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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세자비의 사정-18화 (19/171)

제18화. 장인과의 독대

사실상 프란츠가 지금까지 몸 성히 살아 있도록 하는 데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 인물을 고르라면, 프란츠의 주변인들은 두말없이 제롬 플린트를 꼽았다.

감도 뛰어났지만 검을 다루는 센스 역시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인 만큼, 그는 프란츠에게로 향하는 수많은 암살 시도를 깔끔하게 처단했다. 그 신분이 낮지만 않았어도 유베르그 기사단에 소속되고도 남았을 인재였다.

“그 녀석의 임무는 내 호위니까.”

제롬까지 임무에 보내기에는 가는 길에 또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태연한 대답에 티레인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 제가 전하께 올해 들은 말 중 제일 어처구니없는 발언인 것 같은데요. 전하만큼 자기 몸 잘 안 챙기는 사람이 또 있었습니까? 저희가 그렇게 잔소리를 하던 게 이렇게 고쳐질 줄 알았으면, 진작 결혼이나 하시라고 할 걸 그랬네요.

구시렁거리는 목소리를 프란츠는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실제로 제라니아와 함께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제롬 역시 티레인과 동행하도록 시켰을 것이다. 검에 뜻이 없다 하나 제 한 몸 건사하지 못할 정도로 연약하지는 않았으니까.

- 으음…. 아무튼 일단 찾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어, 저건?!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곧바로 거울이 원상태로 복귀되었다. 무언가 일이 생긴 듯했으므로 프란츠는 다시 그를 부르는 대신, 거울을 덮었다.

등불을 끄자 온 사방이 어두워졌다.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수려한 얼굴을 비스듬히 비췄다.

언제나 빛보다는 어둠이 편했다. 눈에 띄면 띌수록 주변이 평화롭지 못했으므로. 적막한 어둠에 파묻혀 있자면 아무도 자신을 찾아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어린 시절에나 했을 유치한 감상이었다.

제라니아는 아마 자고 있겠지. 아니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까. 첫날밤에 들은 어서 오라는 인사도 그렇고,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는 감각이란 묘했다. 어머니가 죽고 나서는 한 번도 그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하긴, 긴장된다고 해놓고서 금세 제 품에서 새근새근 잠들던 걸 생각하면 이미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기다리고 있다면 그것대로 기분이 이상할 것 같았다.

프란츠는 조금 더 그 자리에 머물렀다.

* * *

바이첸 공작 부부와 그 아들 부부는 다음 날 오후에서야 성에 발을 디뎠다. 가족들을 반가워하는 제라니아의 뒤에서 능숙하게 인사를 나누던 그는 곧 공작과 함께 그가 주로 머무는 집무실로 들어갔다.

넓고 쾌적한 공간의 양옆으로 책장이 차곡차곡 펼쳐져 있었다. 그 외에도 독특하게 생긴 장식품이나 물건들이 안에 들어 있었는데, 척 보기에도 외국에서 들여온 것들이 상당했다.

당장 책장 아래에 보이는 커다란 공간에 놓여 있는 동그란 거울을 단 기다란 물건은 왕세자인 그조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공작은 그것을 망원경이라 이야기했다.

“귀한 분을 모시는데 대접이 부족하지는 않았나 걱정되는군요.”

방의 중심에 자리한 널찍한 소파에 앉으며 공작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역시 미소로 화답하며 그의 맞은편에 앉은 프란츠가 그를 탐색하듯 응시했다.

아이작 바이첸. 현재 재상직을 맡고 있는, 이 나라에서 왕실 다음으로 최고의 권력을 누리는 남자. 왕국에는 네 명의 공작이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역사가 가장 오래된 가문인 만큼 가지고 있는 세력 역시 어마어마했다.

무인을 중시하는 왕궁 내에서도 검과는 인연이 없기로도 유명한 이였다. 대신 재치가 뛰어나고 언변이 좋아, 딱히 적도 아군도 두지 않기로도 유명했다. 왕국의 사교계에서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프란츠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짙은 적갈색 머리카락에 회색빛이 도는 벽안, 피하지 못한 세월이 입가와 이마에 자글자글했지만 켜켜이 스며든 온화한 분위기가 그의 얼굴 위로 머물렀다.

문득 프란츠는 공작과 제라니아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저 치만큼 능글맞지는 않지만 언변도 그렇고, 무엇이든 꿰뚫어 볼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도 그랬다. 물론 제라니아의 눈이 훨씬 더 다정하기는 했다.

“이거야 원, 이렇게 전하를 독대하는 것도 참 오래간만인 것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프란츠 전하.”

“…공작과 자주 만날 일이 있으면, 그게 더 큰일 아닐까요.”

얼굴을 볼 일은 적지 않았으나 가장 먼 사이이기도 했다. 공작은 국왕에게 충성하는 것과는 별개로, 언제나 일정 선을 긋고 왕실 사람들을 대했다.

그와 단둘이 만나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그 공통분모에는 반드시 국왕이 있었다. 그의 딸과 결혼을 했으니 이전과는 조금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하긴 그건 그렇지요.”

아이작은 그에게 차를 권했으나, 프란츠는 단호히 거절했다.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갑자기 서신을 보내셔서 기절할 듯이 놀랐습니다. 영지로 오시는 길에 습격을 받으셨다지요. 짚이시는 곳은 있습니까?”

가만히 턱을 매만지던 프란츠가 곧장 대답했다.

“너무 많아서 추리기가 어렵군요.”

“하하, 여기저기 원한도 참 많이 사고 다니셨나 봅니다.”

저처럼 착하게 살았어야 하지 않느냐고 느물거리는 공작을 프란츠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거만하게 뒤로 기대어 앉은 프란츠가 더 말해보라는 듯 턱을 까딱하자, 공작이 너무하다는 듯 이죽거렸다.

“이래 봬도 장인어른과 사위 간이 아닙니까? 태도가 너무 차가우신 게 아닌지.”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오, 그럴 리가요. 전하께 장인어른 대접을 받는다니,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습니다.”

제법 진심을 담아 대답하며 프란츠의 얼굴을 살피는 아이작의 눈빛이 오묘했다.

제 딸과 결혼했다지만 지금도 참 어색했다. 제라니아가 결혼을 했다는 것도 그렇고, 그 상대가 하필이면 이 고고하기 짝이 없는 왕세자 전하인 것도 그랬다.

빈틈없는 미소로 무장하고 있으나 냉혹한 면모가 있는 실리적인 정치꾼. 아이작이 판단하는 프란츠 리나엔은 그런 남자였다.

현재 가장 유력한 차기 국왕 후보는 셋. 데릭 왕자나 아이렌 왕비 소생의 이안 왕자, 그리고 눈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 정도였다.

그러나 셋은 결정적으로 시작점이 달랐다. 현 왕비가 쌓아둔 세력에 기반을 둔 이안과 휴스타인 공작가와의 결탁을 통해 세력을 키운 데릭과 달리, 그는 맨몸으로 지금의 세력을 쌓아 올린 능력자였다.

그의 어머니가 리베라 후작의 누이였다고는 하나, 후작은 헤리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서부 지역에 주로 상주하고 있어 중앙 정계와는 거의 연관이 없다 해도 무방했다.

세력을 키우려고 할 때 가장 안정적인 방식이 혼인이라는 걸 생각하면, 프란츠 왕자의 행보가 확실히 의외롭기는 했다. 데릭 왕자도 혼인이 좀 늦긴 했다지만 프란츠는 아예 결혼에 뜻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렇게 인기가 많은데도 이렇다 할 염문이 돌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귀족들이 은근슬쩍 혼담을 권유하는 말들도 구렁이가 담을 넘듯이 자연스럽게 흘려 넘기던 모습만 봐도 그랬다.

그런 인간이 갑자기 제게 혼담을 보내왔는데 놀라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상대의 이름을 봤을 때는 기절할 뻔했다.

제라니아 바이첸. 가장 생각지도 않았던 이름이 편지에 떡하니 쓰여 있던 걸 봤을 때의 기분이란. 기뻐하는 아내 앞에서 차마 심란함을 표현할 수가 없어 표정을 관리하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었다.

게다가 이미 제라니아가 청혼을 받아들였다니. 편지에 적혀 있는 그 문구를 본 순간 아이작은 급하게 창밖을 살폈다. 그는 자식들에 대해 어느 정도 잘 알고 있다 자부했다. 오늘 해가 서쪽에서 뜬 게 아닌 이상 이럴 수는 없었다.

장인어른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으니, 묻어두고 있었던 궁금증이 탄력을 받아 의식 위로 다시금 떠올랐다.

“도대체 제 딸한테서 어떻게 결혼을 하겠다는 소리가 나오게 하신 겁니까?”

“…….”

“전하를 좋아하는 그 수많은 여인들을 마다하고 그 아이를 선택하신 이유가 뭔지, 그것도 참 궁금하고 말입니다.”

“평소에 주책이라는 소리 안 듣습니까?”

자식 연애사에 도대체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 거냐고 돌려 말하자 아이작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주책이란 소리를 듣더라도 궁금한 것을요. 제 자식들 중 가장 결혼과 인연이 없어 보이는 아이였는데 말입니다.”

“다들 보는 눈이 없군요.”

아이작은 재미있다는 듯 눈을 빛내며 반박했다.

“보는 눈이 없긴요. 보는 눈이 있는 치가 있어도, 전부 거절하는데 어쩌겠습니까?”

당장 휴스타인의 애송이만 해도 어릴 때부터 아주 목을 매지 않았던가.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놈이 제 딸 앞에서만 유독 웃음이 헤퍼지는 것만 봐도 뻔했다.

프란츠가 기묘한 것을 보듯이 아이작을 응시했다. 기분 나쁜 눈초리에도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계십니까?”

“의외로운 소리군요. 누구보다도 정략결혼을 잘 활용할 것 같았는데 말입니다.”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끌어다 쓰는 수완가가 아닌가. 생략된 말이 프란츠의 눈동자에 둥둥 떠다녔다.

국왕이 그나마 이 정도로 정국을 이끌어갈 수 있었던 이유에는 전적으로 바이첸 공작의 힘이 컸다.

그는 뛰어난 정치가였고, 켄드릭은 검을 잘 쓰는 대신 정치적인 감각은 부족한 편이었으나 아이작의 말만은 무조건적으로 신뢰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왕궁에는 지금보다 간신배가 더 들끓었을 것이다.

아이작은 선선히 대답했다.

“골치 아픈 일은 사양이라서 말입니다. 비전하께서 제가 시킨다고 고분고분 따를 분도 아니고 말이지요. 실제로 짐을 싸들고 나간 적도 있으니까요.”

이건 또 새로운 정보였다. 프란츠의 얼굴에 제법 흥미로운 기색이 어리자, 아이작은 놀리듯이 히죽 웃었다.

“궁금하십니까?”

“아니요.”

말려들 생각은 없었기에 프란츠는 가만히 평정을 유지했다. 그래 봤자 속내가 뻔히 보인다는 듯, 아이작은 웃음기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튼 뭐, 기왕 인연을 맺었으니 잘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자고로 아내 말을 잘 들어야 집안에 평화가 온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제라니아가 왕비가 된다면 최소한 다음 대에 망하지는 않겠지. 느긋하게 대꾸하는 아이작을 보며 프란츠는 피식 웃었다. 두 손을 모아 무릎 앞에 걸치며 그는 퍽 신기하다는 듯이 아이작의 얼굴을 살폈다.

“재미있는 대답이군요. 정작 혼담을 넣었을 때는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왕실에서 혼담이 들어왔다면 보통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텐데, 바이첸 공작이 보낸 답신은 정중했지만 전반적으로 떨떠름한 기색이 엿보였다.

굳이? 왜? 내 딸이랑? 진심이십니까? 와 같은 느낌의 물음표가 한가득 그려져 있는 듯한 문장들이 가득 쓰여 있던 편지.

그렇게 노골적인데도 워낙 글 솜씨가 유려해 트집 잡힐 구석이 전혀 없는 점까지도 참 공작답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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