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24화 (25/171)
  • 제24화. 뜻밖의 방문객

    응접실에 앉아 프란츠와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집사의 안내를 받아 리암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제라니아가 찻잔을 든 채로 인사했다.

    “어서 와.”

    “…응.”

    가볍게 손을 흔들던 리암이 제라니아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프란츠가 자리에서 일어나 제라니아의 옆으로 옮겨 앉았다.

    묘하게 시무룩해 보이는 리암의 얼굴을 제라니아는 빤히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

    “말을 해야 위로든 조언이든 해주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떨어지는 목소리가 리암의 망설임을 깨뜨렸다. 두 팔을 무릎에 걸치고 손을 모은 채,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사람을 찾고 있어.”

    리암의 설명은 이랬다.

    여자를 하나 찾고 있는데, 제 힘만으로는 아무리 찾아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불안하고 걱정된다. 그래서 바이첸 공작가에 힘을 빌려주실 수 없을까 해서 찾아왔다.

    대충 그런 이야기였다.

    제라니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 거라면 우리 성까지 올 필요 없이, 그냥 그라시아 공작님께 부탁하면 되지 않아?”

    “…아버지가 주도한 일인 것 같아서.”

    하아, 리암이 낮게 침음을 흘렸다. 모르긴 몰라도 바이첸 공작과 이야기가 잘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심란한지 연신 마른세수를 하는 리암에게 프란츠가 말했다.

    “한 가지만 질문하겠습니다만, 혹시 그 여성과 특별한 관계입니까?”

    수려한 얼굴에 멋쩍은 기색이 역력히 떠올랐다. 살짝 붉어진 얼굴로 리암은 뺨을 긁적였다.

    “마음이 통했다고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첫 만남은 성에서였다. 여인을 붙들고 수작질을 걸던 병사를 발견하고 그를 제지하던 순간, 눈을 마주쳤다.

    처음 본 순간 시선을 빼앗겼다. 고불거리는 새까만 머리카락을 한데 묶은 창백한 안색의 여인. 무척 아름답지만 묘하게 겨울을 떠올리게 했다. 잘못 손대면 바스라질 것같이 연약해 보이는 외모가 특히 그런 인상을 주었다.

    실제로 여인이 무척 병약하다는 걸 알게 된 건 나중의 일이었다.

    그냥 보내기가 아쉬워 말을 걸었고, 얼떨결에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가끔 만나러 가기도 했다.

    금방 봤는데도 또 보고 싶었고 그만큼이나 기다리는 시간이 설레고, 집에 돌아가야 할 즈음이면 아쉬움이 마음 한편에 둥지를 틀었다. 그쯤에는 리암도 제 감정을 인정했다.

    아, 나는 저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첫사랑의 열병에 리암은 어쩔 줄 몰랐다. 나날이 커져가는 감정을 숨기기엔 그는 고작 스무 살의 청년이었다. 밤잠을 설치는 날이 늘어가고 리암은 결국 결단을 내렸다.

    거절당하더라도 일단 고백부터 하고 보자.

    나름대로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자 이것저것 준비했지만, 제대로 되었는지는 모른다. 긴장을 누르고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하는 것만도 일이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사랑을 고백하자, 여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제 손을 마주 잡고 같은 마음이라 말했다. 그때 얼마나 기뻤던가. 과장이 아니라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여인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공작님이 관여했다는 걸 어떻게 아는데?”

    “도움을 요청했더니, 뭐 하러 그런 여자를 찾느냐면서 그냥 잊고 단련이나 하라고 하시더라고. 나는 여자를 찾는다고만 했지, 밀드레드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낸 적이 없는데.”

    “밀드레드?”

    “밀드레드 파시안. 그 사람의 이름이야.”

    처음 이름을 알았을 때 무척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이야기했었다. 여인은 쑥스러운 듯이 그런가요, 하고 미소 지었다. 고아한 미소가 얼굴에 깃들자 순백에 색이 입혀진 것만 같았다. 말을 버벅거리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리암은 입 안을 짓씹어야 했다.

    “반대하시는 이유가 있을까?”

    “짐작이긴 한데, 그 사람 신분 때문인 것 같아.”

    “신분?”

    리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물어본 적은 없지만, 몰락 귀족인 것 같았어.”

    여인에게 가족은 여동생 하나뿐이었고, 그 여동생은 제가 살고 있는 성에서 하녀로 일했다. 애초에 성에 오게 된 계기는 동생이 놓고 간 물건을 가져다주기 위해서였다.

    편지부터가 그랬다. 가난한 평민 여성이 글을 쓸 줄 알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억양도 그렇지만 앉은 자세라든가,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동작 등은 분명 귀족의 것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사라진 거야?”

    침통한 얼굴로 리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의 시작은 사흘에 한 번 꼴로 주고받던 편지의 답신이 오지 않은 것으로부터였다. 이상함을 느끼고 곧장 여인의 동생을 찾았으나, 며칠 전 하녀 일을 그만뒀다는 이야기가 돌아왔다. 집으로 찾아갔지만 이미 이사를 가고 없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몇 달간 정신없이 찾아다녔지만, 아무런 단서 없이 이 넓은 왕국에서 사람 하나를 찾기란 손수건으로 파이를 만드는 만큼이나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정신으로 시간을 보낸 건지 모르겠다.

    “맞다, 제라니아. 결혼식에 못 가서 미안해. 내가 좀, 며칠 전까지도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괜찮아. 얘기 들어보니 그럴 만했네.”

    제라니아는 부러 가벼운 투로 손을 내저었다.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함이었지만 리안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다. 대충 다음에 나올 말을 예상하고, 제라니아는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를 하는 건….”

    “혹시, 도움을 요청해도 될까?”

    제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을 향해 리암은 간곡히 청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할게. 그 사람을 찾는 걸 도와줘.”

    그 말을 듣자마자 제라니아는 프란츠를 힐끔 쳐다보았다. 리암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프란츠의 얼굴에서는 별다른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어 말했다.

    “이 분위기에 이런 말을 꺼내기는 좀 그렇지만.”

    조용한 목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물음표를 안고 있는 두 사람에게 프란츠는 나직하게 말했다.

    “아무리 비와 친하다 하나, 경어를 사용해 줬으면 합니다.”

    아까부터 생각한 거지만 태도가 지나치게 허물이 없었다. 아무리 친하다지만 어쨌거나 제라니아는 지금 자신과 결혼했고, 왕세자비라는 위치에 속해 있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경칭에 신경 쓰는 것이 당연할진데, 생판 남인 타인이 제 앞에서 이러고 있는 것이 프란츠는 상당히 거슬렸다.

    둘이 친근한 사이인 건 알겠지만, 거슬리는 건 거슬리는 거였다.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너무 격의 없이 굴었던 건 사실이었는지라 리암은 곧장 수긍했다. 반면 제라니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괜찮아요.”

    “제가 안 괜찮습니다.”

    “여기는 사적인 공간이잖아요, 프란츠.”

    프란츠가 자신을 신경 써주는 건 고마웠지만, 주변에 사람이라고는 저희 셋뿐인 상황에서까지 비전하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호칭보다는 차라리 이름이 훨씬 기꺼웠다.

    자신은 왕세자비이기 이전에, 제라니아였으니까.

    싱긋 웃으면서도 뜻을 꺾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제라니아를 보며 프란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리암을 향해 말했다.

    “밖에서는 확실히 예의를 차렸으면 합니다.”

    무언의 수긍이었다. 가늘어지려는 눈초리를 프란츠는 능숙하게 숨겼다.

    “네, 물론입니다.”

    등을 꼿꼿이 세운 채로 대답하는 리암의 음성에 긴장이 어려 있었다.

    “아무튼, 사람을 찾아달라는 얘기였죠.”

    가볍게 대꾸하며 프란츠는 제 앞에 앉아 있는 리암의 얼굴을 응시했다.

    리암 그라시아.

    디아미드를 포함해, 서쪽의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그라시아 공작의 하나뿐인 자식. 그가 미래에 공작위를 이어받을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했다.

    그러니 이참에 그에게 빚을 하나 지워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터였다. 왕국에서 사람 하나 찾기가 어렵다고는 하나, 작정하고 찾는다면 못 찾을 것 역시 없었다.

    문제는 이 상황에 그라시아 공작이 얽혀 있다는 점이었다. 아들과 대립하는 방향으로.

    사람을 찾는 건 둘째 치고 잘하면 공작과 척을 지게 될 수도 있었다. 정치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 인물이라 하나, 작정하고 나선다면 분명 상당히 성가실 게 분명했다.

    눈앞의 청년이 미래의 공작이라 하나 그라시아 공작은 아직 정정했고, 그가 작위를 이어받는 건 적어도 5~10년 이후의 일일 것이다.

    과연 그럴 가치가 있을까.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투자하고자 현재의 불안을 감수해도 될까. 지금 계획하고 있는 일들을 생각하면 그 불안점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무엇보다 거절한다고 해도 딱히 손해를 볼 일은 없었다.

    그러니,

    “좋아, 도와줄게.”

    프란츠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바로 옆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뜻 나오는 대답에 리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장 프란츠에게로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공작 각하는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제 속내를 꿰뚫어 본 듯한 발언에 프란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제라니아를 마주 보았다. 제라니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생각해둔 게 있다는 건가.

    프란츠는 일단 들어나 보자는 생각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투명한 녹색 눈동자가 리암의 얼굴을 가득 담았다. 얼굴에 화색을 띠면서도 리암은 슬그머니 제라니아의 눈치를 봤다. 그는 저런 눈을 하는 제라니아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고 싶어.”

    리암은 바짝 긴장했다. 평소 성격은 한없이 부드럽지만, 아니다 싶은 일에 제라니아는 칼같이 선을 그었다. 어릴 때는 네가 뭔데 그런 소리를 하냐며 반발한 적도 있지만, 돌이켜 보면 그의 말이 맞았다.

    딱 그런 소리를 할 때처럼, 제라니아는 엄격한 눈으로 리암을 바라보았다. 리암은 조심스럽게 답했다.

    “무엇을…?”

    “그분을 찾으면 어쩔 생각인데?”

    “뭐?”

    “그 여성분이 널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무척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그 내용은 더없이 냉정했다. 말문이 막힌 듯 입을 살짝 벌리는 리암에게 제라니아는 가차 없이 말했다.

    “공작님과 제대로 담판을 짓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분을 만나겠다고? 만나서 뭘 어쩔 생각이니?”

    “…….”

    “네 말대로 정말 공작 각하가 그분의 실종에 연관되어 있다면 어떻게 할 거고? 넌 그분을 위해 공작 각하와 맞설 수 있어?”

    “…….”

    “무작정 그 여성분을 찾아낸다 치자. 이후에는 어떻게 할 거야. 그분을 지켜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니? 이번과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데. 오히려 공작님 입장에서는 지금의 상황이 최선의 양보였을 수도 있단 말이야. 다음에는 더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그….”

    뭐라 말하려던 리암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밀드레드를 찾은 뒤, 그 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가 맞을 것이다.

    막연히 아버지가 관여되어 있는 것 같으니 제가 찾아내서 지켜주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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