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당신을 선택한 이유
아이작은 멋쩍게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 아비로서 딸의 의사를 존중했을 뿐입니다.”
게다가 제라니아가 어디 반대한다고 들을 성격이던가.
제라니아가 한참 어릴 때, 인간관계에 관해 잔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신분이 비슷한 아이들이 제 주변에 그렇게도 많은데 어째서 자꾸만 평민 아이들과 어울리는 건지.
당시에 아이작은 그게 퍽 못마땅했었다. 제 자식들 중 제라니아한테만 은근히 소홀하게 구는 사용인들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뒤라 더 그랬다.
‘앞으로는 그런 애들이랑 어울리지 말거라. 자고로 사람은 어울리는 사람과 교류해야 하는 법이다.’
이 정도 말하면 잘 알아들을 줄 알았다. 다만 이 깜찍한 따님한테서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어째서요?’
웃는 얼굴로 공손하게 반문하는 제라니아에 아이작은 순간 얼이 빠졌다.
‘뭐?’
‘제가 누구를 사귀든 그건 제 의지예요. 어째서 아버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나요?’
또박또박 대답하는 작은 얼굴이 고집스레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그 후로 실랑이가 벌어졌고, 아이작은 자신이 좀 과민하게 반응했음을 인정했다. 애가 어찌나 말을 잘하는지 국왕 폐하와 대화할 때도 느끼지 않은 긴장감을 그때 느꼈다.
그렇지만 여기서 지고 들어가면 앞으로 비슷한 상황이 와도, 비슷한 결말이 날 게 분명했다.
‘잔말 말고 그 아이들과 연을 끊거라! 그렇지 않겠다면 넌 더 이상 내 딸이 아니다!’
그래도 좀 심하게 굴긴 했나? 강경한 어조로 대답하자 제라니아의 눈이 살짝 울렁거렸다.
‘…알겠어요.’
시무룩해진 제라니아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양심 한구석이 콕콕 찔려오는 것을 느꼈지만 그는 애써 무시했다.
그렇지만 그는 몰랐다. 제 딸이 마지막에 내놓은 대답의 의미를.
제라니아는 대화 직후, 곧바로 보석과 돈을 있는 대로 싸들고 소위 말하는 가출을 했다. 머리는 어찌나 잘 굴렸는지 가출한답시고 정한 목적지가 하필 제가 쉬이 관여할 수 없는 장소였다.
마차를 잡아타고 홀랑 날아간 걸 나중에서야 알고 쫓아갔지만, 그때는 제라니아가 이미 영지를 벗어난 후였다.
덕분에 결혼하고 난 뒤로 처음으로 아내에게 멱살을 잡혔다. 자식 문제로 분노한 어머니란 더없이 강력한 존재라는 것을 절절하게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당신 제정신이에요?! 어떻게 애가 영지 밖으로까지 가출할 동안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아니, 티엘라. 그게…….’
‘잔말 말고 당장 애를 찾아와요. 그 전까지 내 얼굴 볼 생각 하지 말고요!’
서슬 퍼런 아내의 일갈에 아이작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하고 내쫓겼다. 다행히도 사건은 잘 마무리되었으나, 얌전한 얼굴을 한 딸에게서 공작은 드높은 자립심과 쇠심줄처럼 질긴 고집을 엿보았다.
그때 제라니아의 나이는 고작 열둘이었다.
남자였다면 분명 크게 될 성격이라 말하며 껄껄 웃고 넘겼을 것을, 여자라는 점이 아이작은 못내 마음에 걸렸다.
제라니아는 지나치게 똑똑했다. 그에게는 아비인 저조차 말을 잃게 만드는 영민함이 있었다. 그래서 혼처를 고를 때 유독 더 신중했다. 사내라도 장자가 아닌 이상 분란의 씨앗이 될 뿐인데, 여인이라면 오죽하겠나.
그렇기에 일부러 급이 좀 낮은 집안을 골랐다. 그 등 뒤에 있는 위세를 알아, 제라니아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을 법한 집안으로 말이다. 적당히 눈치가 있는 건 물론, 공작가에 설설 기더라도 집안만은 남들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번듯해야 했다.
때문에 왕실은 아예 고려하지도 않았다. 솔직하게 말해서 아이작은 휴스타인 공작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난장판에 외동딸을 들이밀 생각을 하다니.
데릭 왕자가 셀리나를 끔찍하게 챙긴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으나, 그렇더라도 위험한 건 매한가지였다.
그런데 하필 왕실에서 혼담이 들어오다니. 심지어 제가 왕족 중에서도 가장 꺼려하던 인간한테서.
차분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맑은 푸른색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아이작은 튀어나오는 한숨을 애써 억눌렀다.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이라고 불리는 만큼 왕세자의 처신은 완벽했다.
무슨 말을 들어도 늘 웃는 낯에, 친근하게 굴면서도 확실하게 선을 그어 문제가 생길 여지를 방지했다. 그럼에도 어딘가 무심한 구석이 있는 것도 눈이 가는 요소 중 하나였다.
그래서 더 껄끄러웠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다. 특히 왕세자처럼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은 인물일수록 그 속내가 어떨지 짐작하기란 어려웠다. 그걸 아이작은 그와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느꼈다.
왕세자는 늘 빈틈없는 미소를 걸고 있지만 눈만은 아니었다. 아이작은 이 어린 왕세자의 새파란 눈동자에서 무저갱을 엿봤다.
능글맞고 차분한 겉모습을 싹 들어내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만 같은, 세크렛의 혼돈조차 뭉개버릴 것 같은 깊고 어두운 본질.
“나와 사돈이 된 걸 후회합니까?”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가 바이첸 공작을 향했다.
정치의 중심에 자리한 사람치고, 그는 소위 말하는 정치질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왕의 무조건적인 신뢰는 그런 그의 청렴함에 기인하기도 했다.
“솔직한 답변을 원하십니까?”
“가급적.”
“줄은 잘 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솔직한 답변에 프란츠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법 허물없는 표정에 아이작의 푸른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청량하다면 청량한 미소인데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왜 비를 선택했냐고 물었죠.”
꽤 너그러운 어투로 말을 꺼내는 프란츠의 목소리에 아이작은 신경을 집중했다. 손끝으로 제 턱을 짚으며 프란츠는 마음 한구석에 처박아둔 기억을 가볍게 털어 끄집어냈다.
“계기는…. 그래, 공작의 한마디였습니다.”
“예?”
“파티에서 푸념을 늘어놓지 않았습니까.”
프란츠는 싱긋 웃으며 정황을 설명했고, 그에 귀를 기울이던 아이작의 반듯한 미간이 점차 구겨지기 시작했다.
왕세자는 몇 달 전에 자신이 참석했던 파티에 대해 이야기했다.
기억난다. 그때 자신은 제법 얼큰하게 취해 있었고, 앞에는 친구인지 악연인지 모를 징글맞은 인간이 서 있었다. 그래도 이런 내밀한 이야기를 나눌 만한 상대로는 딱인지라, 평소보다 조금 말이 많아지기는 했었다.
유리가 자신을 놀리듯이 말했다.
‘듣자 하니 맞선이 또 날아갔다지? 보데로아의 어린 애송이가 입을 털고 다닌다더군.’
‘하하. 무슨 소문이 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차인 놈이 주절거려 봐야 추하기만 할 뿐이지.’
아직 젊어서 그런가, 권력 무서운 줄 모르고. 그놈을 어떻게 조질지 고민하면서도 인자한 미소를 내보이는 걸 잊지 않았다.
역사에 남지 않는 암살자야말로 위대하다지 않던가. 제가 손댔단 흔적을 남기지 않더라도 사람 한둘 매장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 제 속내를 다 안다는 듯이 유리는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술이 든 잔을 흔들었다.
‘제라니아는 여전한가 보군.’
‘농담이 아닐세. 하여간, 한 번을 지려 들질 않네. 맞선도 한 번 만난 상대는 두 번 보려 하질 않으니.’
‘그 영민한 아이한테 어중간한 놈들만 붙이려고 드니 당연히 파토가 나지. 알면서 뭘 묻나.’
쯧쯧 혀를 차며 훈계를 늘어놓는 목소리에 불퉁하게 대답했다.
‘자네까지 이러긴가? 내 참. 칼리아도 그렇고, 도대체가 왜들 이리 결혼이 싫다고 난리인지 원.’
‘딱 봐도 자네를 닮은 게지. 실제로 자네도 결혼을 좀 늦게 하지 않았나.’
‘사돈 남 말 하는군.’
그도 서른쯤 되어서야 결혼하지 않았던가. 일찍 상처한 뒤로 더는 아내를 두지 않았을 뿐. 눈을 흘기자 유리는 낄낄 웃으며 그를 놀렸다. 하여간 나이를 먹으면 진중해져야 하거늘, 어째 반대로 가는 것 같았다.
‘날 걱정할 시간에 자네나 걱정하게. 리암도 이제 스무 살이 넘은 걸로 아는데, 슬슬 혼처를 알아봐야 하지 않겠나.’
‘글쎄. 요즘 속을 좀 썩여서. 여차하면 나랑 사돈이나 되겠나?’
장난스레 건네진 제안에 설레설레 손을 내저었다.
‘예끼. 자네랑 사돈이라니, 징그러운 소리 하지 좀 말게나. 우린 그냥 이렇게 술잔이나 가끔 기울이는 사이가 딱일세.’
진저리를 치며 들고 있던 잔을 내밀었다.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고, 그는 목을 축였다.
한숨과 함께 삼킨 술은 언제나와 같이 달았다.
“그…그때 했던 얘기를 들으셨단 말입니까.”
황망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아이작을 향해 프란츠는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보는 듯한 그 시선에 아이작의 미간에 와락 금이 갔다.
“맞습니다. 그래서 흥미가 생겼죠. 그대와 같은 이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한다는 인물이 과연 누군지 말입니다.”
아이작은 머리를 부여잡고 싶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이 사태가 어쩌다 나온 제 말실수에서 비롯되었다 이거였다. 제라니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윙윙 울렸다.
‘술 좀 적당히 드세요. 아버님은 술을 드시면 꼭 한두 마디가 많아지시잖아요.’
하여간 이놈의 술이 문제다. 아이작은 정말 술을 끊겠다는 지키지도 못할 다짐을 재차 되새겼다.
“그나저나,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 것 같은데.”
느릿한 목소리가 상념을 일깨웠다. 서늘한 시선에도 아이작은 싱글 미소 지었다.
“잡담이나 더 나누어도 좋지 않겠습니까?”
“국왕 폐하의 옥체가 나날이 쇠약해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까?”
아무렇지 않게 던진 한마디에 아이작의 눈빛이 돌변했다.
“…아니요. 처음 듣습니다만.”
“그렇겠죠.”
자신도 최근 들어서야 알았다며 느긋하게 덧붙이는 프란츠의 얼굴에는 위기감이라고는 없었다. 아이작은 진지하게 말했다.
“저주입니까?”
“일단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럼 독이겠군요.”
아이작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증거는 찾으셨습니까.”
프란츠는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전혀. 치밀하기 짝이 없더군요.”
이곳으로 오는 길에 겪었던 습격에 대해 간결하게 설명하자, 아이작의 얼굴은 더욱 심각해졌다.
“연관된 놈들일지 몰라 찾아보라 일렀습니다. 실력 하나는 유능한 이를 보내뒀으니 조만간 연락이 올 겁니다.”
덤덤한 목소리에서는 어떠한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설핏 흘린 감정의 결을 짚어낸 아이작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과연, 왜 갑자기 여기로 오셨나 했더니…. 비전하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까.”
“…….”
“이런 상황에 비전하를 마냥 왕궁에 둘 수는 없을 테니까요.”
프란츠가 픽 웃으며 창가 쪽을 쳐다보았다. 날이 좋아서인지 샛노란 햇살이 나무 바닥을 적시고 흘러내렸다. 곱게 뻗은 나뭇가지에서 새 우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얼핏 보기에도 평화롭고 안락한 곳이다. 그래서 그토록 곧게 자라난 걸까, 당신은.
“자기 사람을 보호하는 건 당연한 의무니까.”
얼핏 듣기엔 부드러운 어투였으나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그 이유를 바로 짐작한 아이작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국왕 폐하를 원망하십니까?”
프란츠는 잠시간 침묵했다.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갈색과 하얀색이 조화를 이루는 따뜻한 배경에 아름답고 우아한 얼굴, 그럼에도 손끝에선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서늘함이 묻어났다.
“때를 놓치고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었을 뿐이죠. 난 그렇게 살 생각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