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23화 (24/171)
  • 제23화. 내가 보는 세계

    “당신이 보는 세계…?”

    제라니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시금 사람들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제라니아는 무릎을 제 가슴께로 모아 꼭 잡았다. 하나로 땋아 내린 머리카락이 제라니아의 등 뒤에서 꼬리처럼 살랑거렸다.

    “이럴 기회가 많지는 않을 테니까요.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보는 시야를 공유하라는 이야기도 있잖아요.”

    프란츠 역시도 제라니아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꽃을 빙 둘러싸고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들.

    밤인데도 환하게 빛나는 그 광경을 프란츠는 아무런 감흥 없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이게 당신이 보는 세계란 말입니까.”

    귀족이면서.

    생략된 말을 읽어냈는지 제라니아는 작게 웃었다. 틀렸어요.

    “귀족이니까, 더 관심을 가지는 거죠.”

    “어째서.”

    “저들은 그럴 시간조차 없으니까요.”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만족하며 잠자리에 들고, 또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일을 하러 나간다. 그렇지 않은 부유한 평민도 있겠지만, 왕국 인구의 대다수는 농민이었고 농민들의 삶이란 대체로 뻔했다.

    자신도 귀족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저들과 비슷한 삶을 살았겠지.

    “그리고…. 왕궁에 돌아가면 이런 기회가 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니까요.”

    본격적으로 왕궁 생활을 해야 할 테니까. 느긋한 목소리에는 어떠한 각오가 담겨 있었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차분히 시선을 맞추는 프란츠에게 제라니아가 말했다.

    “프란츠, 저 열심히 할 거예요. 어쨌거나 제가 선택한 길이니까요.”

    평온한 삶은 이미 반쯤은 포기했다. 요 며칠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목숨이나 잘 붙어 있으면 다행일 것 같았다. 물론 어떻게든 살아남을 생각이었다. 제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완벽해 보이지만 가끔씩 위태로워 보이는, 눈앞의 이 사람을 혼자 두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신이 말했잖아요.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다고. 그러니까 저도 노력해야죠. 관계는 한 사람만 노력해서 유지되는 게 아니니까.”

    그는 제게 모든 걸 다 맞춰 주겠다고 했지만, 받기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지켜줘야만 하는 대상으로만 남을 생각은 없었다. 한계는 있겠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을 터였다.

    제라니아는 기꺼이 그 가능성에 도전하기로 했다.

    조금 망설이던 제라니아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전부터 계속 말해야지, 말해야지 했는데 이제야 말하려니 왠지 쑥스러웠다.

    “사실 이런 관계가 아니더라도…. 당신을 꽤 좋아해요.”

    말수가 적어도 자신의 말을 경청해주는 사람.

    청혼하기 전, 다섯 번의 만남 동안 그는 제게 아무것도 요구한 적이 없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늘어놓으며 허세를 부리거나, 제 능력을 칭찬하는 듯하면서도 자신을 교묘히 깎아내리는 식의 태도를 고수하던 남자들과는 달랐다.

    청혼 자체는 당황스러웠지만, 그의 태도 자체는 싫지 않았다. 파트너를 찾고 있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자신을 동등한 상대라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푸른 눈동자가 놀라움을 담고 커졌다.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제라니아는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아, 걱정하지 마세요. 사랑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당신도 저한테 그런 걸 바라지는 않잖아요.”

    “…맞습니다.”

    프란츠는 간신히 입술을 떼어 말했다. 고작 한마디를 내뱉는 것에 돌로 짓누르는 것처럼 무거워지는 기분이 의아했다.

    욕심이 없고 영민하며 결단력 있는 여인. 제가 원하는 조건을 전부 가지고 있다 판단했기에 그를 선택했던 것인데.

    어째서?

    자신의 상태에 속으로 의아해하는 프란츠와 달리 제라니아는 후련한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저한테 의지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전 한 번 정한 건 쉽게 안 바꾸니까.”

    프란츠의 눈동자가 살며시 일렁였다. 주변이 어두운 탓에 제라니아는 그 파문을 눈치채지 못하고 덧붙였다.

    “서로의 방식이 안 맞을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다 맞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제가 정말, 잘할 수 있을까요?’

    ‘당신 하던 대로 하면 될 겁니다.’

    자신을 끌어안고 토닥이며 속삭이던 그 목소리를 제라니아는 똑똑히 기억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지만, 최선을 다할 것이다. 적어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게.

    그러던 중, 광장에 신관복을 입은 이들이 나타났다. 횃불을 든 병사들과 함께였다. 곧바로 눈에 경계심이 깃드는 프란츠와 달리 제라니아의 얼굴은 확 밝아졌다.

    “드디어 왔네요.”

    “뭐가 말입니까?”

    “축제의 메인 이벤트요.”

    새하얀 복장을 한 이들이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에 무언가를 던져 넣었다. 그러자 불꽃이 새하얗게 변했다. 오팔처럼 영롱한 색깔을 입고 하늘을 향해 솟아올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하는 불꽃을 보며 사람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불꽃에서 번져 나온 빛의 조각들이 나비의 모양을 하고서 광장으로 퍼져나갔다. 개중 하나가 바람을 타고, 제라니아와 프란츠가 있는 쪽으로 날아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제라니아가 빛과 어둠의 경계선으로 걸어가, 손을 뻗었다. 하얀 나비는 제라니아의 검지 위에 앉아 그 날개를 펄럭였다.

    “프란츠, 이거 봐요! 아름답죠.”

    프란츠를 돌아보며 활짝 미소를 짓는 제라니아의 얼굴은 가지 끝에 매달린 나뭇잎처럼 싱그러웠다. 반짝거리는 녹색 눈동자와 다정다감한 미소에는 그늘이 없었다.

    그 광경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프란츠는 제 가슴 한편이 욱신거리는 감각을 느꼈다. 이상한 감정이 울컥 밀려들었다. 순간, 답지 않게도 그는 생각했다.

    나는 엄청난 실수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왕궁에 돌아가서도 당신이 계속 이렇게 웃을 수 있을까. 나를 원망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제라니아의 손목을 붙들었다. 잡히는 손목이 무척 가늘었다. 나비는 제라니아의 손을 벗어나 다시 광장으로 날아갔다.

    “프란츠?”

    제라니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요? 작게 속삭이며 제라니아는 그에게로 몸을 숙였다. 프란츠는 입술을 달싹였다.

    “제라니아.”

    “네.”

    “…아닙니다.”

    혼란스러움을 조용히 삼켜내며 프란츠는 미소를 지었다.

    * * *

    새벽에 부슬비가 내렸다.

    태양이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칼리스토 성을 비추자, 쇠창살로 만들어진 정문에 달라붙어 있는 물방울들이 햇살을 받아 구슬처럼 반짝였다.

    바퀴가 축축해진 흙을 밟으며 굴러오는 소리가 들렸다.

    특색이 없는 마차 한 대가 웅장한 성 앞에 멈춰 섰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모자를 쓴 신사가 내렸다.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걸어온 그가 정문으로 다가왔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 중 하나가 그를 제지했다.

    “누구십니까.”

    청년이 손을 제 머리에 얹었다. 그가 모자를 벗자, 새까맣고 결 좋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굉장한 미청년이 경비를 서는 병사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했으며, 섬세한 이목구비와 긴 속눈썹, 샤프하게 빠진 눈매와 붉은 입술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안녕하세요. 바이첸 공작님을 뵈러 왔습니다.”

    낮은 미성이 청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순간 넋을 잃고 있던 병사는 곧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허가되지 않은 외부인은 함부로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청년이 곧 결심한 듯이 입을 열었다.

    “리암 그라시아가 왔다고 알려주세요.”

    그럼 아실 겁니다.

    * * *

    “어?”

    이제 막 아침 식사를 마치고, 프란츠와 정원을 산책하던 제라니아는 멀찍이 서서 철창으로 된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안으로 들어오는 인물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제라니아에게 프란츠가 물었다.

    “왜 그럽니까?”

    “아니…. 왠지 낯이 익어서요.”

    청년은 번듯하게 깔린 하얀 길을 바쁘게 걸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제라니아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맑은 푸른색의 눈동자가 제라니아를 발견하고 살며시 깜빡거렸다.

    “제라니아?”

    듣기 좋은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는 이를 제라니아는 긴가민가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가 길을 벗어나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와 제라니아의 앞에 섰다.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리는 얼굴이었지만 전체적으로 프란츠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프란츠는 균열 없이 매끈한 도자기를 떠올리게 한다면 이쪽은 물기를 머금은 아침 이슬을 떠올리게 했다.

    키도 무척 컸는데, 프란츠와 비슷할 정도의 장신이었다. 청년이 놀리듯이 말했다.

    “왜 그런 표정이야. 하여간 변한 게 없구나.”

    “누구….”

    “나, 리암이야.”

    “뭐? 네가 리암이라고!?”

    깜짝 놀라 소리치는 제라니아에게 리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라니아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리암을 쭉 훑어보고 감상을 읊었다.

    “너 진짜 많이 컸다.”

    “오랜만에 만나서 할 말이 그뿐이야? 넌 왜 여기…. 아, 잠깐만. 그럼 혹시 이분이.”

    “왕세자 전하야.”

    청년이 즉시 모자를 벗고 예를 갖추었다.

    “안녕하십니까, 전하. 리암 그라시아라고 합니다.”

    “프란츠 리나엔입니다.”

    절도 있게 인사를 건네는 청년의 옆구리에는 검이 매달려 있었다. 프란츠는 청년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그라시아 공작의 외동아들이자 유일무이한 후계자. 젊었을 적의 공작을 쏙 빼닮은 얼굴과 더불어 사교계에 거의 얼굴을 비추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라시아 공작가는 원체 타인과 크게 교류하지 않는 이들이니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아침 댓바람부터 남의 영지에 찾아오다니.

    서부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프란츠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성을 힐끔 쳐다보던 리암이 정중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지금 제가 급한 볼일이 있어서, 이만 물러가도 괜찮겠습니까.”

    “…그러십시오.”

    “감사합니다.”

    곧바로 돌아선 그가 바람같이 걸어 사라졌다. 묘하게 초조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무슨 일일까 싶어 어리둥절한 얼굴로 제라니아는 리암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주방에 식사를 더 준비하라고 해야겠네요.”

    이 시간에 도착했다면 분명 아무것도 안 먹었겠지. 리암을 따라 제라니아는 성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곧바로 보이는 집사 중 한 명을 붙잡아 지시한 뒤, 멀어지는 집사를 보고 있는 제라니아의 옆으로 프란츠가 슬쩍 다가왔다.

    “친합니까?”

    “어릴 때 몇 번 봤어요. 마지막으로 본 건 5년 전이네요.”

    리암의 나이 열여섯, 제라니아의 나이 열아홉일 때였다.

    “그런데 알아보지 못했단 말입니까?”

    “저렇게 키가 컸을 줄 몰랐는걸요. 인상도 완전 달라졌다고요.”

    키도 키지만 얼굴 인상도 많이 달라졌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는 볼살이 아직 다 빠지지 않았을 때였다. 그때의 리암은 앳된 느낌이 강했다면 지금은 한층 단단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쟤가 엔간해선 영지 밖으로 나올 성격은 아니거든요.”

    여유로워 보이지만 까탈스럽고 섬세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다. 어릴 때는 덕분에 제법 많이 싸우기도 했다.

    제라니아는 프란츠를 올려다보았다.

    “일단 응접실에 가서 기다려보는 게 낫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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