘라의 눈총에 마실 수 있는 술의 양은 훨씬 제한되었다.
그 이후 코델리아의 별명에 밑 빠진 술독이 추가되었다. 물론 가족들끼리만 아는 별명이었다.
“내가 꼭 나보다 술 잘 마시는 남자를 찾고 만다!”
씩씩거리며 주먹을 치켜드는 코델리아에게 제라니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음, 코델리아.”
“언니, 왜?”
“다른 취향은 없니?”
상냥한 목소리에 홀린 코델리아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말을 꺼냈다.
“음, 잘생긴 건 기본이고, 무조건 나만 봐야 하고, 목소리는 좀 좋았으면 좋겠고, 교양 있는데 다정다감하고…. 아, 내 책을 아주 즐겁게 읽어줄 수 있는 사람인 것도 중요해!”
“그러면, 일단 그거에 치중하는 게 어떨까.”
아무래도 첫 번째는 좀.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하는 제라니아를 보며 코델리아는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와, 언니까지….”
배신감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코델리아의 시선을 제라니아는 슬쩍 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건 불가능한 거였다.
코델리아가 툴툴거렸다.
“나만 털어놓게 하기야? 언니들도 말해줘야지. 이상형!”
맨 처음으로 코델리아의 시선이 닿은 사람은 제라니아였다. 이것까지 피하면 정말 삐지겠지. 제라니아는 곰곰이 생각했다.
이상형이라.
“…내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이 화제에서 자연스럽게 프란츠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 그와 결혼했기 때문일까.
코델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뿐이야? 막 좋아하는 얼굴형이라든가, 그런 건 없고?”
“글쎄….”
딱히 상대의 외견에 연연한 적은 없었다. 조금 더 고민하던 제라니아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
“하긴, 언니가 얼굴을 봤으면 이미 크리스토퍼랑 잘됐겠지.”
“크리스는 갑자기 왜?”
“잘생겼잖아.”
드물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코델리아를 보며 제라니아는 의문에 빠졌다. 보는 눈이 하늘같이 높은 코델리아의 입에서 남자 얼굴 잘생겼다는 말이 나오다니.
물론 크리스가 객관적으로 잘생기긴 했지만, 리암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혹시 특별한 감정이라도 있다든가.
“소설 남주인공으로 세우기 딱 좋단 말이지.”
그럼 그렇지. 방금 전 떠올린 생각을 제라니아는 깨끗하게 지웠다. 다른 건 몰라도 동생의 연애는 아직 한참 남았겠구나, 라는 생각이나 하면서.
“아무튼 그게 지금 중요하니. 난 이미 결혼했는데.”
“그럼, 왕세자 전하는 언니의 말을 잘 들어주나 보네.”
히죽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는 코델리아의 우아한 얼굴이 평소보다 사악해 보였다. 제라니아는 차분하게 응수했다.
“아무래도 그렇지.”
“전하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그 정도는 말해줄 만하잖아.”
재차 거절하려던 제라니아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저도 모르게 뱉었다.
“전하께서는, 나를 존중하려고 하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