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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27화 (28/171)

제27화. 단서를 찾아서

응접실로 보이는 공간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티레인은 제 무릎보다 살짝 낮은 나무 탁자를 쳐다보았다. 따분하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는 크게 하품을 했다.

한참을 기다렸는데, 도대체 언제쯤 오는 거려나.

그는 지금 소프람에 위치한 신전에 와 있었다. 불길 속에서 발견한 단서 때문이었다.

처음 건물에 뛰어든 뒤 시체를 발견한 직후, 티레인은 재빨리 침착함을 되찾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건물이 워낙 큰 데다 돌로 되어 있어 아직까지 불길이 완전히 번지지는 않았다. 여유로운 건 아니었지만 시간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최대한 입을 틀어막고 불이 덜 번진 구역을 따라 움직이다 계단을 발견하고 그 위로 올라갔다.

대장들은 보통 맨 위층에 자기 자리를 마련하지 않던가.

직감에 의존해 움직였을 뿐인데, 복도 끝에 비어 있는 방을 발견한 티레인은 상황도 잊고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곧장 탄내가 코와 입으로 들어오는 것에 콜록거리며 다시 천으로 입을 가렸지만.

원장실로 보이는 공간은 완전 난장판이었다. 낡은 소파는 북북 찢겨 있고 책장에 있던 책들이 쏟아진 건지 책장은 텅 비어 있고, 바닥에는 종잇조각이 넘쳐났다. 딱 보기에도 멀쩡한 책이 하나도 없었다. 티레인은 쯧, 혀를 찼다.

좀 허술하게 굴어주면 어디 덧나나? 이래서 악당들이란!

벽에서부터 열기가 몰아치는 게 곧 여기에도 불이 붙을 것 같았다. 숨을 쉬기가 점차 버거워지고 있으므로 서둘러야 했다.

몸을 낮춘 채 티레인은 손과 발로 종잇조각들을 마구 들쑤셨다. 아슬아슬한 시간까지 단서를 찾던 그는 건져낸 것을 밖으로 던진 뒤, 창문을 깨고 그 밖으로 몸을 던졌다.

3층이다 보니 다리가 아작 나는 것을 각오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거리가 좀 멀긴 했지만, 밖에 나무가 있었다. 티레인은 있는 힘껏 뛰어 나뭇가지를 붙들었다.

비록 화상을 입은 손이 쓰라리긴 했지만, 어디 한 군데가 부러지거나 죽는 것보다야 양호했다.

그런 소동 끝에 그가 발견한 것은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 있던 조각난 나무 명패였다. 명패에는 신전에서 쓰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아, 저 고아원 말입니까. 신전에서 후원하는 곳이 맞아요. 이 근방 고아원들 대다수가 신전의 지원을 받고 있으니까요.’

‘혹시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진 못했습니까?’

‘어휴, 고아원이 다 거기서 거기죠. 이 도시에만도 수없이 많은데요. 어쩌다 이런 일이 생겼나 몰라.’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그때 문이 열리고 신관복을 입은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언제 그랬냐는 양 반듯한 자세로 티레인은 남자를 맞았다. 그가 신관의 손에 들린 장부를 슬쩍 곁눈질했다.

자신을 라스라고 소개한 신관이 차분한 음색으로 말했다.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티레인은 불타는 고아원을 본 목격자 중 한 명으로서 증언을, 신전은 그에게 고아원에 대한 일부 정보를 건네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물론 그는 로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마지막으로 목격한 내부의 모습을 느릿하게 대답하며 티레인은 신관의 안색을 면밀히 살폈다. 덤덤하게 사실을 기록하는 신관의 얼굴에서는 별다른 특징이 느껴지지 않았다.

모레인 고아원.

10년 전쯤 맥스 모레인이라는 남자에 의해 세워진 고아원으로, 대략 50~60명의 아이들을 수용했다. 성인이 된 뒤에는 독립을 원칙으로 하나 몇몇 아이들은 원장을 돕겠다는 이유로 고아원에 남았다고 한다.

신전에서 방문할 때마다 늘 분위기가 좋았던 곳이라, 설마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며 신관은 침통해했다. 넉살 좋게 신관의 반응을 받아주는 티레인의 눈초리가 조금씩 날카로워졌다.

“혹시 그에게 가까운 친지가 있었습니까?”

후원을 받는다면 분명 가족이라든가, 출신지 같은 신상명세 정도는 기재했을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돈을 쓰는 일인데 허투루 굴었을 리가 없다. 장부를 내려다보던 신관이 눈을 깜빡였다.

“여동생이 있다고 적혀 있긴 합니다만….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신관의 눈동자에 경계심이 깃들기 전, 티레인은 재빠르게 표정을 바꾸었다. 그가 눈매를 누그러뜨리며 제법 슬픈 얼굴을 했다. 이렌스와 제롬이 봤다면 더없이 가증스럽다고 할 만한 얼굴이었다.

“가족한테 변고가 생겼을지도 모르는데, 어쨌거나 소식을 알려야 하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저도 누이가 있어 남 일 같지 않군요.”

좋아, 넘어간다.

신관의 얼굴에 약간이나마 동정의 기미가 엿보이는 것에 티레인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는 한 걸음 더 내디뎠다.

“혹시, 모레인 씨는 어디서 오셨는지…?”

“어…. 시트라움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오, 제 고향 근처군요. 이런 우연이 있을까요.”

“고향이 어디십니까?”

“안타네입니다.”

티레인은 천연덕스럽게 바로 근처에 있는 도시의 이름을 댔다.

“좋은 일을 하다 가셨는데 안타깝게 되었죠. 다름이 아니라, 제가 불길 속에서 그분의 유품을 건진 것 같은데. 가는 길에 전해드릴까 하고 말입니다.”

고아원의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장부에 기록된 아이의 수와 시체의 수가 미묘하게 맞지 않다고는 하나, 몇 달 전의 기록이니 확신할 수는 없었다. 체격만 따지면 열여섯만 넘어도 어른과 아이를 구분하기 어렵기도 했고.

티레인은 자신이 들어갔을 때 보았던 시체의 산을 똑똑히 기억했다. 바닥에 고여 있던 피 웅덩이와 시신들의 몸에 나 있던 칼자국까지도. 화재로 인해 흔적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하나 아무리 봐도 고의적인 살인에 해당했다.

그는 시신들 중, 그나마 형체가 남아 있던 누군가의 등을 떠올렸다. 많이 훼손되어 있었지만 등에 그려져 있던 무언가.

자객들은 물론, 그 핀이라는 아이의 등에 그려져 있던 문신과 비슷했다.

“아니요, 그렇게까지 수고를 끼쳐드릴 수는 없지요. 유품은 저희 쪽에 맡겨주시면, 책임지고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역시나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티레인은 선선히 대답했다.

“그러십시오, 그럼.”

* * *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산맥의 주변으로 보라색과 주홍색이 오묘하게 섞여들어 하늘을 수놓았다.

누구보다 빨리 제 할 일을 마친 뒤, 여인은 언제나처럼 집사에게 인사를 건네고 저택 밖으로 나왔다. 요 며칠 바쁘게 일했더니 요즘은 빨리 들어가지를 못했다.

그래도 서두르면 저녁 정도는 같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에 여인은 옷매무새를 재차 정리했다. 멀어지는 해를 향해 걸어가던 여인의 옆으로 마차 한 대가 스쳐 지나갔다. 여인을 한참 앞서가던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호위로 보이는 이의 손을 잡고, 딱 보기에도 무척 기품 있는 여인이 마차에서 내렸다. 단정하게 차려입었지만 고급스러운 옷차림이 여인의 신분을 말해주는 듯했다.

여인이 제 쪽으로 다가오는 상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데이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도 여인은 빠르게 걸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그의 귓가에 차분하고 낭랑한 목소리가 꽂혔다.

“아니, 줄리아 파시안이라고 불러드려야 맞을까요.”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아주 천천히, 줄리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돌아선 여인이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연한 갈색 머리칼이 노을빛을 받아 짙게 물들었다.

“…누구시죠?”

어떻게 그 이름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망연해 있는 여인에게 제라니아는 조용히 대답했다.

“여기서 말씀드릴 일은 아닌 것 같네요.”

“…….”

“일단 자리를 옮겼으면 하는데, 시간 괜찮으실까요?”

* * *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나한테 그랬다니까. ‘오늘 입은 드레스보다는 저번 파티에서 입은 분홍색 드레스가 더 예쁜 것 같아요.’ 이러고 말이야. 그러면서 은근슬쩍 허락도 없이 내 어깨를 감싸는데, 내가 정말 열 받아서!”

억울하다는 듯 소리치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는 코델리아의 손에 들린 찻잔에서 차가 넘칠락 말락 했다.

“코디, 진정하고 일단 찻잔부터 내려놓자.”

“너 밖에서도 이러는 건 아니지? 교양 없단 소리 듣는다.”

차분한 음성으로 제지하는 제라니아와, 곧바로 핀잔을 건네는 칼리아를 번갈아 보며 코델리아는 부루퉁한 얼굴을 했다. 물론 그 얼굴조차 우아하고 사랑스러웠다.

“여기 내 편은 없는 거야?!”

서럽다는 듯이 입을 삐죽이 내미는 여동생을 제라니아가 조용히 달랬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 허락 없이 손을 댄 것도 그렇지만, 네가 불쾌함을 느꼈다면 그건 상대의 잘못이지. 게다가 코디 넌 뭘 입어도 잘 어울리는걸.”

제라니아의 대답에 만족했는지 코델리아는 진정하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찻잔을 내려놓고 쿠키를 집어 든 코델리아가 쿠키를 냠 베어 물었다.

따스한 햇볕이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는 테이블 위로 쏟아졌다. 가운데에 장식된 꽃까지 포함해 무척 화사한 풍경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코델리아의 분노를 잠재우지는 못했다.

“그렇지? 진짜 웃겨. 아니, 칭찬하는 척하면서 내 옷차림에 간섭하는 저의가 뭔데. 게다가 내가 저번에 그걸 입은 건 어떻게 알았대?”

코델리아는 소름 끼친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라니아와 칼리아 역시 그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네 성격에 그냥 넘어갔을 리 없잖아. 칼리아가 의아하다는 듯 묻자, 코델리아의 얼굴 위에 예쁜 미소가 떠올랐다.

“일단 어떻게든 손을 떼어놓고…. 지나가는 길에 슬쩍 발을 걸었어. 아마 내가 한 줄 모를걸?”

“잘했네. 자고로 그런 건 모르게 해야지.”

칼리아가 가볍게 맞장구를 치자, 코델리아는 곧바로 헤실 웃었다. 그걸 지켜보던 제라니아는 차를 호록 마시며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이가 좋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제라니아의 모습을 코델리아가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러냐고 묻자, 코델리아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아니, 그렇잖아. 진짜 언니 얼굴을 몇 달 만에 보는 건지.”

예전에는 매일 보던 얼굴이 사라지니 마음이 허전하다며 코델리아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커다란 눈동자가 일렁이는 것에 제라니아는 변명 아닌 변명을 꺼냈다.

“미안, 요즘 좀 바빴어.”

말 그대로였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왕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제라니아는 온갖 사람들과 교류를 해야 했다. 왕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왕세자비가 된 이상 그들과 한 번씩은 만날 필요가 있었다.

아예 자기들끼리 순번을 정해놓은 건지, 겹치지 않을 시간에 신청된 약속들이 제라니아의 하루를 꽉꽉 채웠다.

만남 역시 순탄하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대놓고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기를 꺾겠다는 의도인지 은근하게 자신을 깎아내리는 이들이 수도 없었다.

사적인 부분에 대해 질문하는 이들도 있었고, 어떻게든 대화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해 대답을 얻어내려는 이들도 존재했다.

제라니아는 그 모든 시도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쳐냈다. 왕국 정치판에서도 언변이 좋기로 유명한 아버지와 설전하던 제라니아에게 이 정도는 사실 귀여운 수준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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