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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21화 (22/171)

제21화. 한가로운 한때

유능하지만 묘하게 단순한 제 부하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린 뒤 프란츠는 거울을 덮었다. 고개를 들자, 흥미로워 보이는 무언가를 살피는 듯한 시선을 한 아이작과 시선을 마주쳤다.

“뭡니까?”

“아니, 말투가 확 바뀌셔서 말입니다. 순간 다른 사람을 보는 줄 알았지 뭡니까.”

자신과 말할 때는 부드럽기만 하던 음성이 순식간에 건조하고 메마른 음성으로 변하는 걸 듣는 순간, 아이작은 예상보다 더 그의 성격이 만만치 않을 것을 직감했다.

사교적이고 능청맞은 얼굴을 지워내니 잘 만들어진 인형을 떠올리게 하는 무표정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하얀 피부와 어우러져 묘하게 생기가 없어 보였다.

섬뜩하다면 섬뜩했다. 한창 활짝 피어날 나이의 젊은이에게 저런 얼굴이 가당키나 한가.

그런 그를 보니 피로연에서 사근사근한 낯으로 그의 팔을 붙들던 제 딸의 모습이 같이 떠올랐다. 겉가죽에 혹하는 성격은 절대 아닌 만큼, 분명 이걸 다 알면서도 결혼을 승낙했을 것이다. 아이작은 한탄했다.

제라니아, 대체 무슨 생각이냐.

“전하는 참 재미있는 분이로군요. 여러모로 국왕 폐하를 떠올리게 합니다.”

심란함을 갈무리하며 농담을 섞은 진담을 꺼내자, 프란츠가 잠시 침묵했다.

“…내 어디에서 말입니까?”

“바로 그런 태도에서 말이죠.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프란츠의 얼굴에 질색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아이작은 개의치 않았다. 국왕한테도 직언을 하는 자신이 제 자식뻘의 애송이를 겁낼 게 뭐란 말인가. 국왕은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칼 맞을 각오로 이야기해야 할 때도 있었다.

목에 칼을 들이밀 때는 어찌나 섬뜩하던지, 하하.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제 아들이자 후계자인 프레드릭의 얼굴이 뇌리에 새록새록 떠올랐다.

프레드릭은 진중한 편이지만 인내심이 길지 않았고, 야심도 상당했다. 반면 왕세자는 싱글싱글 웃고 있지만 발톱을 숨긴 호랑이에 가까웠다.

아마 즉위하면 곧바로 발톱을 드러내지 않을까 싶은데, 제가 은퇴한 뒤 과연 그 둘이 마찰 없이 잘 지낼 수 있을까 염려스러웠다. 제라니아가 어떻게든 하지 않을까 싶기는 하지만.

“하기사 위법을 운운하는 것도 웃기긴 하군요. 왕실인데 말이죠.”

아이작은 거울로 시선을 보냈다. 이 나라에서 신전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마법을 합법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건 왕실밖에 없었다.

물론 암암리에 마법사라든가 마법이 걸린 물건을 빼돌리는 이들이 있기는 했다. 걸리면 감옥행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모든 일에 가장 우선되는 건 어명이니까요.”

이론적으로는 국법이 더 위에 있다지만, 현실은 그랬다.

문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두 사람의 얼굴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여보, 아직 얘기 다 안 끝났어요?”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본 아이작이 프란츠를 돌아보았다.

“제 처입니다.”

“우선은 일어나죠.”

대화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지긴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프란츠를 따라 아이작 역시도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고 나가자 연하늘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금빛 머리카락의 중년 여인이 서 있었다. 꽤 장신인 공작과 달리 키가 큰 편은 아니었다.

프란츠의 뒤에서 나타난 남편을 본 티엘라가 도끼눈을 떴다.

“당신은 신혼을 즐기기도 바쁠 사람을 붙잡고 뭘 하는 거예요!?”

“중요한 국정 문제를 논하고 있었소.”

순식간에 표정을 갈무리한 아이작이 근엄한 얼굴을 선보이며 아내를 달랬다. 티엘라가 남편을 향해 눈을 흘겼다.

“어휴, 주책이야. 신혼여행 정도는 느긋하게 쉬시게 둬야죠! 하여간 나이가 들어서는 꼬장꼬장해져 가지고….”

마지막 문장을 작게 중얼거린 건 남편의 체면을 구기지 않기 위한 배려였다. 공작 부인이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전하께서 부디 편안하게 쉬다 가시길 바랍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가볍게 손을 붙잡고 그 손등에 입을 맞추며, 프란츠는 눈을 곱게 휘어 웃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가 어리니 마치 개화한 꽃처럼 눈이 부셨다. 사위의 미모가 마음에 쏙 들었는지 티엘라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폈다.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제라…. 비전하께서는 날이 좋다고 밖으로 햇볕을 쬐러 나가셨답니다. 그…. 혼자는 아니지만요.”

어디서 데려왔는지 모를 꼬맹이를 데리고 나갔다는 말까지는 덧붙일 수 없어, 티엘라는 애써 말을 얼버무렸다. 못마땅한 기색을 아주 숨기지는 못하는 부인의 태도에서 프란츠는 대강의 정황을 짐작했다. 무엇을 더 묻기보다, 산뜻한 미소를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서, 비는 어디로 갔습니까.”

* * *

성은 그 크기만큼이나, 부지 역시 무척 넓었다. 잘 가꾸어진 예쁜 정원과 조경수들, 구석에는 마구간을 포함해 동물들을 기르는 축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거기서 조금 더 걸어가면, 하인들이 머무는 별채들이 자리했다. 간편하게 차려입은 수많은 하인들이 부지를 오가며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하늘 위에 비스듬히 기울어진 태양이 뾰족한 성의 꼭대기를 지나, 저 너머의 산이 있는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다닌 길이니만큼 제라니아는 막힘없이 풀밭 위를 걸어갔다. 새틴 원단으로 된 크림색의 원피스를 입고, 가슴께에는 새하얀 꽃을 연상시키는 코르사쥬를 달고 있었다. 커다란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평소와는 달리 머리를 내려 묶고 있어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그 뒤를 새까만 머리카락의 소년이 따라갔다. 베이지색의 상의와 갈색의 긴 바지, 짧게 잘라낸 머리카락이 동그란 두상을 드러냈다. 비쩍 마른 몸이 길쭉한 팔다리와 어우러져 한층 더 안타까워 보였다.

사뿐한 걸음걸이로 걸어가던 제라니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색한지 쭈뼛쭈뼛 저를 따라오는 핀에게 그는 웃으며 손짓했다.

“조금 더 가까이서 걸어도 돼.”

“안 돼요.”

“왜?”

“오, 옮을지도 모르니까.”

무엇이 옮는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오지 않는다면 제가 가면 그만이었다. 제라니아는 소년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은 핀의 앞에 선 제라니아가 제 모자를 벗어 아이에게 씌워주었다.

“옮지 않아. 그게 무엇이든.”

단호한 음성에도 핀은 말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조심히 손을 뻗어 모자를 만지작거리는 아이의 얼굴에 많은 상념이 어렸다.

새삼 제라니아는 아이가 참 작다는 생각을 했다. 밝은 햇살 아래서 본 아이는 저보다도 작았다. 깡마르고 왜소한 몸과 창백한 피부가 유독 눈에 띄었다.

아이는 자신의 나이가 몇 살인지도 몰랐지만, 발육 상태로 보면 많아도 열둘을 넘길 것 같지는 않았다.

어제 보니까 기억력이 꽤 비상하던데, 사환 일 정도는 할 만하지 않을까.

“뭐 하고 싶은 건 없고?”

“…그냥, 잘 모르겠어요.”

하긴, 노예였다가 도망친 아이한테 이런 질문을 해봐야 제대로 대답하기 어려울 터다. 이걸 어쩌나. 고민하는 제라니아에게 핀이 슬쩍 눈치를 보다가 질문했다.

“이름이 제라니아예요?”

“응. 제라니아 바이첸. 아, 이젠 제라니아 리나엔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인 소년에게 제라니아는 제 신분을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에 빠졌다. 이 나라를 다스리는 게 리나엔 왕가라는 사실은 알까?

“아무튼 나는 결혼한 몸이고, 남편이 있거든. 근데 내가 사는 곳에 널 데려가기는 좀 어려울 것 같아서.”

“아….”

“여기는 우리 본가야. 여기서 일하고 싶다면 그래도 되고, 수도 쪽에 추천장을 써줄 수도 있어.”

핀의 얼굴에 실망스러운 기색이 비쳤다.

“절 데려가 주시는 게 아니었나요?”

“그러기 어려운 장소라.”

왕궁에 데려간다면 시동으로 둬야 할 텐데, 왕궁에서 일하는 이들이라면 그 신분이 최소 귀족이어야 했다. 무엇보다 왕궁에 입궐한다는 건 그 자체로 권력다툼에 엮이게 된다는 뜻이었다. 굳이 그런 곳에 아이를 데려가도 될까. 그런 고민도 들었다.

그렇다고 이제 막 노예에서 도망친 아이에게 신분의 벽을 주지시키기도 좀 그랬는지라, 제라니아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러고 보면 메리가 딱 이 아이 정도의 나이였을 텐데.

“하고 싶은 게 없다면, 공부를 해볼래? 글자를 배운다든가.”

“글자요?”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좋아 보이니 금방 익히지 않을까 싶었다.

아이를 아주 다른 곳으로 보내자니 노예인 것이 탄로 날 염려가 있었다. 법적으로 노예는 도망쳐서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되더라도 주인이 요청하면 다시 돌려주어야 했다.

소유주가 귀족 가문일 경우, 보통 낙인에는 그 가문의 상징이 들어간다. 그러나 아이의 몸에 찍혀 있는 낙인에 그려진 문양은 가문의 상징과는 거리가 멀었다.

뭔가 이상했다. 아이에게 찍혀 있는 낙인의 출처가 어딘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역시 수도로 데려가야 하나? 여기 두게 되더라도 어머니는 아이를 좋게 보지 않으실 게 뻔하니, 조셉한테 당부를 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서서 고민하는 제라니아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기 있었습니까.”

예상대로, 수려한 얼굴이 제라니아를 향해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금실처럼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제게로 쏟아지며 시야를 가뒀다. 부드럽게 제 양 뺨을 손으로 감싸는 남자를 멍하니 쳐다보던 제라니아가 입을 열었다.

“프란츠.”

프란츠는 천천히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핀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눈치를 보듯 눈을 굴리는 핀을 그제야 떠올리고 제라니아는 멋쩍게 말했다.

“산책은 그만해야겠다. 미안한데 먼저 돌아가 있을래? 이 사람이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핀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곧장 뒤돌아서 줄행랑을 쳤다. 쌩하니 달려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제라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렇게 기겁하죠? 무서운 걸 본 것처럼.”

“글쎄요.”

프란츠는 웃는 낯으로 말했다. 멀뚱히 서 있던 제라니아가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그의 옆으로 간 프란츠가 보폭을 맞춰 나란히 걸었다. 제라니아가 의아한 듯 말했다.

“아버님이랑은 이야기 잘 끝내셨어요?”

“나름대로는. 당신은 산책하고 있었습니까?”

“날이 좋잖아요. 책을 읽는 것도 좋겠지만, 이렇게 햇빛이 잘 드는 날은 드무니까요.”

바람이 살랑거리며 둘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차근히 발걸음을 옮기는 제라니아를 힐끔 돌아보며 프란츠는 조용히 말했다.

“그 아이를 왕궁에 데려가고 싶습니까?”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긴 하지만…. 법도상 안 되는 걸 아는걸요.”

“가능합니다.”

“정말요?”

“신분이야 마련하면 되니까요.”

방금 전의 소년이 그 건물에 살던 이들 중 유일한 생존자라면,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단서였다. 제라니아의 말을 들어보면 기억력이 무척 비상해 보인다고 했으니, 몇몇의 얼굴 정도는 기억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되나요? 위법 아니에요?”

“어느 귀족 집의 양자로 들어간 걸로 해두면 될 겁니다.”

족보를 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적당히 위협을 해두면 알아서 입을 다물 것이고. 서슴없는 대답에 제라니아는 그래도 되나 싶은 얼굴로 프란츠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따지면, 남의 소유일지 모르는 노예를 숨겨주는 것부터가 충분히 위법 아닙니까?”

“그건 그렇네요.”

제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무릎까지 내려와 나풀거리는 크림색 원피스에 시선을 둔 프란츠가 입을 열었다.

“그 옷은….”

“아, 이 옷 예쁘죠. 저도 좋아해요. 통풍도 잘되고. 더러워지지 않게 조심해야 하지만요.”

싱긋 웃으며 대답하는 제라니아에게 프란츠는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게 아니라,

“잘 어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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