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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26화 (27/171)
  • 제26화. 신경 쓰이는 상대

    한참 대화를 나눈 뒤 리암은 곧장 마차를 잡아타고 디아미드로 돌아갔다. 벌써 가냐고 묻는 제라니아에게 리암은 더 있을 필요 없는데 구태여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는 대답을 남겼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가 널 찾더라. 누가 보면 네가 자식인 줄 알겠다니까.”

    정문 앞에 서서 가볍게 투덜거리는 리암에게 제라니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워낙 과묵하셔서 그렇지, 널 아끼시는 거 알잖아.”

    리암은 픽 웃으며 모자를 다시 썼다.

    “표현을 안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아는 아버지는 훌륭한 공작이 되어야 한다고 잔소리하는 영감밖에 없어.”

    거침없는 언사에도 제라니아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네가 그분 마음을 알아드릴 의무는 없지.”

    아주 똑같지는 않지만, 제라니아 역시 아버지와 비슷한 마찰을 겪지 않았던가. 제 아버지가 맞선을 권유하는 속내를 짐작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나, 그걸 무조건적으로 이해해줘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제라니아는 그저, 리암이 조금 더 요령을 부릴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의 시원시원한 성격을 좋아하지만, 직설적인 것만이 정답은 아니었으므로.

    카암에서 보자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리암은 성을 떠났다. 그를 배웅한 뒤 제라니아는 프란츠와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기다리고 계셔도 된다고 했는데도, 프란츠는 제라니아의 곁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귀찮지 않으시냐는 말에는 ‘신혼을 만끽하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해 제라니아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의논을 하다 보니 이미 점심때는 한참 지난 상태였다. 아차 싶어 제라니아는 리암에게 점심을 권했지만 그는 아직은 괜찮다며 거절했다. 프란츠는 나중에 먹어도 된다는 말을 남겼다.

    “슬슬 점심이나 드시러 가실래요?”

    보통 점심 대신 티타임을 가지기도 했지만, 아침부터 차를 마셨으니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방의 문을 닫은 뒤, 물끄러미 제라니아와 시선을 마주하던 프란츠가 질문으로 답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사람을 찾는 것과 공작과의 관계, 이 두 가지를 모두 해결해야 했다. 제라니아가 어떤 방식으로 여자를 찾으려고 하는지는 어렴풋이 감이 잡혔으나, 공작과의 문제는 오리무중이었다. 워낙 알려진 게 없는 인물이라 그런지도 몰랐다.

    네 명의 공작 중에서도 그중 가장 조용히 지내는 사람이 바로 그라시아 공작이었다. 바이첸과 마찬가지로 왕국의 개국 공신이라 불리는 가문인데도, 두 가문의 행보는 매우 달랐다.

    현 공작인 유리 그라시아는 확실히 뛰어난 무인이긴 했으나, 영지를 관리하는 일이나 전쟁에 차출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사교적인 활동이나 교류가 거의 없었다. 어떤 의미로는 공작들 중 쌍무적 계약 관계에 가장 충실한 인물이라 봐도 무방했다.

    “네.”

    당연하다는 듯 산뜻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프란츠는 재차 물었다.

    “귀찮아질 걸 알면서, 왜 수락한 겁니까? 거절해도 손해를 보는 건 아니었을 텐데.”

    분명 제라니아가 공작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확답하긴 했으나, 프란츠의 입장에서는 굳이 그가 나서야 할 일인가 싶었다. 가문의 일은 가문 내에서 해결하는 게 보통이지 않던가.

    거절하는 게 차라리 편했을 텐데.

    제라니아는 선선히 대답했다.

    “하지만, 리암이 너무 절박해 보였는걸요.”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다. 도와줄 수 있다면 도와주고 싶은 게 당연했다. 리암의 입장만을 고려해 주기에는 걸리는 점이 많았을 뿐이다.

    최대한 리암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면서도, 상대에게 선택지를 주고 싶었다. 한쪽의 의견만을 듣고 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얼핏 들으면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로 보였지만, 제라니아는 그 속에 숨겨져 있는 본질을 알았다.

    이야기에 나오는 수많은 여인들은 대체로 누군가에게 납치되거나 고난을 겪는다. 그런 경우 자신을 구해준 남성과 결혼하는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렇지만, 여인은 과연 행복했을까?

    아무도 행복한 결말의 뒷이야기를 말하지 않지만, 제라니아는 그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자도 용케 호위기사 같은 걸 수락했군요.”

    “격식에 연연하지 않는 편이라서요.”

    리암 정도의 신분이라면 저런 면모도 매력으로 보여질 게 분명했다. 정작 리암은 제게 오는 관심 자체를 귀찮아할 것이 자명했지만.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전하의 힘까지 빌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비용이나 사람은 전부 제가 부담하면 되고, 어쨌거나 제 독단으로 받아들인 일이니까요.”

    알아서 책임질 테니 걱정하실 필요 없다며 제라니아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프란츠가 답답하다는 듯 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의 그런 면모가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가끔 아쉽기도 합니다.”

    “네?”

    “무엇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군요.”

    평범하게 여인이 좋아할 만한 걸 해주고자 해도, 그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지 않은가.

    프란츠의 진지한 표정을 본 제라니아가 멋쩍게 뺨을 긁적거렸다.

    “제가 바라는 건 별거 없는걸요.”

    “압니다.”

    그래서 더 까다로웠다.

    “아까 그 일도 그렇습니다. 이번 일이 해결되면 제일 이득을 보는 건 나일 테고.”

    비용이든 사람이든, 계책이 있다면 제게 어느 정도 부탁해도 되지 않나. 못 들어줄 것도 없는데 어째서 저토록 선을 긋는 걸까.

    “하지만, 전하께서 왕이 되셔야 계약이 이행될 수 있잖아요.”

    “…그렇죠, 계약.”

    프란츠의 분위기가 아까보다 한층 가라앉았다. 제라니아는 난처했다.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자 한 건 아니었는데.

    “정말 전하까지 나서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해서 드린 말씀이에요. 저는 전하의 사람이잖아요.”

    실제로 프란츠가 자신을 도와준 적이 훨씬 많았다. 마차에서 자신을 구해준 것도, 아이에 대한 것도 그랬다.

    비용 문제도 그랬다. 당장 결혼식에 들어온 선물의 값어치만 봐도 삼대가 족히 먹고 살 것 같은데, 프란츠는 그걸 전부 제 몫으로 넘기지 않았던가.

    재차 부연하자 프란츠의 표정이 아주 살짝 나아졌다. 안심하고 있는 제라니아에게 프란츠는 더없이 가벼운 어투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아까 크리스토퍼 경의 이름이 오가는 것 같던데. 많이 친합니까?”

    프란츠는 제 결혼식장에 왔던 키 큰 기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왕실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는 만큼 프란츠도 그와는 안면이 있었다. 실제로 결혼식장에서 제라니아와 같이 그를 만나기도 했다.

    기사로서 만났을 때는 필요한 때가 아니면 말수도 적고 진중한 기사라는 인상이 강했는데, 제라니아와 이야기하던 모습은 훨씬 밝고 쾌활해 보였다.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치고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묘하게 위화감이 드는 것에 프란츠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이건.

    “아, 네. 여덟 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예요.”

    그런데 그건 왜? 의문을 담은 눈동자에 프란츠는 조용히 답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 편일 거라니, 어지간히 친하지 않으면 나올 수가 없는 말이니까요.”

    “크리스가 저를 유독 싸고돌긴 했어요.”

    크리스라. 들려오는 애칭에 프란츠의 눈썹이 살며시 꿈틀거렸다.

    “아무튼 크리스는 안 돼요. 이번에 왕궁에서 겪은 일을 들으면 기절할지도 모르거든요.”

    제라니아는 부러 과장스럽게 말했다. 사실 기절까진 아니더라도 뒷목 정도는 잡지 않을까 싶긴 했다. 게다가 리암이야 조건이 잘 맞아떨어져서 권유라도 했다지만, 기사단에서 열심히 잘 살고 있는 친구한테 그런 걸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프란츠의 눈동자에 순간 서늘한 빛이 스쳐갔지만, 제라니아는 알아채지 못하고 쭉 기지개를 폈다.

    “와, 근데 벌써 일주일이 다가오고 있네요. 시간 진짜 순식간에 가는 것 같아요.”

    “돌아가기 싫습니까.”

    제라니아는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요 며칠이 평화로워서 그런지 그렇다고 답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 들기는 했지만, 회피하기만 하는 건 적성에 맞지 않았다.

    왕궁이라,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제라니아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나저나 저희끼리만 올라가는 건가요? 티레인 경은….”

    센디아에서 몇 명의 기사들과 함께 떠났던 그가 양손에 붕대를 감고 칼리스토 성에 도착했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는 프란츠와 무엇을 상의한 건지, 곧 볼일이 생겼다는 말을 남기고 도착한 지 하루 만에 길을 떠났다.

    “임무를 수행하러 갔습니다.”

    “무슨 임무인데요?”

    프란츠는 말을 아꼈다. 어명에 관한 것만 아니라면 어느 정도 이야기해도 상관없었지만, 설명을 하자니 필연적으로 꼬마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불탄 고아원에 대한 것도, 자신은 단서가 사라진 것이 유감이라는 생각 정도로 그쳤지만 제라니아에게는 그렇지 않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습격에 관련된 일이죠? 핀을 데려가시겠다고 한 것과 관련이 있나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라니아는 눈치도 빨랐거니와, 모른 척해 줄 생각도 없었다. 일단 핀의 등에 남아 있던 낙인부터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제게 말씀하실 수는 없는 거예요?”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말할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제라니아는 다시금 밀어붙였다.

    “습격을 받은 순간부터 이미 그런 걸 따질 단계는 지났잖아요.”

    제라니아는 고개를 들어 지그시 프란츠와 눈을 맞췄다.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제 의사를 표현하는 시선에, 결국 먼저 눈을 피한 건 프란츠였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식사부터 하러 가죠.”

    프란츠의 항복 의사에 제라니아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늦은 오후, 제라니아는 종이를 꺼내 편지를 적었다. 제법 날카로워 보이는 서체가 종이 위를 수놓았다. 두 통의 편지를 각각 동봉한 뒤, 제라니아는 성에 있는 사환 둘을 불러 편지를 맡겼다.

    “꼭 본인한테 전해줘야 해요.”

    “알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일단 이건 카암에 있는 프레망가, 엘레나 프레망 앞으로. 그리고 이 편지는….”

    다른 한 통의 편지를 품에 넣은 사환을 바라보며 제라니아는 말했다.

    “디아미드에 위치한 팔렌 성의, 그라시아 공작 각하 앞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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