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왕세자비의 사정-22화 (23/171)
  • 제22화. 축제

    “전하도 잘 어울리세요. 좀 더워 보이기는 하지만요.”

    그는 새까만 무늬가 들어간 새하얀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팔다리를 빈틈없이 휘감고 있었다. 새까만 선을 따라 하얀 점들이 마치 은하수를 박아 넣은 듯 반짝거렸다.

    팔이 드러나는 원피스를 입고 있는 제라니아의 차림새와는 여러모로 대조되었다.

    “본디 더위를 잘 타지 않아서요.”

    “부럽다…. 저는 더우면 몸이 못 버티더라고요. 차라리 추운 게 나을 것 같아요.”

    또랑또랑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제라니아를 보며 프란츠는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습니까.”

    느긋한 어조로 대꾸하는 프란츠의 얼굴에서는 땀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저것도 체질인가. 조각상을 연상시키는 반듯한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라니아는 프란츠가 제 쪽을 돌아보자 후다닥 고개를 돌렸다.

    산책을 끝내고, 두 사람은 본인들이 짐을 풀어둔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상자를 발견하고 제라니아는 눈을 반짝였다.

    박스를 뒤적거리던 제라니아가 문을 닫고 들어온 프란츠를 등지고 넌지시 질문했다.

    “맞다, 여기 얼마나 계실 거예요?”

    “일주일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쯤이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내부 기강을 제대로 잡아놨겠지. 프란츠의 대답에 제라니아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저랑 사흘 뒤에 열리는 축제에 가실래요?”

    “축제…에 말입니까?”

    “네. 성에 살 땐 매년 갔었거든요. 수도에 간 뒤로는 오가기가 번거로워서 참석을 안 하게 됐지만.”

    프란츠는 고민했다. 축제라.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눈에 띄지 않습니까.”

    프란츠는 난감한 얼굴로 제라니아를 쳐다보았다. 제라니아도 문제였지만, 파티장에 홀로 서 있어도 시선을 한 몸에 받을 만큼 자신은 눈에 띄었다. 겸손을 떨고자 해도 주변에서 알아서 칭송을 해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제라니아는 문제없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그러니까 변장을 해야죠.”

    “…변장?”

    “네.”

    박스에서 새까만 뭉치를 집어 든 제라니아가 싱긋 웃었다. 이제까지 중 제일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남자를 향해 제라니아는 밝게 소리쳤다.

    “변장이요!”

    * * *

    데브론 영지에서는 매년 5월 말마다 밀의 수확을 기념하는 축제를 연다.

    왕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토지와 더불어, 사계절의 영향을 가장 덜 받는 지역인 만큼 데브론에는 자연스럽게 곡창지대가 자리 잡았다. 센즈 강을 끼고 있어 수산물 역시 풍부했고, 각종 야채나 과일도 무럭무럭 자랐다.

    신의 축복이 내린 땅이라는 이명답게, 데브론 영지민들은 신앙심이 깊었다. 소프람에 자리한 신전은 대신전 산드리아를 제외하고 왕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데브론 영지를 다스리는 바이첸 공작가는 매년 영지에 흩어져 있는 신전들과 협업해 밀의 수확 시기마다 축제를 열었다.

    데브론 영지의 중심에 자리한 도시, 소프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할 일을 마친 영지민들은 저녁이 다가오자 자연스럽게 도시의 외곽에 자리한 커다란 광장으로 향했다. 축제를 맞아 광장으로 가는 길에는 각종 가판대가 세워져 있었고, 중간중간 순찰을 도는 병사들도 보였다. 그들의 손에도 하나씩 먹거리가 들려 있었지만.

    광장에 다다르면 그 한가운데에 자리한 쇠로 만들어진 널찍한 궤가 보였다. 사람들은 그 안에 나무토막과 더불어 알맹이를 벗겨낸 겨들을 모아 주섬주섬 쌓았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기 시작하자 광장 부근은 온갖 인파로 북적거렸다. 가족, 연인, 그도 아니면 친구.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이번에도 무사히 농사를 마무리했음을 자축했다.

    가판대에서는 여러 가지 음식들을 팔았다. 개중 농민들에게 가장 인기를 끄는 건, 다진 고기와 야채를 빵 사이에 끼워 만드는 크로테라 불리는 음식이었다.

    “어서 오십쇼!”

    주인은 반갑게 손님을 맞았다. 멀대같이 큰 새까만 머리카락의 남자와 차분한 인상의 여자가 가판대 앞에 서 있었다.

    남자 쪽은 체격이 좋은 걸 보니 용병인가. 앞머리를 가리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크로테 두 개만 주실래요?”

    헤실 웃는 얼굴로 여자가 돈을 내밀었다. 수수해 보였지만 웃는 얼굴이 유독 시선이 가는 상대였다. 저도 모르게 여인을 바라보고 있자, 뒤에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느껴졌다.

    히익, 속으로 한숨을 집어삼키며 주인은 재빨리 크로테 두 개를 만들어 그들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십쇼!”

    크로테를 받아 들고 꾸벅 인사한 뒤 걸어가는 여자의 뒤를 남자가 뒤따랐다.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커플을 뒤로한 채 주인은 다음 손님을 맞았다.

    “자, 드세요.”

    제라니아가 들고 있던 크로테 중 하나를 프란츠에게 내밀었다. 커다란 나뭇잎으로 감싸진 빵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던 프란츠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나뭇잎도 먹는 겁니까?”

    “아니요. 뜨거워서 그래요.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거든요.”

    멀뚱히 그것을 받아 든 프란츠를 뒤로한 채 제라니아는 크로테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삭한 채소와 함께 다진 고기가 매콤한 소스와 어우러져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표정이 밝아지는 제라니아를 따라 프란츠 역시도 살짝 가발을 걷어내고, 조심스럽게 크로테를 먹었다.

    제라니아가 조마조마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떠세요.”

    “괜찮군요.”

    별다른 거부감 없이 마저 먹기 시작하는 프란츠를 보며 제라니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좋아한다지만, 평생 왕궁에서 좋은 것만 먹던 분의 입맛에 맞을지는 걱정스러웠는데 다행이었다.

    한가로이 길을 걸어가는 둘의 주변으로 인파가 붐볐다. 대체로 제라니아보다는 크고, 프란츠보다는 작았다.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을 반주 삼아 제라니아는 가볍게 음을 흥얼거렸다.

    “노래입니까?”

    어느새 크로테를 다 먹은 프란츠가 그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걸었다.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노래라기엔 좀 단순한데…. 일종의 노동요 비슷한 거랄까요.”

    농사도 그렇지만, 고된 일을 잊기 위해 농민들은 일을 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가락을 알아들었는지 지나가던 사람들 중 호응해주는 이들도 간혹 있었다.

    그런 이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며 제라니아는 깡충깡충 뛰어갔다. 춤을 출 때보다도 훨씬 경쾌하게.

    제라니아의 뒤를 따라가며 프란츠는 의아한 눈빛을 했다.

    “그런 건 어떻게 아는 겁니까.”

    “말씀드렸잖아요. 매번 축제에 왔었다고.”

    축제의 밤이 무르익으면, 커다란 장작불을 중심에 두고 다 같이 노래를 부른다. 노래의 종류는 여러 가지로, 지역마다 달랐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도시 소프람에서도 몇 가지 민요가 유명했다.

    한 번 들은 것은 잊지 않는 만큼, 어렸던 제라니아는 그들을 따라 노래를 부르곤 했다. 어릴 때는 제법 똘똘하다고 칭찬도 받았던 것 같은데.

    “보나 마나 몰래 나왔겠군요.”

    딱 보기에도, 공작 부부가 그런 걸 허락했을 것 같지 않았다.

    “비밀로 해주세요.”

    제라니아가 입가에 검지를 대고 쉿, 소리를 냈다. 부드러운 미소가 봄바람처럼 그 위에 머물렀다 사라졌다.

    “사실 가을에 열리는 축제가 더 유명한데, 지금은 늦봄이라….”

    “압니다. 술이 유명하다죠.”

    “네. 아버님이 공작이 되고 나신 후에 한층 더 규모가 커졌다고 들었어요.”

    제라니아는 멋쩍게 웃었다. 바이첸 공작이 주당이라는 사실은 왕국에서도 꽤 유명했다. 오죽하면 뇌물로 들어온 금은 마다해도 좋은 술은 3초쯤 고민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겠는가.

    한참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그들은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었다. 가끔씩 제라니아의 주도하에 음식이나 음료를 사기도 했다. 소프람에는 크로테만이 아니라 다른 먹거리도 넘쳐났다. 괜히 식도락의 중심지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제라니아가 곡주를 살 때는 프란츠도 조금 놀랐지만, 한 잔 정도는 괜찮다며 제라니아는 웃었다.

    그렇게 한참 걸어 다니던 두 사람은 드디어 광장으로 들어섰다. 이미 날이 어둑해져 사람들이 궤 안에 쌓아둔 장작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화르르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이 멍이 들듯 보랏빛으로 검어지는 하늘에 닿을 것처럼 높이 치솟았다.

    둘은 장작불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풀밭 위에 자리를 잡았다. 봉긋 솟아 있는 언덕 위로 커다란 나무들이 그 가지를 드리웠다. 그늘 아래에 앉으니 어둠 속에 모습이 가려졌다. 제라니아가 웃으며 프란츠를 돌아보았다.

    “보세요. 안 들켰죠?”

    “다행입니다.”

    호위도 없이 나온 터라 들키면 곤란했다. 다행히도 제라니아는 이곳의 분위기에 익숙했고, 프란츠는 연기에 익숙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에 스며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가발의 위치를 살짝 고정하자 얼굴이 살짝 드러났다. 푸른 눈이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다. 어렴풋이 윤곽을 보이는 뚜렷한 이목구비를 보며 제라니아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씌우고도 생각했지만, 전…. 프란츠랑 그 머리는 정말 안 어울리네요.”

    처음 씌워놓고도 어찌나 웃겼던지. 프란츠가 그냥 웃으라고 해준 덕분에 실컷 웃었다. 그럼에도 잘생겼다는 게 신기했다. 이게 외모의 힘인 걸까.

    단정하게 내려온 일자 앞머리를 프란츠가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여상한 태도로 제라니아를 마주 보던 그가 살며시 제라니아에게로 손을 뻗었다. 제라니아의 녹색 눈동자가 깜빡, 깜빡거렸다.

    그 순간, 광장에서 요란하게 터져 나오는 박수 소리에 두 사람은 앞을 돌아보았다. 류트를 들고 장작불 근처에 앉은 이가 천천히 현을 뜯기 시작했다. 흥겨운 선율이 광장에 파문을 일으켰다.

    사람들이 유쾌하게 웃으며 하나둘씩 입을 열었다. 곡조를 따라 노랫소리가 잔잔하게 광장 너머로 퍼져나갔다.

    그 광경을 망연히 지켜보던 제라니아는 제 머리카락에 닿는 손길에 살짝 고개를 돌렸다. 프란츠의 곧고 긴 손가락에 나뭇잎이 들려 있었다. 떼어주려고 했다며 나뭇잎을 살랑살랑 흔드는 프란츠를 향해, 제라니아는 불쑥 질문했다.

    “재미있으셨어요?”

    프란츠의 침묵이 길어졌다. 둘러댈 말을 찾고자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정의하기가 어려워서.

    다른 상대에게라면 적당히 좋았다고 말하며 웃는 얼굴을 보이면 끝날 일을 왜 이리 귀찮게 돌아가는 걸까.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프란츠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예.”

    이렇게 누군가의 손에 끌려다닌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프란츠는 시끄러운 장소를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사람들의 떠드는 목소리에 둘러싸여 있으면 절로 짜증이 치밀었다.

    그러고 보면, 제라니아와 함께 있을 때는 유독 주변의 소리가 옅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하게 되어서일까.

    오늘만 해도 자신을 끌고 가는 상대의 손을 잘라버리고 싶다거나, 핑계를 대고 도망치고 싶다거나 하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만 봐도 즐거웠다 표현할 만하지 않을까. 그렇게 판단했다.

    프란츠의 혼란스러움을 눈치챈 건지 제라니아는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저 멀리 타오르는 불꽃이 제라니아의 왼쪽 뺨에 닿아 어둠을 밀어냈다. 주홍색 불빛 탓인지 유독 발그레해 보이는 뺨을 지그시 쳐다보던 프란츠가 입을 열었다.

    “축제에 오자고 한 이유가 있습니까?”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즐기고자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왔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제라니아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전하께 제가 보는 세계를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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