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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20화 (21/171)
  • 제20화. 정답은 무엇일까

    확신 어린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이작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내걸었다.

    “그러셔야 할 겁니다. 이 결혼을 수락할 때, 제가 가장 먼저 말씀드렸던 것을 잊지 않으셨다면 말입니다.”

    ‘전하,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여식의 목숨을 지켜주시겠다고 말이죠. 그것만 약속해 주신다면 기꺼이 전하의 편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온화하던 시선은 순식간에 날카로운 창으로 벼려졌다. 올라가 있는 입꼬리와 달리 조금도 웃고 있지 않은 푸른 눈동자를 프란츠는 덤덤하게 응시했다.

    바이첸 공작가를 등에 업으면 든든할 것이다. 왕위 계승에서 벌어지는 마찰 역시 줄겠지. 그렇지만 굳이 얻어야만 하는 패는 아니었다.

    약속까지 갈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자신에게 필요한 건 공작가가 아닌, 제라니아 바이첸이었으니까.

    ‘안녕하세요. 제라니아 바이첸입니다. 프란츠 리나엔 전하. 왕세자 전하라고 불러드려야 맞을까요?’

    처음 만났을 때, 제 이름을 부르며 올곧게 자신을 직시하던 그 눈동자를 봤을 때부터. 그때 그는 마치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무언가를 발견한 것만 같은 기이한 확신을 느꼈다.

    ‘…마음대로 부르십시오.’

    그래서 그는 제라니아 바이첸을 선택했다.

    “그나저나 이런 얘기를 제게 하시는 건, 국왕 폐하의 뜻입니까? 그간 제게 언질조차 없으셨던 분이?”

    내심 서운한지 아이작이 입매를 샐쭉 말아 내렸다. 물론 국왕의 뜻이 아니라면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낼 이유가 없었다. 그도 알고, 자신도 아는 사실을 왜 굳이 묻는 걸까.

    의외롭다는 시선이 아이작을 향했다.

    “서운합니까?”

    “아주 조금?”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는 대신 프란츠는 다른 말을 내밀었다.

    “궁에서는 아무도 믿지 말라. 그런 격언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한테나 쉽게 얘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파란만장한 왕궁의 분위기를 한층 더 험악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라고는 하지만, 사실 프란츠도 국왕이 왜 이런 사실을 재상인 아이작이 아니라 자신에게 먼저 이야기한 건지가 의문이긴 했다.

    굳이 따지면 약점을 드러낸 꼴이 아닌가. 그것도 왕이 죽으면, 당장 그 자리를 차지할 만한 자격이 있는 자에게.

    아이작이 프란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법 탁한 회색빛이 섞여든 푸른색 눈동자에는 그간의 연륜이 묻어났다. 그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게 정론이긴 합니다. 허나, 전하. 정론을 이야기하는 것과 감정적인 서운함은 다른 문제이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그는 국왕의 오랜 충신이었다. 신하보다야 혈육을 더 우선시할 수는 있다지만, 이런 중요한 얘기는 본인 입으로 직접 해줄 법도 하지 않나.

    이유를 알겠기에 더 기가 막혔다. 잔소리는 듣기 싫다 이거시군요.

    수도로 올라가면 진짜 알현부터 해야겠다. 소소한 다짐과 함께 늘어놓을 말들을 정리하며 아이작은 재차 덧붙였다.

    “사람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이성 따라만 가는 게 아니니까요.”

    ‘전하도 참. 그럴 때는 그냥 당신 말이 다 맞다! 이러셨어야죠. 왜 굳이 반문을 하십니까? 자고로 부부 관계에선 적당히 둘러댈 줄도 아셔야 하는 법이라고요.’

    “…그렇기는 하지요.”

    머릿속에 떠오른 티레인의 음성을 휘휘 저어 날려 버리면서도 프란츠는 찜찜함을 아주 다 버리지는 못했다.

    자신이 어찌해야 했을까.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것처럼 제라니아에게 눈웃음을 보이며 입에 발린 말로 그를 달래야 했을까.

    결국 내 마음대로 할 거면서?

    그런 식으로 굴어봐야 넘어갈 것 같지도 않았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라니아의 앞에서는 꾸며낸 자신을 딱히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별로 좋아하는 모습도 아닐뿐더러….

    ‘사실 서로 간에 예의만 차린다면 저는 지금의 왕자님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좀, 피곤하잖아요.’

    당신이 괜찮다고 했으니까. 이런 나라도.

    “그래서,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벌인 반역도들이 누군지 알아내는 데 협력하면 되는 겁니까?”

    “일단은. 어떻게든 단서를 찾고자 움직이고는 있지만, 내가 움직이는 건 아무래도 시선을 끌 수밖에 없더군요.”

    “하긴 전하야 뭐…. 국왕께서 전하께 가장 먼저 소식을 알렸다는 게 지금도 신기합니다.”

    프란츠 역시 그의 말에 동의했다. 침대에 앉아 제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국왕을 봤을 때, 처음에는 농담을 하나 싶었다. 그도 그럴 게 이야기를 꺼내는 국왕의 목소리부터가 진지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가 나한테 독을 먹이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러다 네 녀석이 즉위하는 걸 보기 전에 골로 가겠다.’

    누가 이런 심각한 얘기를 저토록 가벼운 말투로 시작한단 말인가.

    그것도 하필 자신에게.

    ‘왜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까?’

    설명을 들을수록 오리무중이었다. 머리 쓰는 것에 익숙하지도 않은 사람이라 그런지 누가 의심된다기보다는 직감적인 단서 위주가 많았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바이첸 공작한테도 얘기하지 않은 것 같았다. 국왕의 몸을 진찰하는 어의와 신관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른다. 물론 이야기를 들은 순간 그는 그 둘을 추궁하는 것에서부터 조사를 시작했다.

    아무튼 범인을 찾아내라는 어명과 함께 이야기는 마무리됐다. 왜 밀명을 내리는지는 이해했다. 국왕의 말대로라면 이건 심증일 뿐이다.

    독을 썼다는 증거는 일절 없었고, 이런 상태에서 문제를 발표해봤자 왕국에 혼란만 올 뿐이었다. 당장 국왕의 위세가 꺾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떤 반동분자들이 속출할지 알 수 없었다.

    프란츠는 감이라는 걸 믿지 않는 편이었으나, 국왕은 평생 자신의 몸을 단련해온 사람이다. 그런 그가 제 몸에 생기는 이상 신호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밀명을 내리는 상대가 자신인가.

    제가 그의 입장에서 믿을 만한 사람이어서? 자신을 왕세자로 임명한 건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데릭 리나엔의 결혼 발표 뒤 자신을 왕세자로 임명한 것부터가 그런 계산이 깔려 있다 생각했는데.

    무슨 꿍꿍이가 있어 이러는 걸까 싶어서 기어코 질문했더니, 왕은 되레 반문했다.

    ‘궁금한 거냐?’

    대답할 가치가 없는 말이었다. 입을 다물자 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넌 앞통수를 칠지언정 뒤에서 수작을 부리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웃는 낯으로 가만히 앉아 있던 프란츠의 눈동자가 왕의 다음 말에 버석하게 굳었다.

    ‘네 손으로 직접 날 끝장내고 싶을 테니, 다른 사람 손에 내가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겠지.’

    왕의 답변을 복기하던 프란츠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때였다.

    - 전하!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프란츠는 재빨리 제 주머니 쪽을 쳐다보았다. 아이작의 눈동자에 새파랗게 날이 섰다.

    “이게 무슨….”

    “잠시.”

    아이작에게 양해를 구하고 프란츠는 거울을 꺼내 들었다. 손바닥만 한 거울 안에 티레인의 얼굴이 떠 있었다. 영 떨떠름해 보이는 티레인의 표정을 본 프란츠가 가볍게 턱짓했다. 티레인이 붕대가 감긴 손으로 관자놀이를 긁적거렸다.

    - 어, 그…. 본거지를 찾기는 한 것 같습니다만. 얘네 아주 작정한 모양인데요.

    “무슨 일이지.”

    - 불을 질렀습니다.

    어젯밤 대화하던 도중, 티레인은 창밖으로 환하게 빛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저 멀리서 어둠을 집어삼키며 화려하게 타오르는 불꽃을 본 순간, 티레인은 왠지 모를 불길함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깨어 있던 기사들과 함께 포로들을 끌고 달려갔으나, 이미 건물은 반쯤 타오르고 있었다. 나무와 돌을 섞어 만든 건물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불길의 속도는 느린 편이었다. 새빨간 화마가 횃불처럼 밤을 비집고 맹렬히 사방으로 퍼져 나왔다.

    티레인은 밖에서 불을 끄기 위해 달려온 사람이 들고 있는 물동이를 빼앗았다. 그 물을 머리부터 뒤집어쓴 뒤, 입을 손수건으로 틀어막고 아직 타지 않은 건물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 다 타기 전에 어떻게든 건져낸 건 있습니다만….

    건물 내부에서 보았던 것들을 떠올리는 티레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건물 안에 들어서자마자, 탄내만큼이나 강렬한 혈향을 느꼈다. 사방이 시체였다. 바닥에, 벽에, 그도 아니면 탁자에, 죽은 이들의 주검이 널려 있었다. 대충 보아도 어린아이의 수가 좀 나이가 찬 이들보다 많았다.

    경악스러운 감정을 옆으로 밀어두고 티레인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주위를 깊게 살필 시간이 없어, 어떻게든 이 장소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만한 것들을 닥치는 대로 집었다. 화마가 자신을 덮치기 직전, 그것들을 끌어안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무모하군.”

    화상을 아주 피할 수는 없었는지, 티레인의 왼쪽 팔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양 손바닥과 손가락 역시 붕대로 돌돌 말려 있어 둔해 보였다.

    - 아니, 뭐….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능청맞게 굴면서도 묘하게 우직한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원래였다면 이런 잡일에 동원될 신분이 아닌데도.

    - 일단은 고아원으로 알려진 건물인 것 같긴 합니다. 원장이란 놈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고요. 사실 시체가 워낙 많아서 이 중 어디에 끼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찾아봐.”

    - 그러실 것 같아서, 이미 좀 찾아봤습니다. 아무 소득 없이 연락을 드릴 수는 없잖습니까.

    건물에 난 불을 끈 뒤 앞장서서 시체들을 뒤적거렸으나, 하나같이 새까맣게 타버려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하도 외진 곳이라 방화범을 본 목격자도 전무했다.

    그나마 덜 탄 시신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긴 했다. 다만 추정일 뿐 확실치는 않다 보니 티레인은 말을 아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았다.

    - 아, 그리고 사람들을 좀 탐문해 봤습니다만, 주변 지리를 참고했을 때 비전하께서 알려주신 곳이 이 건물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그 건물이 하루 만에 전소되었다. 프란츠가 제 턱을 붙잡고 중얼거렸다.

    “뭔가 있긴 하겠군.”

    - 어떻게 할까요?

    프란츠는 선뜻 대답했다.

    “붙잡은 놈들이 죽지 않게 신경 써라. 나머지의 입을 막으려고 할 가능성이 있다. 일단 그놈들을 데리고 칼리스토 성으로 오도록.”

    - 예.

    “꼬맹이도 데리고 올라가야 할 것 같군. 아무래도 수상쩍어.”

    - 꼬맹이를요? 왕궁은 귀족이 아니면 출입이 불가하잖습니까.

    프란츠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위조해.”

    - 알겠습니다.

    얌전히 수긍하는 티레인과 달리,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이작이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전하. 위법을 너무 당당하게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심지어 자신은 재상직을 맡은 이가 아닌가. 아무리 정치질에 온갖 불법이 오간다지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아이작이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쳐다보자, 프란츠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우린 이미 한 배를 탄 사이 아닙니까? 적당히 입 다물어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그야 그렇습니다만.”

    끄응, 팔짱을 끼고 아이작은 고민에 빠졌다. 아이작의 목소리를 들은 티레인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 아니, 잠깐만요. 옆에 누가 있습니까?

    “바이첸 공작.”

    - 예?! 저 지금 기밀 누설한 겁니까? 전하는 왜 말씀을 안 하시고!

    “방금 듣지 않았나. 한 배를 탄 사이라고.”

    그제야 티레인은 그가 제라니아와 결혼한 사이라는 사실을 재차 상기했다. 그럼 그럴 수 있지. 티레인은 바로 납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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