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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25화 (26/171)
  • 제25화. 두 가지 조건

    리암은 가만히 두 손을 모아 붙잡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길어지는 침묵에도 제라니아는 조용히 그를 기다렸다.

    “난, 그냥….”

    생각 정리를 마쳤는지 리암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깨끗한 벽안이 제라니아를 곧게 응시했다.

    “밀드레드가 무사하기만 하면 돼.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그게 걱정돼서 그런 거니까.”

    하루아침에 사람이 사라졌다. 건강한 사람이었더라도 걱정이 될 일인데, 하물며 몸도 약한 사람이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는 게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그가 동생과 살던 집이 텅 비어 있는 걸 알아챘을 때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혹 정말 몸에 무슨 일이 생겨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건 아닐까, 그런 최악의 가정까지 하며 밀드레드를 찾았다.

    아예 흔적조차 찾지 못한 뒤에는 자괴감이 몰려들었다. 내가 그렇게 부담스러웠던 걸까. 믿음을 주지 못했던 걸까. 그래서 아무런 말도 없이, 내가 찾지 못하는 곳으로 가버린 걸까.

    자신을 피해 도망친 거라면 그것대로 속이 쓰리겠지만, 문제가 생긴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나았다.

    “일단 밀드레드를 찾아달라는 내 요청은 변함없어. 밀드레드가 원하지 않는다면, 어디 있는지 내게 알려주지 않아도 괜찮아.”

    리암은 제 속에서 일렁이는 감정들을 천천히 갈무리했다. 한결 차분하고 고요해진 시선이 제라니아를 향했다.

    “그렇지만 연락 정도는 전하고 싶어. 이런 식의 이별은 납득할 수 없으니까.”

    “어떻게 할 건데?”

    “편지를 한 통 쓸게. 그 사람한테 전해줬으면 해.”

    사실 직접 만나서 대화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리암은 그 생각을 조용히 흘려보냈다. 제 감정보다도 우선은 밀드레드를 찾는 게 더 급했다.

    편지를 읽어준다면, 그 다정한 사람은 분명 자신에게 답장 정도는 보내줄 것이다. 그러면 조금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후의 일은, 밀드레드가 날 만나준다면 그때 같이 생각할까 싶어. 지금부터 고민해봤자 괜히 불안하기만 하고.”

    제라니아는 속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리암을 마주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하겠다고 했지?”

    “응.”

    “그 사람은 확실하게 찾아줄게. 다만.”

    “다만?”

    “내가 걸고 싶은 조건은 두 가지야.”

    제라니아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 유리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긁었다.

    “첫 번째로, 이 일에 바이첸 공작가는 상관이 없는 거야. 나는 이미 왕세자 전하의 사람이니까.”

    아버지가 리암의 부탁을 거절했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짐작컨대 정치적 문제일 가능성이 컸다.

    제 아버지와 그라시아 공작이 오랜 악우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아버지가 리암의 부탁을 거절한 건 분란을 감수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 표명에 가까울 것이다.

    고로, 이 문제는 자신의 선에서 끝나야 했다. 자칫 잘못하면 아버지와 그라시아 공작 사이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었다. 리암에게 빚을 지운다면 프란츠의 앞으로 지워두는 게 그에게도 도움이 될 터였다.

    리암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계자로 교육받은 기간이 긴 만큼 그는 사리분별이 분명했다. 제라니아는 곧바로 두 번째 조건을 말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넌 당장 이 길로 수도로 올라가서 미뤄뒀던 기사 서임식을 받아.”

    “…뭐?”

    “시험을 친다고는 하던데…. 충분히 붙을 만한 실력이잖아? 맞지?”

    마지막으로 만났던 열여섯 살 때도, 리암은 놀랄 만큼 검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가볍게 검을 휘두르는 동작은 마치 검무를 추는 것처럼 유려해,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였다.

    리암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음을 뱉었다.

    “날 뭘로 보고. 당연히 가능하지.”

    그는 그저 집단생활을 끔찍하게 싫어할 뿐이었다. 기사 서임식을 계속 미룬 것도 수도에 올라가기 싫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제라니아 역시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사교적일 것 같은 산뜻한 얼굴로 낯가림이 그렇게 심하다는 게 의외롭다면 의외로웠다.

    리암이 알았다면 네가 그런 말 할 처지냐고 반박했을 법한 생각이었다.

    “그러면 됐네. 영지에서만 머무는 것보다는 공작 각하가 보시기도 그 편이 나을 거고.”

    공작이라면 아주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게 분명했다. 공작이 하나뿐인 아들을 얼마나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는지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으니까. 물론 리암에게는 제대로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이 아주 큰 흠이었다.

    덕분에 리암은 아버지 하면 치를 떨었다. 둘이 설전하는 것을 지켜봤던 제라니아로서는 리암의 낯가림이 그의 가출을 막아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영영 연을 끊을 게 아니라면, 뭐가 되었든 지금은 공작에게 가급적 잘 보이는 것이 나았다. 제라니아는 부자 사이를 파탄 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다만 제가 봤을 때 리암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좀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사람을 내켜하지 않는 그의 성정을 잘 알지만, 제 생각에 둘은 물리적인 거리가 좀 필요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그러니까…. 너랑 같이 왕궁에 돌아가자 이거지? 보아하니, 날 호위기사 비슷한 걸로 두겠다는 계산으로 보이는데. 맞아?”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역시 눈치 하나는 빨랐다. 곧장 본론으로 훅 치고 들어오는 리암에 제라니아는 조금 감탄했다.

    사실 저렇게 직설적으로 말하기보단,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하고 선택지를 고르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고개를 끄덕이는 제라니아를 리암은 유심히 쳐다보았다. 묘한 시선에 제라니아는 차분하게 답했다.

    “싫으면 이건 그냥 거절해도 돼. 사실 좀 위험하긴 하거든.”

    명색이 공작의 후계자인데, 호위기사로 써먹겠다는 건 좀 너무했나 싶었다. 사실 중요한 건 리암이 수도에 가서 서임식을 받는 거였다. 그가 성실하게 무언가를 하려는 모습이 필요했다.

    그러니 제 곁이 싫다면 기사단에 들어가라 권유할 생각이었지만, 리암의 성격이라면 기사단보다는 호위를 더 편하게 생각할 것 같았다.

    “아니. 그건 괜찮은데, 왜 나를?”

    리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보다야 당연히 그게 나았다. 제 또래의 귀족들 중에서 누가 제일 불편하지 않냐고 물으면 리암은 첫 번째로 제라니아를 꼽을 것이다.

    가장 얼굴을 많이 본 상대기도 하거니와, 어릴 적부터 봐온 사이라 그런 것도 있었다.

    애초에 기사 서임식을 받으라는 것부터가 목적이 빤하지 않은가. 사교 활동을 하라 이 소리였다. 그냥 사교 활동도 아니고, 굳이 기사 서임식을 꺼낸 것부터가 다른 목적이 있단 뜻이었다.

    제가 기사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기사가 되면 왕궁에 출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정확히는 왕실에 의무라는 걸 지게 되고, 1년마다 한 번은 왕궁에 입궐해야 했다.

    제라니아가 왕궁에 들어갔다는 걸 고려하면 답은 쉬웠다. 공작인 아버지가 왕궁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몇 번 주워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위험은 제 알 바 아니었다. 리암의 기준으로는 왕궁의 소문보다도, 목도를 들고 쫓아오는 아버지가 백배는 더 위험했다.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해서. 너 예전부터 검술은 잘했으니까.”

    “우리 아버지의 높으신 심미안을 감당하려면 어쩔 수 없다고.”

    어릴 적 훈련을 빙자해 죽어라 얻어맞은 기억을 떠올리며 리암은 이를 갈았다. 자신보다 최소 서른 살은 어린 아들에게 가차 없이 목도를 휘두르던 모습이 흡사 마수를 연상케 했다.

    최근 했던 단련까지도 그 감상은 변하지 않았다. 도대체가 쉰이 넘은 지 한참 된 영감이 왜 이렇게 힘이 센 거야.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한 1년 정도만.”

    그 정도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시간이 된다.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건 진심이었다. 프란츠의 손이 닿지 않는 선에서, 뇌물이나 권력욕과는 거리가 멀고 실력이 확실한 사람.

    사실 그 문제로 고민이 많았는데 마침 리암이 나타났으니, 권유라도 해볼 생각이었다. 대우야 신경을 쓰겠다지만, 그런 것에 연연할 성격도 신분도 아닌 만큼 신중하게 접근할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결론부터 툭 튀어나올 줄은.

    안전하게 돌아가는 길 대신 중간을 휙 가로질러 결승점에 온 기분이 이럴까.

    “하지만, 그런 거라면 나보다 크리스토퍼 휴스타인한테 부탁하는 게 낫지 않아? 그 녀석이야말로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편일 텐데.”

    리암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기 기사단장이 될 거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강한 기사가 바로 옆에 있는데, 왜 제게 그런 제안을 하는 건지 의아했다.

    외부 일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아버지가 하도 이야기를 해서 알고 있었다. 차일피일 기사 서임식을 미루는 제게 호승심이라도 일깨우겠다는 건가. 물론 넘어갈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전부 무시했다.

    제라니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유베르그 기사단 소속인 것도 있거니와, 크리스는 안 돼.”

    “왜?”

    “…걔는 정도가 지나쳐.”

    “하긴 그 녀석이라면….”

    전에 딱 한 번 봤을 뿐이지만, 제라니아한테 여러 가지로 유별나긴 했다. 친구한테 저렇게까지 하나 싶을 정도로.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리암에게 제라니아는 덧붙였다.

    “게다가 크리스는 바쁘잖아. 넌 한가하고.”

    리암의 미간에 가느다란 선이 그어졌다.

    “…내가 아무리 바깥출입을 자주 안 한다지만, 취급이 너무한 거 아니야?”

    제라니아는 선선히 웃으며 응수했다.

    “그런가? 10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 결혼식에 기별도 없이 불참하는 너만 하겠어.”

    리암의 입이 뚜껑을 닫듯 빠르게 다물렸다. 할 말이 없었는지 슬쩍 시선을 피하는 리암에게 제라니아는 걱정 말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제라니아가 방금 전 내려놓은 찻잔 속, 연초록빛 찻물 위로 어른거렸다.

    리암이 입을 달싹거렸다.

    “아버지는….”

    도와달라고 말하더니만, 제가 걱정이 되긴 되는 모양이었다. 제라니아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공작 각하는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리암의 얼굴에 안도가 떠올랐다. 확신하지 못하는 일에 쉽사리 나서지 않는 제 성격을 알아서 그렇겠지. 제라니아는 조금 미안해졌다. 제가 세운 계획을 알게 되는 순간, 그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할 것을 알아서였다.

    물론 아직은 이 이야기를 꺼낼 때가 아니었다.

    “일단 질문 몇 가지만 할게. 이야기는 그다음이야.”

    제라니아의 눈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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